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응모]우리 말에 담은 진정어린 사랑
래원:중앙인민방송국      2012-08-22 16:59:00

50년 가까운 세월이 흘러 모든것이 많이 바뀌였다. 하지만 세월이 흘러도 변함없이 내 마음속에 아직도 감회가 깊어 잊혀지지 않는 사연이 있다.

1965년 하반년이였다. 우리 마을(안도현 석문공사 중평대대)에는 사회주의교육공작조가 내려왔다. 그 대오속에는 연변가무단 김태희단장님이 계셨다. 김선생님은 공작조 조장이였고 당조직건설을 책임지셨다. 년세가 제일 높으신것 같아보였는데 얼핏 보아도 50대 중반은 되신것 같았다. 훤칠한 체구에 희끗희끗한 머리카락, 점잖으신 얼굴표정에는 지식인의 분위기가 물씬 풍겼으며 인생세파의 여운이 남아있었다.

점잖으셔서 어렵게 보였지만 이야기를 나누어보면 소탈하고 유모아적이여서 상대방에 맞추어 편하게 대해주시는분이셨다. 그래서인지 촌사람들은 어른아이할것없이 모두 "김아바이"라고 허물없이 불렀다.

마을사람들사이에서는 "김아바이"가 대학을 세개 나왔다는 소문도 돌았고 사람들의 사랑을 받고있는 노래 ≪좋은 종자 가려내세≫의 가사외에도 많은 가사와 작품들을 쓰신 대단한분이라는 말들도 전해졌다.

듣는 말에 의하면 김단장님은 주덕해주장이 흑룡강성 민족사무처 처장으로 계실때 그 산하의 문공단의 단장으로 사업하시다가 공화국창건직전에 주덕해동지가 연변에 오시면서 함께 오셨다고 한다. 공작대로 오실 때는 연변가무단 단장, 연변예술학교 명예교장셨다.

덕망이 높으신 이분이 바로 내가 평생을 두고 잊을수 없는 은인이시다. 나에게 삶의 도리를 일깨워주신 고마운 선생님이시다. 단원들도 뵙기가 어렵다는 김단장님의 직접적인 도움을 받았다는것이 너무 큰 행운이고 또 인연이 아니였나 생각해보게 된다.

아침일찍 거리에 나가면 김단장님은 어느새 마스크를 착용하고 대원들과 함께 비로 마을거리를 쓸고 계신다. 지저분하던 거리는 말끔하게 변한다.

공작대가 내려왔을 때 청년들은 한창 "9.3"문예경연대회준비에 열을 올리고있었다. 가무조와 연극조로 나누었는데 나는 연극조에 참가하였다. 사회라는 큰 교실에 뛰여들어 모든 일을 열정만으로 부딪쳐보려 했고 무엇보다 꼭 해야 한다는 의무감과 책임감으로 했다. 학생시절에 글짓기를 즐겼던것을 밑천 삼아 "도깨비"마냥 밤새워가면서 재담도, 소품도 써내였다. 재담 ≪일장오원제≫는 생산대에 새로 나온 조직기구를 알게 하려는데 목적이 있었고 소품 ≪시어머니와 며느리≫는 두 시어머니의 수다를 통해 마을에서 발생한 고부간의 모순들을 폭로하고 도리로 그 갈등을 해결하려는데 취지를 두었다. 문화생활이 필요했지만 그럴만한 공간과 시간이 부족했던 세월인만큼 서투른 연기라도 사람들은 흥미롭게 구경하였다.

김단장님은 연극조에 오시여 이것저것 물으시였다. 내가 서툴게 써놓은 재담과 소품을 보여드리면서 "잘쓰지 못했습니다." 라고 기여들어가는 소리로 말씀드리자 "무대우에서 우리 말로 연기를 한다는 자체가 아주 자랑스러운 일입니다. 단술에 배부를수 없지요."라고 따뜻하게 말씀해주셨다. 조선족, 한족 련합대대였는데 한족청년들은 엄두조차 못내는 일이여서 하신 말씀 같았다. 빙그레 웃으시며 대본을 깐깐히 훑어보시더니 "마을에서 실제 생긴 생생한 재료여서 낯설지 않고 익숙합니다.

" 대사속에 "시어머니종자가 따로 없고 며느리종자가 따로 없다."는 대목을 보시더니 대중속에서 나와 다시 대중속으로 들어가는 대중의 언어라고 치하하시였다. 천방지축으로 걸음마 익히는 어린애같은 나에게 긍정적인 평가까지 내려주시니 힘이 솟는것 같았다. 그리고 매끈하게 다듬어서 예술적기교를 높이는법을 차근차근 가르쳐주셨다. 한마디 말이라도 절대 소홀해서는 안되고 추려서 제일 적절한 말로 골라써야 한다고 알려주시였다. "우리 말과 글을 사랑하면서 잘 살려서 후대에 물려줘야 합니다."

그러시고는 미끈한 손가락으로 극본을 가볍게 툭툭 치시더니 천천히 "언어문화는 그 민족의 재부이자 유산입니다." 라고 경건히 말씀하시였다. 마치 그 어떤것을 예감하신듯이… 한마디한마디가 모두 알짜 수업이였다. 우리 언어문화에 대해 이처럼 깊은 사랑을 쏟고계시는 선생님앞에 머리가 숙여졌고 소중한 말씀들을 죄다 마음속에 아로새기게 되였다. 배운 뒤에야 부족함을 알게 된다더니 자신이 부끄러워졌다.

선생님께서 친히 작사, 작곡하시고 연기지도까지 하신 ≪촌가≫는 녀성표현창으로 경연무대에 올라 우수상을 탔고 소품도 우수상에 올랐다. 덕분에 좋은 성적을 거두었다고 온 마을이 들썽하였다.

그후 입당수속절차를 밟으면서 선생님을 자주 뵙게 되였다. 그때마다 많은 도리를 일깨워주셨고 하고싶은 일을 하면서 꼭 성공하라고 고무격려도 많이 해주시였다. "선자동무, 하루에 60~70전 버는것을 목적으로 삼지 말고 높이 서서 멀리 내다보시오." 돈을 주고도 살수 없는 황금보다 더 보귀한 말씀이였다. 자서전을 쓰면서 고향이 언급되자 "나의 고향은 제주도입니다. 우리 고향에서는 산을 오름이라고 합니다." 라고 말씀하시던 선생님께서는 서글픈 표정을 감추지 못하셨다.

제주도가 멀게만 느껴지는 철부지에게 고향말씀을 왜 하셨을가? 고향생각이 얼마나 간절하셨으면 불쑥 그 말씀을 하셨을가. 살아서 가고싶고 죽어서 묻히고싶다는 고향이였지만 사무치게 그리워도 갈수 없는 고향이였으니까. 그토록 그리며 기다리시던 그날은 끝내 돌아오지 않고 이루지 못한 소원은 한으로 남았으리라. 더군다나 그립고 그리운 고향이 "죄장"이 되였으니 얼마나 억울하셨을가?

1966년 3월1일부터 공사에서 3급간부회의가 열리게 되여 축하공연준비를 해야 했다. 별 재주가 없이 연극이나 중얼거리는 나에게 선생님께서는 "선자동무, 형세에 알맞는 만담을 준비해보시오. 동무는 능히 할수 있습니다."라고 하시였다. 아래사람에게도 존대말을 하시는 선생님이셨다. 선생님께서 도와주신다는 믿음에 여느때와는 달리 마음이 든든하였고 신심도 생겼다.

현부녀간부 훈련반에 참가하여 현부녀련합회 심복실주임이 아이 8명을 낳은 28살 농촌녀성을 만나보았다는 말을 들은적이 있었다. 계획출산의 교재로서 그 당시 부녀사업의 중점인 계획출산에다 만혼을 곁들여서 만혼과 계획출산을 주제로 만담을 구상하였다고 말씀드렸더니 선생님께서는 아주 좋다고 대찬성이셨다. 그리고는 글감과 짜임새에 대해서 지도를 해주시였다. 우리 현의 실례와 급속한 인구장성률의 어마어마한 실제적통계까지 확실하게 내용에 담아 설복력있는 만담이 만들어졌다. 이제 연기만 잘하면 될것 같았다. 선생님의 제의에 따라 연기는 내가 맡기로 했다.

선생님께서는 연습은 숙달의 지름길이라고 하시면서 사람이 모인 곳이면 어디든 연습장소로 삼고 내세우셨다. 시청자와의 거리가 너무 가까와서 쑥스러웠지만 선전이라 여기고 눈을 질끈 감고 연습을 거듭하였다. 그랬더니 차차 자신이 생겼다. 3월1일에 무대에서 정식으로 관중들과 대면하였다. 지성이면 감천이라고 거듭된 연습이 헛되지 않았다.

생각밖에 내용도 훌륭하고 연기도 잘 되였다며 반영이 매우 좋았다. 어느새 공사앞 선전란에는 사진이 나붙었고 회의에 오신 현의 령도동지들의 접견까지 받았다. 석문공사 엄증국당위원회부서기께서는 친절하게 악수까지 청하시면서 "무대에선 중년녀성 같더니 동무가 그 배우였다니 믿어지지 않는구만. 참 훌륭한 연기였소. 극본도 동무가 썼다면서?"라고 하시는것이였다. 처음 뵙는 엄부서기의 칭찬에 얼굴이 화끈 달아올랐다.

3월3일에 엄부서기께서 나를 부르시더니 "길림성에서 업여작가 적극분자대표대회가 열리는데 동무가 참가하오. 가서 많이 배우오."라고 하시였는데 너무 기뻐 꿈인지 생시인지 분간할수 없었다.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많이 배워오겠습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과분한 배려에 연신 감사를 드리면서 저도모르게 눈시울이 뜨거워났다. 어느새 김선생님께서 옆에 오시더니 "좋은 기회이니 잘 배워가지고 오시오." 라고 환하게 웃으시며 당부를 하시였다.

회의는 1966년 3월 5일부터 3월 20일까지 길림성당학교에서 열리였다. 문화예술분야에서의 령도동지들과 전업작가들까지 연변에서 60여명이 참석하였는데 리상각선생님, 허해룡선생님, 김기철선생님이 기억난다.

김선생님은 나에게 귀를 열어주었고, 눈을 뜨게 하였으며 마음의 길을 열어주었다.

글은 집안에 앉아서 쓰는게 아니라 대중속으로 들어가 대중의 목소리에 귀기울이라던 당부가 인상깊게 남아있다.

나는 연변의 유일한 조선족녀성대표로 소조에서 발언까지 하는 영광을 가지게 되였다. 발언에서 연극단의 공연효과는 중약과 같고 현지의 사실로 공연하는 효과는 정통편과 같다고 생각했던 그대로 이야기를 하였더니 모두들 머리를 끄덕이셨다. 회의 참가자들이 길림성의 령도동지들을 모시고 기념사진을 남겼으나 아쉽게도 그 사진을 받아보지 못하였다.
선생님께서는 혜성처럼 나타나셔서 배움에 허기졌던 나를, 세상물정에 눈도 못뜬 철부지를 진심으로 가르치시여 평생 꿈도 꿀수 없었던 자리에 앉혀주셨고 희망과 용기를 실어주셨으며 빛이 되여 앞길을 밝혀주시였다.

안개속에서 좌우를 분간하기 어려웠던 나날, 군복차림의 두 "혁명파"가 찾아와서 "반역자"와 내통하였으니 주의하라는 경고를 내리며 "독초편지"를 내여놓으라는것이였다.

1966년 5월 25일에 공작대가 돌아간후 선생님께 안부문안편지를 드렸더니 분망하신 와중에도 답신을 주셨다. 다시 회답편지를 써서 보냈는데 이 두통의 편지가 그들의 손에 들어간 모양이였다. 득의양양한 그들에게 독초가 아님을 증명하려고 내여든 편지를 다짜고짜로 와락 낚아채서 가방에 쑤셔넣고는 ≪촌가≫도 독초가 있으니 부르지 말라고 령을 내리고 휑하니 가버렸다.

고향을 떠나 멀리 타향에 오시여 고생을 락으로 삼으시고 우리 민족의 후예들을 위하여 민족의 얼을 가르치시며 내고향 연변을 예술의 고장으로 장식하시던 연변예술의 별이 되신 선생님…

발길이 머무시는 어디든 사랑의 빛을 뿌려 어둠을 가셔주시고 새로운 희망이 꽃피고 열매 맺게 하신 예술의 원예사 선생님. 선생님께서 너무 일찍 우리곁을 떠나신 불행은 연변 인민의 커다란 손실이였고 우리 민족의 크나큰 손실이였다.

항일투사들의 넋이 고이 잠든 연변땅은 세월속에 아픔을 묻고 고난의 60성상을 걸어왔다.

연변조선족자치주창립 60주년을 맞는 기쁨의 나날에 환하게 웃으시는 선생님의 모습을 사진으로 보노라니 마음이 젖어든다.

"우리 말과 글을 잘 살려서 후대에 물려줘야 합니다. 언어문화는 그 민족의 재부이자 유산입니다."라고 하시던 선생님, 선생님이 시골마을에 심으신 이 꿈나무는 자라서 또 새로운 꿈나무들을 키워냈습니다. 저는 평생을 우리 아이들에게 우리 말과 글을 가르치면서 그 어떤 역경도 이겨 나가리라 다져봅니다… (허선자)

 

편집:심영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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