[응모]훈춘땅에 휘뿌려진 렬사의 넋
래원:중앙인민방송국      2012-08-22 16:56:00

얼마전 나는 12년만에 다시 훈춘땅을 밟게 되였다. 10년이면 강산도 변한다더니 시야에 펼쳐진 훈춘풍경은 나의 눈을 황홀하게 하였다. 가슴이 확 트이게 뻗어나간 거리, 창공을 찌르며 우중충 일떠서는 아빠트들, 가는 곳마다 눈에 뜨이는 외국인들…

정녕 훈춘은 변했다. 산도 강도 마을도 변했다. 조국의 따사로운 품속에서 마음껏 춤을 추며 연변조선족자치주창립 60돐을 기꺼이 경축하고있는 훈춘땅을 바라보노라니 나의 머리속엔 1930년대 훈춘땅을 주름잡으며 왜놈들과 판가리싸움을 하다가 억울하게도 “민생단”의 감투를 쓰고 장렬히 희생된 나의 큰아버지 김규봉의 항일투쟁사가 떠오른다.

민중을 불러일으킨 둘도 없는 선전부장 김규봉은 1905년 3월 훈춘현 대황구의 한 가난한 농민가정에서 태여났다. 어려서부터 남달리 총명한 김규봉은 오전에 학교에 가서 공부하고 오후에는 부모를 도와 방목도 하고 김도 매면서 집안일을 도왔다.

1924년 김규봉은 우수한 성적으로 룡정시 은진중학교에 입학하였으며 그때로부터 그는 맑스주의서적을 탐독하며 민주와 독립을 위한 반일학생운동에 적극 뛰여들었다. 한번은 학생들과 함께 항일삐라를 살포하다가 일본놈들에게 체포되여 혹독한 고문을 받았다. 1926년 은진중학교를 졸업한 김규봉은 고향에 돌아와 교편을 잡고 학생들에게 글을 가르치는 한편 조선에서 살길을 찾아 두만강을 건너온 실향민들에게 항일구국의 도리를 선전하여 백성들의 항일의 신심을 북돋아주었다.

1926년 5월 김규봉은 연변에서 첫패로 조선공산당조직에 가입하였다. 그는 김성도,김한병과 손잡고 훈춘당지부를 묶어세웠으며 대황구,중강자,북구,회룡봉,륙도구,중구,류형평 등 10여개 마을에 당소조를 설립하고 100여명의 당원을 발전시켰다.

1930년 7월, 김규봉은 정식으로 중국공산당에 가입하였다. 그해 가을 중공동만특별위원회에서는 류건장을 훈춘현당위원회서기로 파견하였다. 조선말을 모르는 류건장은 조선족을 선동, 조직하는 모든 사업을 선전부장 김규봉에게 맡겼다.

두뇌가 명석하고 구변이 좋은 김규봉은 가는 곳마다에서 일본제국주의의 죄행을 폭로하고 항일구국의 도리를 선전하였다. 그가 이르는 곳마다엔 언제나 그의 연설을 듣기 위해 백성들이 모여들었으며 놈들은 김규봉을 눈에든 가시처럼 여기고 체포령을 곳곳에 붙였다. 1931년 가을 김규봉은 현당위원회의 지시에 따라 처녀지 연통라즈에 갔다. 산세가 험악하고 쏘련과 이웃한 마을에서 김규봉은 야학교를 꾸려 농민들에게 글도 가르치고 비밀리에 개별교육을 진행하여 정재원,채병관 등 3명 당원을 발전시켰다. 뒤이어 김규봉은 또 동구,남별리,관도구 등 당지부를 묶어세웠으며 그가 발기, 조직한 얜퉁라즈는 전 훈춘일대 항일투쟁의 중심으로 발전했다.

1932년 2월, 김규봉은 얜퉁라즈에서 기세드높은 춘황시위투쟁을 조직, 발동하였다. 3월 중순의 어느날,서골,동골,월풍동 등지에서 모여온 500여명 농민들은 김규봉의 지휘하에 곤봉,괭이를 둘러메고 사진구로 돌진했다. 기세드높은 시위대오에 혼겁한 대지주 박덕현은 벌벌 떨면서 5,000근의 식량과 옷견지를 고스란히 내놓았다. 이날 김규봉은 시위대오를 인솔하여 지주들의 집을 모조리 다니면서 식량을 거두어 굶주린 농민들에게 나누어주었다. 기세드높은 춘황투쟁은 일제와 봉건지주들에게 커다란 타격을 주었으며 대중들을 항일투쟁에로 궐기시켰다.

훈춘에 둥지를 틀고있던 일제놈들은 헌병,경찰수비대를 총동원하여 얜퉁라즈를 불의에 습격했다. 마을이 텅비여있는것을 발견하고 분통이 터진 놈들은 집집에 불을 놓아 마을은 하루아침에 재더미로 되였다. 산속에서 이 참경을 목격한 김규봉은 눈물을 훔치면서 “여러분, 보십시오. 원쑤놈들은 마을을 재더미로 만들었습니다. 허지만 우리들은 살아있습니다. 놈들의 끝장이 멀지 않습니다. 우리 모두 일떠나 두손에 총칼을 들고 유격전장으로 나갑시다.” 라고 말하였다. 김규봉의 지휘하에 수백명 농민들은 곤난을 이겨내면서 새 마을 복구사업에 뛰여들었으며 쏘베트정부를 세웠다.

1932년 3월, 간악한 일본제국주의는 기세드높이 타오르는 항일투쟁의 봉화를 진압하기 위해 “민생단”이란 반동조직을 리용하여 공산당내부를 분화,와해시키려고 날뛰였다. 동만지방당조직도 당시“좌”경로선의 영향으로 160여명 당원간부들이 억울하게 목숨을 잃었다.

1933년 8월, 훈춘, 왕청의 유격대원들이 동녕현 삼차구를 돌연습격하여 왜놈들에게 커다란 타격을 주었다. 이 기꺼운 소식을 들은 김규봉은 대황구에서 돼지를 잡고 이번 전투의 승리를 축하하였다.

공교롭게도 8월18일 새벽에 밀영에서 휴식하던 유격대원들이 포위망을 뚫고나갔으나 13명 유격대원들이 장렬하게 희생되였다. 그런데 이번 사건에서 김규봉이 주요 혐의분자로 지목되여 김규봉은 “민생단”성원이라는 억울한 감투를 쓰고 훈춘현당위원회 선전부장직에서 파직당하였고 당적마저 제명당하였다. 그러나 김규봉은 당에 대한 굳은 신념을 잃지 않고 동녕현 만보만일대에서 계속 항일활동을 견지하였다. 1934년 6월의 어느날, 만보만툰에서 군민련합대회를 열고 김규봉과 그의 안해 황정선을 비판,투쟁했다. 누구도 발언하는 사람이 없으니 사회자는 두 유격대원에게 김규봉을 훈춘으로 압송(기실은 도중에서 처단하라고 했음.)하라고 하였다.

그들이 깊은 산속에 이르렀을 때 뒤에서 갑자기 말발굽소리가 났다. 두 유격대원은 왜놈들의 토병대가 쫓아오는줄로 알고 줄행랑을 놓았다. 김규봉은 토벌대가 아니고 말무리라고 소리쳤다. 두 유격대원은 계속 앞으로 나가다간 어떤 봉변을 당할지 몰라 밀림속 깊은 곳에서 김규봉이 주의하지 않는 틈을 타서 날창으로 김규봉의 가슴을 연거퍼 찔렀다. 29세 아까운 나이에 김규봉은 “민생단”분자란 모자를 쓰고 일생을 마쳤다.

력사는 언제나 공정한 판결을 내린다. 1987년, 중공훈춘시당위원회에서는 나의 큰아버지 김규봉의 억울한 사건을 다시 조사하여 그릇된것을 바로잡고 “민생단”분자란 억울한 감투를 벗겨주었으며 나의 아버지 김규송도 “문화대혁명”때의 “조선특무”라는 억울한 감투를 벗게 되였다.

나의 큰아버지 김규봉의 혁명정신은 연변력사에서 지울수 없는 한페지로 남아있을것이다. (김철 구술, 리상민 정리)

 

편집:심영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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