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응모] 머나먼 연변
래원:      2012-08-22 16:51:00

우쑤리강류역의 호림벌에서 자라난 나에겐 연변에 가볼 기회가 없었다. 연변이 저기 있다고, 어렸을적엔 지평선너머로 한껏 내다보아도 눈에는 물론 상상속에도 하늘의 푸른색뒤에 숨은 동화속의 성곽처럼 보일듯말듯하여 륜곽이 알리지 않았다. 어른들의 말에 의하면 연변은 천리 밖에 있다고 한다. 천리, 그야말로 혀를 내두를만한 거리였다. 우리 초급사의 1조가 5리 밖에 있었다.

나는 그때까지 그곳에 가본적이 없었다. 무연한 벌판으로 내다보면 눈길이 멀리 닿는 곳에 옹기종기 들어앉은 초가집이 보였고 멀리서 걸어 들어오는 어른들이 마치도 아이처럼 돼보였다. 5리가 저렇게 머니 천리는 대체 얼마나 멀가? 그야말로 하늘끝에 닿을만큼 멀것 같았다. 한번 연변에 가봤으면 하는, 나에게 있어선 내가 가보고싶은 곳이 내가 가지 못할 곳에 있다는것이 내 인생의 첫 타격이 아닐수 없었다.

기실 어른들이 나에게 심어준 연변의 첫 이미지란 부정적인것이였다. 연변은 “인심이 박한” 곳, 연변은 사람들이 “발가진” 곳—이것이 나의 최초의 연변인상이였다. 그러나 어른들의 대화에서 연변은 우리 마을은 대비도 안되는 “조선족들” 이 많이 살고 조선족이 “드센 곳”이란것을 알게 되였다. 어른들이 연변의 험담을 하고있지만, 그곳에 가선 못산다고 하고있지만 그곳을 말할 때면 “좋기는 좋은 곳이지”하고 토를 다는것을 봐서 연변은 “조선족이 우쭐하는 좋은 곳”인것은 틀림없는것 같았다. 좋은 곳인데 왜 가서 살지 못할가?

지금 생각하면 우스운 일이지만 그때 그런 의문이 든것은 내 맘속 깊은 곳에 연변에 이사갔으면 하는 생각이 있었던것 같다. 두어살 때부터 이사 오고 이사 가고 하는 송아지동무들이 많았는지라 이사는 아마 내가 제일 처음 인상깊이 느낀 우리의 삶의 모습이였을것이다. 특히 그때 렬세에 처한 민족지위를 실제 이상으로 느끼고있었던 때라 우리 집도 이사 떠나면 연변으로 갔으면 하는 생각을 수시로 하고있었다.

1950년대, 배달부가 집까지 신문을 날라다 주었다. 아버지가 그 때 ≪연변일보≫를 주문했기에 우리 집엔 푸른 옷 입은 배달부가 자주 드나들었다. 그때 겨우 유치원에서 이름자나 익힌 나로선 ≪연변일보≫의 내용에 대해선 아무 관심이 없었지만 연변의 신문이 우리 집에 온다는것, 이로 하여 배달부가 집에 드나드는것에 대해선 아주 기쁘게 생각하였다. 유감스러운것은 내가 학교다니기전에 집에서 신문을 더 주문하지 않은것이다.

지금 생각해보면 가정형편이 여의치 않아 계속 신문을 주문할수 없었던것 같다. 그러나 벽과 천정에 도배해놓은 낡은 신문은 읽어볼수 있었다. 물론 사설 따위는 보지도 않았고 또 봐도 모르는거고 지금까지 인상 깊은것이 단지부서기가 개별담화를 구실로 련애 거는것과 사진 찍으러 가자는 말을 “조상(照相)”하러 가자고 하였다는, 그래서 민족언어를 더럽혔다고 참회하는 이야기들이다.

글을 읽기 시작하면서 ≪연변일보≫만 내옆에 있는것이 아니란것을 발견하게 되였다. 첫째로 교과서가 모두 연변에서 출판된것이였다. 그외에도≪문학선집≫ ≪연변문예≫등등의 많은 책들이 거개가 연변에서 출판된것이였다. 재미있었다. 문학선집의 ≪단군신화≫, ≪고구려건국신화≫, ≪장끼전≫, ≪토끼전≫, ≪재판 받는 쥐≫, ≪림꺽정≫ ≪연변문예≫의 돼지장 보는 이야기, 군대에 갔던 철호가 돌아오니 처가 남에게 이미 시집간 이야기, 려근택의 이야기…소학교에 입학하여서부터 졸업할 때까지 연변책더미에 묻혀 살았다 해도 과언이 아니였다.

책을 읽으면 읽을수록 연변이 아주 “세다”고 생각되였다. 연변은 이렇게 많은 일을 할수 있지 않은가! 그런데 유감스러운것은 연변에서 주는 그 무슨 혜택을 보지 못하는것이였다. 그만큼 컸으니 연변이 자치주라는것은 알아서 조선족의 수도로 보고있는지라 그쪽에서 무슨 혜택을 주어서 우리산재지구 조선족의 지위도 올라가고 생활이 좋아지길 바랐던것 같다.

그러나 한해 또 한해 지나가도 그쪽에서 우릴 위해 말 한마디, 천 한오리 오는것이 없는지라 어느 정도 실망하였던것이다. 연변의 서책으로 자기의 지식면을 넓히고 앞날을 위하여 토대를 충실히 다져가고있다고 느끼기엔 너무나 어린 나이였던것이다.

끝내 연변의 “덕”을 입게 되였다고 생각되는 일이 생겼다. 1965년도, 중학교에서 교편을 잡고있던 형님이 연변대학통신대학에 다니게 되였던것이다. 1964년, 형님은 목단강사범학교를 졸업하고 할빈사범대학 음악학부에 추천받았다. 그러나 그때 우리 집 형편에 형님을 계속 공부시킬수 없었으므로 포기하고 말았던것이다. 이것이 형님의 큰 유감인줄 알므로 사업을 하면서 대학공부를 할수 있게 해준 연변대학이 고맙게 느껴졌던것이다. 하여 형님은 호기있게 연변으로 떠났고 돌아올 때면 나에게 빵을 사다주군 하였다.

그때 초중 1학년이였던 나는 기숙생활을 하며 옥수수떡에 길들여져있었던지라 그 빵은 대단한 생활개선이였지만 내가 바란것은 이것이 전부가 아니였다. 형님의 연변대학에서의 성공-이는 우리 집, 그리고 나에게도 그 어떤 좋은 장래를 약속하는것 같았다.

불행하게도 “문화대혁명”이 일어나면서 나의 희망이기도 했던 형님의 대학공부가 중단되였다. 일찍 1954년도 형님이 소학교를 졸업할 때 농촌소학교졸업생은 농촌에 돌아가라고 하여서 형님은 6년 농촌에서 일했던것이다. 이로서 나와 연변 지간에 이어졌던 한가닥의 실은 흐지부지해졌다. 마치도 눈앞까지 당겨왔던 풍선줄이 툭 끊어진듯 연변은 나의 마음속에서 점점 멀어져갔다.

물론 연변의 소식은 자주 듣고있었다. 코신부대로부터 시작된 무단투쟁, 아까운 청년들이 다 맞아죽는다는 소문, 어른들의 “조선족”이 모인 곳에서 언제나 더한다는 의론… 그후 국세가 안정되여서 연변의 노래도 많이 나오고 상해의 지식청년들이 연변에 들어간다는 아름다운 이야기도 있었지만 이 모든것은 나에게 별로 감동을 주지 못하였다. 점점 커가면서 어쩐지 연변이 잘하는 일이든 못하는 일이든 동떨어진 곳에서 혼자 하고있다는 느낌이였다. 이것이 리해되기도 하였다. 연변이 행정상으로 우리를 관리하지 못하니 우리가 그기서 무얼 바랄수 없는것은 당연한 일이였다.

농촌에 돌아와 일하면서 연변에서 이주오는 분들을 가끔 보게 되는데 그들은 “난민”으로 보였다. 연변에선 친척이 놀러가도 량표를 내라 한다는 이야기를 들어서인지 모르겠지만 어쨌든 백성이 살기엔 연변이 좋은곳이 아니라는 인상을 받게 되였다. 어릴적에 어른들에게서 들은 이야기를 확인한셈이였다. 조선족이 자치한다는 곳이 이럴진대 자치를 못하는 우리의 장래는 어떨가? 손맥이 풀리는 느낌이였다. 집의 주요로동력이요, 다르게 출세할 경쟁력과 수단이 없으니 농민의 운명은 벗어던지지 못할거고, 그러나 좀 더 좋은 곳에서, 민족적분위기가 더 짙은 곳에 가서 살고싶은 생각이 있으나 연변이 적합하지 않을뿐만아니라 갈만한 연줄도 없으니…

일찍 려근택의 사적을 읽은 어머니는 나를 보고 이렇게 말씀하셨다. "너 그 ‘역은택’을 보아라. 처음엔 낚시대나 들구 댕겼지만 그래서는 안되겠으니까 안차 돌아서는거. 사람이란 그렇게 역어야 한다."

려근택씨에게는 미안한 일이였다. 촌에 있는 내가 답답하지 않으셨다면 어머님이 려근택씨를 “역은턱”으로 련상하시지 않았을것이다. 40이 되도록 나는 연변에 가보지 못하였다. 변변치 못한 살림에 쓸데 없는 돈을 써가면서 연변에 놀러 갈 생각이 없었던것이다. 그러다가 자형이 음식점을 하면서 색다른 료리를 하려고 나를 연변에 소고기구이가마를 사러 보냈다.

처음 연길에 도착하니 방향을 알수 없었다. 내 생각엔 역에서 나와서 남쪽으로 나간것 같은데 후에 들으니 북쪽이라는것이다. 이튿날 날이 밝자 제일먼저 눈에 뜨이는것이 높이 치솟은 우전국이였다. (한옥희가 한창 이름을 날리던 때여서 연변의 ‘일인자’로 나타난 모양인가?) 연길 시내에 나서니 잔잔한 감동이 일었다. 시내가 할빈과는 못 비기겠고 목단강보다 좀 작은것 같으나 그래도 우리 민족이 이정도라도 해놓은것이 썩 장해보였다. 어찌보면 우리민족은 멍에를 멘 민족으로 생각되였다. 고향에서 “조선사람” 이 잘하게 놓아두지 않는다는 의론을 들어서 그런지 자치주의 설립이 오히려 남의 눈치를 살피게 한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이런 인상은 이후에도 오래동안 지속되였다. 특히 정신적인면에서 정치적오유방지의식이 어디에나 속속들이 침투되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였다. 그번 걸음은 연길에 오래 있을 경황이 못되였다. 그날로 룡정에 가서 가마 다섯개를 샀다. 자그만한 가스통이 달린 가마 다섯개를 짊어지니 어깨가 뻐근해났다. 그렇게 짊어지고 도문, 목단강에서 차를 갈아 타면서 가져온 가마가 은을 내지 못하였다. 재산복이 없었던 모양이다. 자형의 음식점은 인차 문을 닫았다.

그번 연변걸음이 행운을 주진 못했으나 어쨌든 연변과의 첫 대면은 한셈이였다. 그로부터 15년후 나는 처음으로 장백산유람길에 올랐다. 안도려행사의 차를 타고 장백산에 도착하여 빼곡히 늘어선 사람들에 밀치우고 등산차에 휘둘리우며 산정의 정차장에 도착하니 주봉엔 사람들이 줄지어다니고있었다.

첩첩한 산봉, 검푸른 심연, 주봉에 올라서니 남이장군의 모습이 보이는듯하였다.

백두산 돌은 칼갈아 없다더니 도처에 기암괴석이였다. 남이장군도 아마 장백산에 와보지 않았을가! 그러지 않으면 그런 호매한 시구가 어데서 나올가. 유감스럽게도 장백산경영권한이 연변에 없다는것이다. 경영권은 길림성에서 가져갔다 하였다. 주봉에 올라서서 시원한 바람을 쏘이고있노라니 연변에 대한 미련이 말끔히 가셔지는것 같았다. 기실 연변에 대한 미련은 진작 세월의 흐름에 씻겨졌을것이다. 연변이나 우리나 모두 자기가 나아갈 길을 찾아야 했던것이다. 다만 그날 마지막으로 이를 확인하였다 할가? 이제 내가 연변에 바라는것이 있다면 연변에서 더욱더 아름다와지는 모습을 우리에게 보여주는것이다. 앞으로는 자주 오리라.

이도 5년전의 일, 5년이 지나도록 나는 아직도 연변에 가지 못하고있다. 짧아서3박 5일의 려행길이 쉽게 용단이 내려지지 않는 까닭이다.연변—아직도 나에게는 머나먼 곳인가. (김경선)


편집:심영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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