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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상, 영원히 잊어서는 안됩니다!

2021-09-18 16:14:18     责编:박운     来源:央广网
 

90년 전의 오늘

‘9.18’사변이 폭발하면서

중화민족은 장장 14년

악전고투의 서막을 열었다

명백한 과거는 후세 사람들에게

경종을 울려주고 있다

오늘 우리 함께

‘9.18’사변을 돌아보고

선렬들을 추모하며

국상을 다시 되새겨보자

 

 

    1931년9월18일, 일본 관동군은 장기간의 음모 끝에 심양 북부 교외의 남만철도 일부분을 폭파시키고 터무니없이 이 책임을 중국 수비군에 전가했다. 일본군은 이를 구실로 중국 군대에 대한 맹렬한 공격을 발동했다. 이것이 바로 중외를 놀래운 ‘9.18’사변이다.

 

 

    동북군의 ‘저항하지 않는 정책’으로 일본군 300명은 북대영 8000명 수비군을 격파하고 단지 8시간만에 전반 심양을 함락시켰다.

 

 

    ‘9.18’사변은 중국인민항일전쟁의 기점이다. 중국은 함께 일떠나 항쟁했고 동시에  세계반파쇼전쟁의 서막도 열었다.

 

 

    일본군이 북대영을 공격할 때 동북군 620퇀 퇀장 왕철한은 군사명령을 거역하는 위험부담을 무릅쓰고 부대를 지휘해 새벽 네시까지 일본군과 지속적으로 전투를 펼쳤다. 왕철한 퇀장의 부대는 40여명의 일본군을 격사하고 항일전쟁의 첫 총성을 울렸다.

 

 

    ‘9.18’사변 후 14년간 중국 26개 성, 1500여개 현시의 600여만 평방킬로메터의 토지가 함락되고 3500만명의 군민이 목숨을 잃거나 부상을 입었다. 중화대지는 온통 도탄에 빠졌고 민중의 탄식소리가 산과 들을 가득 메웠다.

 

 

    1940년, 양정우 장군은 동북군민을 인솔하여 일본 제국주의와 혈전을 펼치다 장렬히 희생했다. 잔인한 일본군이 그의 배를 갈랐을 때 그의 위에 있는 것이라고는 마른 풀, 나무껍질, 솜 등일 뿐 식량이라곤 찾아볼 수 없었다.

 

 

    ‘9.18’사변 이후 중국공산당은 신속하게 항일력량을 조직하였고 얼마 지나지 않아 ‘동북항일련군’으로 발전시켰다. 14년간 이 부대는 일본군 17만명, 괴뢰군 5만여명을 섬멸하고 일본군 병력 76만명을 견제하여 세계반파쇼전쟁의 승리를 위하여 거대한 기여를 했다.

 

 

    ‘9.18’사변 이후 조일만은 동북지역에 파견되여 항일투쟁을 펼쳤다. 한차례 접전 끝에 조일만은 불행하게도 체포되였다. 희생되기 전 조일만은 아들에게 남긴 마지막 편지에 이렇게 썼다: “어른이 된 후 어머니가 조국을 위해 희생되였다는 사실을 잊지 말길 바란다!”

 

 

    ‘9.18’사변이 심양에서 발발한지 25년 후, 1956년, 여전히 이 땅에서 중국 최고인민법원 특별군사법정은 하늘에 사무치는 죄행을 저지른 일본 전쟁범들에 대한 공개 재판을 진행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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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0년 전의 오늘‘9.18’사변이 폭발하면서중화민족은 장장 14년악전고투의 서막을 열었다명백한 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