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면전장에서의 조선의용대
래원:      2011-11-16 10:49:00

로구교 사변을 통해 중국에 대한 본격적인 침략을 발동한 일본침략군은 1938년 6월까지 일년 시간을 들여 중국 장강 이북의 광활한 령토를 통제하였다. 태원부근에서 진행된 흔구전역, 서주를 중심으로 한 서주회전을 통해 일제는 장강이북의 전략요새들을 점령하고 북에서 남으로 무한을 포위하였다. 뱃길로 상해에 도착한 다른 한갈래 일본군은 송호회전을 거쳐 상해, 남경을 강점한후 장강을 따라 서쪽으로 공격해왔다. 그리하여 무한은 세면으로 막강한 적의 공격을 받게 되었다.

국공합작과 전민의 항전에 크게 고무된 중국 군민들은 피와 살로 침략자들의 비행기와 땅크에 대항하며 싸웠다.

인력과 자원의 제한을 받은 일제는 속전속결을 원했다. 수개월간의 공격을 통해 국민정부의 항복을 받아내려고 했던 그들은 십여개 사단의 수십만 정규군을 동원해 무한을 포위공격하였다. 국민당은 110만 군대를 모아 이에 항격하였다. 일본침략군은 6월에 안경을 공략하고 7월에는 호구, 구강을 침점하였다. 려산과 파양호의 유리한 지세를 리용해 부분적 국민당군은 적시적으로 반격을 조직해 적에게 막대한 손실을 주었다. 침략군은 계속 지원병을 보내 더욱 강한 공격을 조직한 반면 국민당은 실력을 보존하기 위해 주력부대를 후방으로 빼돌렸다. 그리하여 중국군은 부분적인 승리를 이룩했음에도 불구하고 승세를 잡지 못하고 계속 철수하지 않으면 안되였다. 10월에 이르러 무한 남부방어선이 무너졌고 장강이북 수비도 여의치 못했다.

 

1938년 10월 24일, 장개석은 실력을 보존하기 위해 전면 철수를 명령하였다. 그리하여 25일과 27일 무한 3진이 전부 함락되였다. 무한 외곽전투의 포화속에서 창립된 조선의용대는 비록 정규군에서 적과 직접 싸우지는 못했지만 활발한 대적선전공작을 진행했으며 무한에 정신적인 폭탄을 남겨놓았다.

(권립 교수)“조선의용대는 무한을 제일 마지막으로 철퇴하였습니다. 조선의용대가 창립될 때 무한은 일제의 포위공격을 받고있었습니다. 일제의 화약냄새가 무한으로 스며들고있었던것입니다. 무한에 있던 국민당의 당정기관들이 다투어 중경으로 철퇴하고 무한의 주민들이 뒤질세라 피난을 떠났습니다. 공장마다 상점마다 언녕 문을 다 닫아버렸습니다. 그러나 포화속에서 탄생한 조선의용대는 포소리나 화약냄새를 두려워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가을바람이 부는 쓸쓸한 무한거리를 다니며 일본글로 반일구호를 썼습니다. 넓은 아스팔트길에 높은 굴뚝에 커다란 담벽에 높은 수탑과 전선대에 일본글로 구호를 썼습니다.”

10월 24일, 조선의용대 지휘원과 장병들이 땀을 흘리며 선전구호를 쓰고있을 때 국민당 정치부 제3청의 청장이였던 곽말약이 철수를 앞두고 무한거리를 시찰하였다. 그는 두려움 모르고 마지막까지 싸우고있는 조선의용대 대원들의 행동에 큰 감동을 받았다.

곽말약은 후에 자기가 본 이 감명깊은 광경을 저서 <홍파곡>에 적어놓았다.

조선의용대의 드높은 항일열정과 두려움 모르는 전투정신에 감동된 곽말약은 직접 주은래를 찾아가 보고하였다. 정치부 부주임으로 있던 주은래는 이날 저녁 곽말약의 보고를 듣고 직접 조선의용대를 찾아갔다. 그는 대원들과 일일이 악수하고 더욱 큰 투쟁을 위해 즉각 철수할 것을 요구하였다.

(권립 교수)“조선의용대 용사들은 그 길로 부두를 향해 철거하기 시작하였습니다. 그 이튿날 일제가 무한시내로 승냥이마냥 덮쳐들었습니다. 이렇게 시작한 조선의용대의 투쟁사는 두단계로 나누어 볼 수 있습니다. 첫단계는 성립되여서부터 2년동안, 이 기간은 전선으로란 구호밑에 정면전장에서 싸운 2년이였습니다. 넓디넓은 싸움터에서 지대별로 흩어져서 싸운 2년이였습니다. 두 번째 단계는 그 다음의 4년 10개월입니다. 이 기간은 적후로란 구호밑에 중국공산당의 령도하는 화북의 적후근거지에서 싸운 시기입니다. 하나로 뭉쳐서 싸운 시기였습니다.”

4개월 남짓이 진행된 무한회전은 중국 항일전쟁에서 최대규모의 전역이였다. 하남, 안휘, 강서, 호남, 호북을 비롯한 광활한 지역이 혈전의 전장으로 되었고 수십만 중국 장병들이 피와 살로 침략자들의 비행기와 땅크를 비롯한 선진적인 장비와 맞써 싸웠다. 그러나 국민당의 편면적인 항전로선과 소극적 방어전략으로 하여 중국은 광활한 토지를 잃고 막대한 손실을 빚어냈다. 더욱이 국민당내 파벌이 군립하고 부분적인 장교들이 부패무능하고 죽음을 두려워 소극적으로 전투를 피했기 때문에 더욱 막대한 손실을 빚어내게 되었던 것이다. 일년 남짓한 공격전에서 일본침략자들은 중국의 100여만 평방킬로메터에 달하는 령토를 강점하였다.

중국군민의 항전은 일본침략자들에게도 막대한 타격을 주었다. 무한회전에 전례없던 40만 병력을 동원한 일본침략자들은 비록 무한을 강점했지만 막대한 손실을 보았다. 근 20만 병사들이 죽거나 부상을 입었다. 아시아를 제패하려던 일제는 무한회전을 겪으면서 드디어 인력과 자원 결핍이라는 이 현실적 문제를 정시하지 않으면 안되였다. 일제는 이와 같은 대규모의 전역을 더 치러낼 인력과 물력이 없었다. 그리하여 중국의 항일전쟁은 전략적인 수비 단계로부터 점차 대치단계에 들어가게 되었다.

로구교사변으로부터 무한회전에 이르기까지 16개월간의 전쟁을 통해 중국항일전쟁은 두가지 변화가 나타났다. 하나는 국민당이 연해지역의 전략적 물력과 인력을 중경을 중심으로 한 서북 대후방으로 적시적으로 철수시켰다. 다른 하나는 일제 강점지역에 광범위한 항일유격근거지가 나타났다. 공산당이 령도하는 팔로군과 신사군이 화북과 화중지역에서 활발한 투쟁을 진행하고있었고 부분적인 국민당 부대도 적후에서 유격전을 전개하였다. 이러한 변화는 중국 항일전쟁을 확고하고도 지구적인 대치단계에 들어가도록 한 조건이였다.

(권립 교수) “조선의용대의 정면전장에서의 투쟁에 대해 알아보겠습니다. 무한을 떠난 조선의용대는 각 전장으로 흩어지게 됐습니다. 본부는 제4전구로 즉 광서 계림으로 이동하고 제1구대는 제9전구로 호남성 평강현 일대로 옮기고 제2구대는 호북성 로하구일대로 갔습니다. 후근부와 가족들은 중경으로 이동하였습니다. 이렇게 흩어져있었지만 일년이 지나서는 대오가 근 배로 늘어나 155명으로 됐습니다. 그리하여 대 본부를 총부로 고치고 제1구대를 제1지대로 제2구대를 제2지대로 고치고 또 제3지대를 증설하였다.”

 

조선의용대 대장 약산 기뭔봉

조선의용대 창립 1주년 기념사진(계림)

조선의용대는 중국항일전쟁의 정면전장에서 광범한 대적공작을 진행

 

조선의용대 총대부는 대장 김원봉의 인솔하에 중국 중앙군을 따라 이동하였다. 대장에 김원봉, 기밀주임에 신영삼(申榮三), 총무조장에 리집중(李集中), 정치조장에 김규광이였고 부대원에 리형래(李瀅來), 주세민(周世敏), 리춘암(李春岩), 석성재(石成才), 김인철(金仁哲), 한지성(韓志成), 윤세주, 진일평(陳一平), 김석락(金錫洛) 등 도합 13명이였다.

이들은 국민당 제4전구에서 활동하였다. 광서성 계림을 중심으로 활동했던 제4전구 국민당 부대는 그후 광서가 일제에게 함락되자 중경으로 패주하였고 의용대 총대부는 1940년 초에 중경으로 갔다.

조선의용대 제1구대 43명은 구대장 박효삼의 인솔하에 제9전구에서 싸웠다. 부구대장에 김세일(金世日), 정치지도원에 왕통(王通)이고 제1분대장에 최경수(崔敬洙), 대부에 장중광(張重光)이고 제2분대장에 조렬광(趙烈光), 대부에 리해명(李海鳴)이였으며 제3분대장에 섭홍덕(葉鴻德), 대부에 리지강(李志剛)이였다.

제1구대는 전원이 조선민족혁명당 당원들로서 주로 호남성에서 활동하였다. 호남성 장사에 사령부를 정한 제9전구에는 국민당의 최 정예부대가 집결해 있었다. 일본침략군이 무한을 강점한후 수차 장사를 공격하였다. 장객석은 초도항전을 주장하면서 장사를 불태워 일본군을 막으려 하였다. 이때 조선의용대 1구대 대원들은 화재로 인한 리재민 구출과 도시 복구 사업에 적극 참가하였다. 그리고 장사에서 벽보를 만들고 <우리의 살길>이라는 순간잡지도 펴내면서 선동사업을 강화해 나갔다. 1939년말부터 1구대 대원들은 국민당 제9전구 각 부대로 흩어져 배속되였다가 광서로 옮기고 다시 부분적으로 중경으로 갔다. 그들은 광서 류주(柳州) 부근의 곤륜산회전(昆崙山會戰), 상북회전(湘北會戰), 장사회전(長沙會戰)에 참가해 대적선전을 적극 진행하였다. 1구대 대원들은 적 진지에 접근하여 함화(喊話)하는 방식으로 비정의적인 싸움을 하지 말 것을 일본군 병사들에게 호소하였다. 그리고 표어와 벽보 선전도 활발히 진행하였다. 1구대 대원들은 또 남로공작대(南路工作隊)에 배속되여 곤륜산 전투에 참가하였다. 그들은 적 진지에 접근하여 함화하거나 노래하는 방식으로 적의 전의를 약화시켰다.

조선의용대 제2구대 41명은 구대장 리익성의 인솔하에 국민당 제1전구와 제5전구에서 활동하였다. 부구대장에 진원중(陳元仲), 정치지도원에 김학무(金學武)였고 제1분대장은 리세영(李世榮), 대부에 장중진(張重鎭)였으며 제2분대장은 강진세(姜振世), 대부에 호철명(胡哲明)이였고 제3분대장은 리영신(李永新), 대부에 한득지(韓得志)였다. 이들은 조선청년전위동맹 맹원 및 기타 단체의 소속원이였다.

제2구대는 조선의용대 지도위원회 위원의 한사람인 김학무를 따라 무한에서 표어와 벽보를 통한 항일선전활동을 하다가 가장 마지막에야 철수하였다. 곽말약이 목격했던 조선의용대 대원들이 바로 제2구대 대원들이였다. 김학무는 부분적인 대원들을 거느리고 하남성 락양을 중심으로 한 국민당 제1전구에서 활동하였고 리익성은 나머지 대원들을 거느리고 호북성 로하구에 사령부를 둔 국민당 제5전구에서 활동하였다. 1939년 2월 호북성 수현(隨縣)에서 싸우던 2구대 대원들은 적 참호에 다가가 높은 나무위에 일본어 표어가 적힌 대형 현수막을 걸어놓았다. 거기에는 “일본의 형제들이여!우리의 공동의 적은 바로 일본군벌이다”, “일본 병사 형제들이여. 무엇하러 머나먼 타국에 와서 아까운 목숨을 버리려 하는가?”, “어서 총부리를 그대네 상관에게 돌리라”는 내용의 글을 써놓았다. 그들은 또 적진에 접근해 일본말 연설하거나 반전노래를 부르기도 하였다.

1939년말에 이르러 의용대 대원이 많아지자 제1구대의 부분적 대원과 새로 확보한 대원 그리고 일본군에서 귀순한 청년들까지 포함해 제3구대를 편성하였다. 이들은 부분적으로 제1구대와 함께 국민당 제9전구에서 활동하고 또 일부는 새로 설립한 국민당 제3전구에 배속되여 연해지역에서 활동하였다. 이때로부터 조선의용대는 재 편성을 거쳐 구대를 지대로 고쳤다. 제1지대 대장에 박효삼, 정치지도원에 왕통이였는데 도합 78명이였다. 제2지대는 리익성이 대장을 맡고 림평(林平)이 정치지도원을 맡았는데 도합 75명이였다. 제3지대는 김세일이 대장을 맡고 양민산(楊民山)이 정치지도원을 맡았다. 제3지대는 도합 63명으로 통계된다.

(권립 교수)“일본말로 방송하여 적을 와해시키는데 큰 기여를 하였습니다. 동시에 제1, 2, 3 지대는 각기 당지 사령부를 도와서 적정을 수집하고 대적 사업일군 도합 6만여명을 양성했습니다. 그리고 50여만부의 반일삐라를 쓰고 인쇄했습니다. 전지선전대를 조직하여 대적선전사업을 하고 유격선전대를 조직하여 적후에 들어가서 무장투쟁을 하였습니다.”

조선의용대는 2년 남짓한 동안 6개 전구의 13개성을 전전하면서 싸웠다. 일본침략군과 싸우는 거의 모든 전투에서 활발히 선전활동을 진행하는 의용대 대원들의 모습을 찾아 볼수있었다. 그들은 총칼로 이룩할수 없는 거대한 전과를 올렸다.

조선의용대는 선전대였고 정찰대였으며 또한 전투부대였다. 1939년 5월부터 9월까지 대원들은 적 460여명을 격살하였고 적의 차량 121대를 파괴하는 전과를 올리기도 하였다. 각 전구에 파견된 조선의용대 대원들은 그 자질과 능력이 높이 평가되였고 소규모 부대였지만 정치적 의의가 컸고 선전면의 효과가 좋았다. 더욱이 두려움 모르는 투쟁정신은 중국 군민의 항쟁을 크게 고무해 주었다.

 

(중앙인민방송국 김성룡)