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응모] 연변, 그리고 나의 소원
래원:      2012-08-22 17:03:00

나는 연변의 한 시골에서 태여나서 자랐으며 연변제1사범학교를 졸업하고 줄곧 고향인 시골에 돌아와서 교육사업을 해왔다. 그러니 나는 순수한 연변의 시골선생이다. 그러나 시골아이들을 인재로 키운다고 생각하면 늘 가슴이 뿌듯하고 행복하다.

43년의 인생살이, 사범학교를 다니던 4년을 빼고는 한번도 고향을 떠나본적이 없는 나, 그러나 연변의 발전과 더불어 나의 소원은 끊임없이 변해왔다.

유복자인 아버지와 가난한 집의 셋째딸인 어머니는 첫날옷도 빌려입고 결혼식을 올렸단다. 결혼후 뉘집 닭우리를 손질하여 살림을 차렸는데 거기서 내가 태여났단다. 그때까지는 나 혼자였으니 조금이나마 괜찮았겠지만 그후 두 남동생이 태여나면서 우리 집은 더욱더 가난해졌다.

“맨발의사”인 아버지, 매일 별을 이고 나갔다가 달을 지고 돌아오는 어머니, 어머니는 매일 밤 손바닥만한 허술한 목책에다 공수를 열심히 적었다. 그러나 년말총결을 마치고 돌아와서는 어머니의 한숨소리가 높아진다. “어유, 금년에도 또 -5전이니 일년 뼈빠지게 일해도 빚뿐이고… 금년 식량은 어떻게 합니까?” 아버지는 대답 대신 묵묵히 앉아 초담배만 피운다. 어머니의 한숨소리와 아버지의 우울한 표정에서 나는 새해에도 밥을 배불리 먹을수 없다는것을 느낄수 있었다. 그때는 이밥을 배불리 먹는것이 나의 유일한 소원이였다.

소학교에 다니면서부터 나는 학교에 갔다와서는 막내남동생을 돌봐야 했고 또 때시걱도 끓여야 했다. 풍로불을 피운후 감자를 넣고 삶는다. 감자가 푹 익으면 물을 찌워버리고 거기에 사카린을 넣고 주걱으로 짓이긴다. 그것을 이 빠진 공기에 담으면 우리의 식사준비는 끝난다. 그때 나는 손님이 오기를 손꼽아 기다렸다. 그나마 손님이 오는 날이면 어머니가 감추어두었던 입쌀을 꺼내 이밥을 짓고 닭알을 삶기때문이다.

세대별 생산량도급제를 실시하면서부터 우리는 이밥을 배불리 먹을수 있게되였다. 그러자 아버지께서 새벽대학에 가서 본격적으로 의학공부를 시작하였다. 그러다보니 우리 집 생활은 펴일수가 없었다. 어머니는 혼자서 농사를 지으면서 아버지의 학비를 마련해야 했다. 나는 자주 어머니가 옥수수쌀이나 고추가루를 이고 십여리 길을 걸어 시장에 가는것을 보았다. 아마 아버지의 학비때문이였을것이다. 그때 나는 십여리 떨어진 초중을 걸어서 다녔기에 점심밥을 싸가지고 다녔는데 기억에 제일 남는 반찬은 무우짠지였다. 그러나 나는 어머니처럼 살지 않으리라 결심하면서 열심히 공부하였다. 그때 나의 꿈은 대학생이 되는것이였다.

나는 정말 대학에 가고싶었다. 그러나 어려운 가정형편때문에 대학꿈을 접고 초중을 졸업할 때 사범학교를 지망하였다. 비록 내가 바라던 학교는 아니지만 입학통지서를 받던 날 호미자루를 쥘 운명을 면하게 되였다고 생각하니 날듯이 기뻤다.

나는 고모가 입던 군복을 입고 삼촌이 만들어준 나무상자를 지니고 사범학교에 입학하였다. 다행인것은 사범학교에서는 교과서값도 면제이고 식권도 주는것이였다. 달마다 어머니에게 10원이나 20원의 소비돈을 가졌는데 거기서 조금씩 모았다가 눅거리옷만 사입다보니 나의 옷은 전부 눅거리였다.

사범학교 3학년 때 나에게는 남자친구가 생겼다. 키가 크지 않지만 잘생겼고 직장도 있었으며 아버지는 정부기관에서 사업하고계셨다. 나한테 행운이 찾아온것이였다. 반년 넘게 사귀다가 그 남자가 리별을 선포했다. 리유인즉 내가 너무 촌스럽다는것이였다. 그때까지 나는 가난때문에 부끄럽다는 생각을 해본적이 한번도 없었다. 그러나 처음으로 가난때문에 상처를 받으면서 “나도 예쁜 옷을 마음껏 사입을수 있었으면 얼마나 좋을가!” 하는 소원을 가지게 되였다.

상처 입은 나는 그 분풀이를 어머니에게 했다.“엄마는 내가 19살이 되도록 이쁜 옷 한번 사준적 있습니까?”말을 잘 듣기로 소문난 내가 이렇게 투정을 부리자 어머니는 아무 말씀도 하시지 않고 눈물을 줄줄 흘리셨다. 나는 알고있다. 그날밤 어머니는 온 밤을 뜬눈으로 지내면서 눈물로 베개잇을 적셨다는것을.

이튿날 아침 어머니는 일찍 나갔다가 저녁때가 거의 되여서야 집에 들어서더니 옷을 내놓으며 나보고 옷을 입어보라고 하셨다. 어머니는 룡정 큰어머니에게 가서 돈을 꾸어가지고 60원을 주고 나의 웃옷을 사왔던것이다. 그때 나는 좋아서 입을 다물지 못했지만 지금 생각해보면 어머니 가슴을 멍들게 했던것 같다. 그 죄책감때문에 너무 미안해진다.

사범학교를 졸업하자마자 나는 국영공장에 출근하는 남자와 급히 결혼식을 올렸다. 그래도 가난은 피할수가 없었다. 시집이 로동자가정이라고는 하지만 시어머니가 일찍 중풍에 걸려 돈을 많이 쓰다보니 생활이 넉넉하지 못하였다. 그래서 함께 생활할 때는 두 사람의 월급을 모두 시집에 바치다보니 임신했어도 먹고싶은것을 사먹을수 없었다. 남편이 가끔 용돈으로 사과를 한두알 사다가 식구들 몰래 나에게 주었다. 그때 이불밑에서 사과를 먹으면서 먹고싶은것을 마음대로 먹을수 있었으면 하는 생각을 했었다.

아들애가 태여날 무렵 시어머니의 동의하에 우리는 세간을 났다. 집세를 물 돈으로 동료한테서 돈 500원을 꾸었다. 해산후에도 꾼 돈을 물려고 돈을 아끼면서 제대로 먹지 못하여 그랬던지 젖마저 나오지 않아 아들애에게 우유를 사먹여야 했다. 한봉지에 4원 50전씩 하는 우유 살 돈마저 없어서 나는 가끔 동네집에 가서 돈을 꾸기도 하였다. (우유 살 돈이라도 있었으면 정말 좋겠다.) 그런 나의 마음을 꿰뚫어보기라도 하듯 30대 초반인 남편이 밤시간과 휴일을 리용하여 얼음과자장사에 나섰다. 그렇게 번 돈으로 우유를 살수 있어서 너무 좋았다.

둘 다 직장이 있다보니 점차 생활이 펴이기 시작하였다. 부지런한 남편은 공장에 출근하면서 휴일이면 삼륜차까지 몰면서 돈을 모았다. 얼마후 6,000원의 저금까지 있게 되였다. 이제 만원호가 되여야지. 우리한테는 잘살 일만 남았다고 기뻐할 때 남편이 정리실업을 당했다. 엎친데덮친격으로 시아버지마저 뇌출혈로 쓰러지셨다. 남편이 맏이다보니 울며 겨자먹기로 지금껏 모은 돈을 모두 시아버지의 병치료에 쓰게 되였다. 그러나 시아버지는 끝내 돌아가셨다. 우리 부부는 또 이전의 빈털털이로 돌아갔다.

남편은 나를 행복하게 해준다는 약속만 남겨두고 한국행을 택하였다.

남편은 고생스럽게 번 돈을 나에게 어김없이 보내주었다. 그덕에 나는 40살에 겨우 불 때는 집을 면하게 되였다. 나는 따뜻하고 아름답게 장식된 집에서 살면서 아름다운 꿈을 꾼다. “남편이 그렇게 부러워하는 차도 사주고 연길에 집도 사야지. 그리고 아들 장가 보낼 비용도 넉넉히 마련해야지.”

지난해 직업고중을 졸업한 아들도 한국으로 떠났다. 아버지에게서 부지런함을 배운 아들도 식당에서 일하면서 열심히 돈을 모아서는 나에게 보낸다. 나의 월급도 금방 졸업할 때보다 30배나 올랐다. 이제는 내 월급만으로도 입고싶은것을 마음대로 입고 먹고싶은것을 마음대로 먹을수 있다. 일년에 소고기 한근 사는것도 주저하던 나에게 이런 기쁜 날이 올줄은 꿈에도 생각지 못하였다.

비록 시골에서 아이들을 가르치는 선생이지만 지금은 부러운것이 하나도 없다. 나에게는 내가 좋아하는 직업이 있고 소중한 가족들이 있고 내가 만족할만한 돈도 있으니깐.

나는 바란다, 우리 가족이 행복하기를.

나는 바란다, 제자들이 훌륭한 인재로 성장하기를.

나는 바란다, 내 고향 연변이 더욱더 발전하기를. (최홍화)

편집:최월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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