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의용대의 창건
래원:      2011-11-05 13:16:00

국공분렬과 국민당내 군벌혼전을 거치면서 각지에 흩어졌던 조선혁명가들은 제2차 국공합작이 이룩되고 1937년 전면적인 중국 항일전이 개시되자 다시 무한에 모이기 시작하였다. 1938년 하반기 상해, 남경이 일본침략자들에게 강점되자 상해, 남경 등지에서 활동하던 대부분 조선혁명자들이 무한에 왔다. 이들은 중국의 항일전쟁에 적극 참가하면서 조선 각 혁명단체와 당파의 대단결을 이룩해 나갔다. 공산주의자, 무정부주의자, 민족주의자 할것없이 무한에 모여 새로운 투쟁을 준비하고있었다. 이들 가운데서 김원봉을 위수로 한 조선민족혁명당, 조선청년전시복무단(朝鮮靑年戰時服務團), 조선민족해방동맹(朝鮮民族解放同盟)과 조선혁명자련맹(朝鮮革命者聯盟)이 대표적인 당파였다.

조선민족해방동맹은 조선혁명자 김규광과 박건웅(朴建雄), 김산(장지락)을 주축으로 1936년에 창립되였다. 일찍 중국공산당을 따라 광주봉기에 참가했던 이들은 안전하게 광주를 탈출한후 장시기 상해에서 활동하다가 상해가 함락된후 무한으로 왔던 것이다.

조선청년전시복무단(朝鮮靑年戰時服務團)도 이때 한구에서 활발한 활동을 전개하였다. 공산주의를 지향하는 50여명 조선 열혈청년들이 최창익(崔昌益 일명 리건우 李健宇)을 단장으로 한 조선청년전시복무단을 조직하였다. 이들은 각종 군중집회에 참가하고 거리에서 연설하였으며 또 여러 가지 만화를 그려 항일전쟁을 선전하였다. 조선청년전시복무단은 조선민족혁명당내의 열성자들이였다. 남경에서 군사교육을 받은 김학무(金學武), 리상조(李相朝), 장지민(張志民)을 비롯한 수많은 열혈청년들은 왕지연(王志延 일명 한빈 韓斌)과 함께 전시복무단을 조선청년전위동맹(朝鮮靑年前衛同盟)으로 개칭하고 계속 활동을 견지하였다.

조선의용대 출신이였던 고 문정일(文正一) 선생은 다음과 같이 회억하였다.

《이때는 무한이 위기일발의 시각에 처한 때라 우리는 김학무를 단장으로 한 <조선청년전시복무단>을 조직하고 중국공산당의 외곽조직인 <중화민족해방선봉대(中華民族解放先鋒隊)>와 함께 한구에서 항일선동사업을 하였는데 반일연설도 하고 연극도 했다. 나는 허정숙(許貞淑--최창익 부인) 등과 함께 걸상을 가지고 거리와 부두로 가서 걸상에 올라서서 반일선동연설을 했다. 연설할 때 우리는 조선의 혁명청년들이라고 자기 소개를 하고 조선이 망국한 뼈저린 아픈 력사를 이야기하고 항일하지 않으면 중국도 조선처럼 망국하게 되므로 중국과 조선이 단합하여 일본침략자를 물리쳐야 한다는 내용으로 열변을 토하고 삐라를 살포하였다.》

 

락양팔로군판사처에 있을때의 문정일 동지

 

1938년 10월, 무한 외곽에서 중국군과 일본침략군과의 치렬한 공방전이 계속되고있었다. 수시로 떨어지는 적의 폭격과 포격을 무릅쓰고 이들 조선혁명자들은 한구에서 조선의용대를 성립하였다. 조선청년전위동맹을 포함한 조선민족혁명당, 조선민족해방동맹, 조선혁명자련맹 각 단체와 당파의 공산주의자, 무정부주의자, 민족주의자들이 단합하여 조선민족전선련맹(조선민족전선련맹)을 이룩하고 조선의용대를 창립해냈던 것이다.

(권립 교수) “당시 무한에는 김약산을 수반으로 하는 조선민족전선련맹 산하에 우리민족 청년 181명이 있었는데 그 대부분이 중앙군사학교와 기타 군사학교 출신이였습니다.”

무한에서 조선의용대의 창립지를 찾기는 여간 힘들지 않았다. 무한 답사에서 첫 과제가 이곳을 찾는 일이였기때문에 만나는 사람마다 문의해 보았지만 대답은 애매하기만 하였다.

우리에게는 한구 홍삼로(虹槮路) 8번지라는 옛 주소만을 가지고있을뿐이였다. 그리하여 지명판공실(地名辦公室)에 찾아가 홍삼로의 지금 명칭을 확인해 보아야 했다. 그러나 지명 판공실을 찾는 일도 바다에서 바늘 건지기나 마찬가지였다. 알려준 주소에 따라 겨우 찾아갔더니 문지기가 이곳에서 이사갔다는 것이다. 민정국 산하인 지명 판공실은 지금 일원로(一元路)에서 사무를 본다는 것이다. 다시 수많은 길을 에돌아서 겨우 찾아냈다.

엘리베이터를 타고 5층까지 올라가서 사무실 문을 두드리니 40대 사나이가 맞아주었다. 책임자를 찾는다고 하니 자기가 책임자라고 하면서 용건을 물었다. 소개신과 기자증을 보이고 책에 수록된 지명을 주면서 지금 어느 곳인가를 찾아달라고 하였다. 그분은 두말없이 철궤를 열더니 책 몇 권을 꺼내 열심히 찾아보는 것이였다. 그는 이곳에서 사업한지 오래되는데 이런 지명은 처음 들어본다고 하였다. 혼자서 찾기 힘들 것 같아 우리도 다른 책을 펼쳐들고 함께 찾아보았다.

그러나 아무리 찾아보아도 없었다. 어떻게 되어 이런 이름이 나왔는지 도무지 갈피를 잡을수 없었다. 책임자는 무한시민정국 지명처(地名處)의 조우생(曹雨生) 처장이였다. 조처장도 미안한 눈치였다. 그러면서 자기도 옛날 입대하였을 때 연변에서 근무하였다고 한다. 그러니 연변사람들을 만나 매우 반가운데 도와주지 못했다고 하였다. 우리도 연변에 익숙한 사람을 만났으니 타향에서 고향사람을 만난 기분으로 즐거웠다. 반갑게 다시 인사를 나누자 조처장은 우리에게 지명 책까지 주면서 후에 다른 단서가 있으면 알려주겠다고 하였다. 책의 기재한 주소로는 찾을 수 없었다. 다른 책에는 조선의용대가 기독교청년회(基督敎靑年會)에서 성립대회를 소집했다는 기록이 있다. 그래서 기독교청년회를 찾아가기로 하였다.

박물관의 주관장과 무한혁명정부 유적지의 서관장이 알려준 대로 려황피로(黎黃陂路) 10번지를 찾아야 했다. 그곳에 기독교청년회가 있다는 것이다. 이때 안내하던 기사가 혼잡을 빚어냈다. 분명 려황피로라고 했는데 황피로(黃陂路)에 갔던 것이다. 그곳은 옛날 영국, 프랑스 조계지 자리여서 옛건물들이 많았다. 아무리 수소문 해 보아도 알수 없었다. 여러 거리를 헤매던 중 우연히 기독교녀성청년회(基督敎女性靑年會)라는 간판을 보았다. 아무튼 들어가 물어보기로 하였다. 녀성 두명이 사무실에 앉아있었는데 기독교청년회는 려황피로에 있고 이곳은 황피로라고 알려주었다. 황피로가 아니고 려황피로가 맞는가고 다시 확인하려고 물었다. 그러자 분명하다고 퉁명스럽게 알려주는 것이다. 사람말을 믿지 않는다고 나무리는 눈치까지 보였다. 고맙다고 그곳을 나왔다. 부근의 담배가게에서 한담하는 주민들을 찾아가 려황피로는 어떻게 가는 가고 물었다. 로인 한분이 길을 가르키면서 조금 더 나가면 된다고 하였다. 그래도 우리의 마음은 그냥 믿음이 서지 않았다. 황피로에서 조금 더 나가니 길가에 려황피로라는 남색 도로표식이 보였다. 우리는 저도 몰래 환성을 터쳤다. 이번엔 10번지만 찾으면 되었다. 거리를 따라 도보로 한참 걸으니 담으로 둘러싸인 큰 건물이 나타났다. 건물구조를 보아 분명 우리가 찾는 기독교 청년회인 것 같았다. 서양식 4층 건물이였다. 창문마다 남색 갓을 달아 광선을 얼마간 가리고있는 것이 인상적이였다.

우리가 막 촬영을 하고있는데 한 사업일군이 다가왔다. 무한기독교청년회 주임 손효병(孫曉兵)이였다. 우리가 찾아온 사연을 이야기하자 손주임은 잘못 되었다고 알려주었다. 30년대 이 건물은 미국 해병들의 구락부(俱樂部)였고 기독교청년회는 후에 이곳에 이사왔다고 설명해주었다. 나는 1938년 이곳이 분명 기독교청년회 자리였다는 기재가 있다고 하면서 그럼 려황피로 10번지가 어디냐고 물었다. 손주임은, 이곳은 분명 일본이 무한을 점령하기전 미국 해군이 주둔하던 해군구락부라고 하면서 이전에도 한국인이 이곳에 찾아왔었는데 이런 오해가 있었다고 하였다. 그러면서 이 거리를 따라 조금 더 나가면 큰 청사 하나가 보이는데 그곳이 옛날 기독교청년회가 있던 곳이라고 알려주었다.

나도 마음을 진정하고 곰곰이 생각하니 그럴법도 하였다. 인사를 하고 거리를 따라 한 50여메터 걸어가니 큰 백화점 하나가 보였다. 백화점 한쪽 벽에는 건물유적을 설명하는 검은 안내문이 새겨져 있었다. 《기독교청년회한구회소구지(基督敎靑年會漢口會所舊址)》라고 씌여있었다. 벽돌과 나무로 된 옛 건물은 3층이였고 1916년에 착공하여 1919년에 락성되였다한다. 카나다의 상인 반미(潘美)가 돈을 냈기때문에 건물 명칭을 《반미당(潘美堂)》이라고 하였고 건물은 1944년 미군이 일본군을 폭격하던 중 파괴되였다고 씌여있었다. 주소는 한구 중산대도(中山大道) 1090번이였다.

 

미군 해병들의 클럽으로 사용되였던 건물

기독교청년회 옛터에 세워진 대형상점

기독교청년회 옛터임을 알리는 표지판

 

수많은 수수께끼들이 돌에 새겨진 이 안내문에 의해 풀려졌다. 안내문 마지막에 건물은 옛 모습대로 복원되였다고 밝혀있었다. 그러나 우리가 보는 백화점은 5층 현대건물이였다. 그러니 복원된 건물도 파괴되여 지금 이 석판 안내문만 남아있는게 분명하였다. 30년대 기독교청년회 옛터, 바로 이곳에서 자랑찬 우리민족 의용대가 창립되였고 이들은 중국항일전쟁에 참가하여 항쟁의 발자욱을 중국 전역에 아로새겨 놓았던 것이다.

아무튼 조선의용대 창립지를 확인하였으니 고생한 보람이 있었다. 그리고 한국인도 미국 해군구락부옛터를 먼저 찾아온 것도 우리의 기재에도 문제가 있음을 설명한다. 답사하면서 몸소 찾아보는 것만이 가장 분명한 것이다. 조선의용대 창설지에 대한 잘못된 서술을 바로잡고 새롭게 연구를 할수있게 되었다고 생각하니 성취감도 들었다.

1937년 로구교사변이 일어나자 중국의 본격적인 항일전쟁이 시작되였다. 중국공산당과 국민당은 재차 합작하여 공동으로 일본침략자들에 대항하였다. 국공합작을 토대로 한 항일민족통일전선의 결성은 관내 각지의 제 조선인 반일단체에 훌륭한 본보기를 보여주었으며 크나큰 고무와 추동을 주었다. 그리하여 분산과 갈등 그리고 파쟁을 계속하던 조선 반일운동단체들도 조선민족의 대동단결을 열망하게 되었다.

1937년 11월 12일, 좌익진영인 조선민족혁명당, 조선민족해방동맹, 조선혁명자련맹, 조선청년전위동맹을 비롯한 단체가 남경에서 회의를 열고 통일적인 《조선민족전선련맹(朝鮮民族戰線聯盟)》을 결성하고 김원봉, 김학무, 김규광, 류자명을 리사로 선출하고 석정(石正 윤세주 尹世冑), 한일성(韓一成), 왕지연(王志延), 박차정(朴次貞), 신악(申岳)을 간사로 하였다. 12월초 련맹의 대부분 성원들이 한구에 모여 창립선언을 정식 발표하였다.

1938년 10월 10일, 무한 외각전투의 포성속에서 관내 조선민족의 첫 번째 무장대오인 조선의용대 창립식이 한구 기독교청년회에서 성대히 진행 되였다. 중국공산당 중앙대표이며 국민정부 군사위원회 정치부 부부장으로 있던 주은래가 창립식에 참석하여 동방피압박 약소민족의 해방에 관련해 연설하였고 정치부 제3청 청장인 곽말약(郭沫若)도 시를 지어 축하하였다.

조선의용대는 국민정부(國民政府)군사위원회 정치부 산하의 조선의용군 지도위원회(指導委員會)의 지도를 받았다. 지도위원회는 중국측 대표 4명에 조선측 대표 4명이 있었다. 조선민족혁명당을 대표한 진국빈(陳國斌 김원봉), 조선민족해방동맹의 김규광, 조선청년전위동맹의 김학무, 무정부주의자 대표 류자명이 조선인 위원으로 지도위원회에서 사업하였다.

의용대 창립시 대원이 도합 120여명이였고 김원봉이 의용대 총대장을 맡았다. 그리고 두 개 구대(區隊)로 나누어 편성하였는데 박효삼(朴孝三)이 제1구대 구대장으로 임명되고 왕통(王通)이 정치지도원으로 임명되였다. 제2구대는 구대장에 리익성(李益星), 정치지도원에 김학무가 임명되였다. 1939년 대원이 300여명으로 늘어나자 제3구대를 새로 편성하고 한지성(韓志成)을 지대장으로 임명하였다.

10월 13일, 무한청년회관에서 의용대 창립 경축모임이 있었다. 모임에서 의용대 대원들이 가무를 공연하였고 《3.8》녀성가창단, 한구시 후원선전대대, 한구시 청년항전협회, 아동보육원, 아동구제협회, 동자군 등 6개 단체들도 공연프로를 선보였다.

의용대의 활동 초기, 성과가 가장 크고 또 가장 특색 있는 반일투쟁 방식은 적군에 대한 정치공세였다. 의용대는 창랍된후 즉각 무한 보위전 외각전선에 나가 선전활동과 부상자 구조, 전투지원에 진력하였다. 무한 함락의 막바지에 이르러 국민당의 당, 정, 군 요인들은 서로 앞다투어 자리를 뜨기에 급급했지만 의용대는 2주야를 걸쳐 한구를 거대한 정신적 보루로 만들어 놓았다. 그들은 사닥다리를 메고 다니며 거리 담벽과 아스팔트 길바닥까지 콜타르로 큰 표어를 써 놓았다. 그들은 일본글로 《일본형제들이여, 착취자들을 위해서 목숨을 바치지 말라!》, 《총구를 상관에게 돌리라!》, 《병사들은 전선에서 피를 흘리고 재벌들은 후방에서 향락을 누린다!》라는 내용을 써 놓았다.

 

조선의용대 창립 기념사진

대적표어를 쓰는 조선의용대 대원

 

일본침략군이 무한 시내를 전부 점령하기 두시간 전까지 의용대 대원들은 줄곧 반일표어를 쓰고있었다. 이 광경을 목격한 국민당 정부 군사위원회 정치부 제3청 청장으로 있던 곽말약은 자기의 저서 《홍파곡(紅波曲)》(인민문학출판사 1979년)에서 이렇게 적고있다.

《이런 구호들은 내가 전날 만든 글귀인데 오늘 벌써 담벽과 물 땅크 그리고 거리바닥에 나 붙었다. 그것은 조선의용대 친구들에게 감사를 드려야 한다. 그들은 철수하기 며칠전에 동원되여 이 사업을 맡았던 것이다....후에 포로들의 진술을 통하여 안 일이지만 적들은 무한시를 점령한후 그 표어들 때문에 골머리를 크게 앓았다고한다. 적들은 옹근 사흘이 걸려서야 그 표어를 지울수 있었다! 하지만 거리에 써놓은 표어는 지울수 있어도 머릿속에 박힌 것은 지울수도 없었을 것이다. 내가 탄 차가 후성거리를 지날 때 표어를 쓰는 사람들은 일을 계속하고 있었다. 그들은 네댓씩 한조가 되어 콜타르나 뼁끼를 들고 사닥다리를 메고 다니면서 부지런히 시간을 다그치며 일하고있었다. 그것은 나에게 제일 큰 감격을 주었고 또 나를 제일 부끄럽게 한 광경이였다는 것을 나는 승인하여야 하겠다. 그들은 모두가 조선의용대의 친구들이고 중국사람은 확실히 한사람도 없었다. 우리 중국에도 일본문을 아는 인재는 적지 않을 것이다. 일본 류학생만 하여도 최저로 수십만명은 되지 않겠는가? 그런데 무한이 위험을 앞둔 이 시각 대적표어를 쓰고있는 것은 조선의 벗들 뿐이였다.》

(중앙인민방송국 김성룡)