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멸의 발자취(47)—상해에서의 공산주의운동
래원:      2011-09-11 17:07:00

20세기 20년대 상해 프랑스 조계지에 수립된 한국 림시정부를 중심으로 많은 조선 독립지사들과 혁명자들이 상해에서 각자의 활동을 적극 전개하였다. 공산주의자들과 무정부주의자, 의렬단 이들은 각자의 정치주장에 따라 구국의 길과 반일투쟁의 길을 적극 모색하였다.

이 시기 중국력사의 획기적인 의의를 가지는 위대한 중국공산당이 상해에서 창립 되였다. 상해의 조선공산주의자들은 중국 공산당과의 관계를 수립하고 중국공산주의 운동에 관여하기도 하였다.

상해 복단대학 한국연구소의 석원화교수는 상해시절 조선혁명자들과 독립운동 단체들이 중국공산당과의 관계를 다음과 같이 강조해 설명하였다.

“조선 공산주의자들도 상해에서 적극적인 활동을 전개하였습니다. 원래는 조선공산당이 있었는데 상해에는 고려공산당이라고 했습니다. 독립적인 조직이였습니다. 1929년 이후 고려공산당도 국제공산당의 지부였고 중국공산당도 국제공산당의 지부였습니다. 이때로부터 국제공산당에서는 한나라에한개 공산당만 있어야 한다고 규정했습니다. 그리하여 30년대 상해에는 중국공산당 한인지부가 나타났습니다. 이는 중국공산당 강소성 법남구 당위원회 산하의 한 개 지부였습니다. 이들은 당시 중국 쏘베트 운동을 지원한다든가 잡지를 내고 한국 교민들을 조직해 중국 홍군을 위해 의연금과 의연 물품을 내게 하였습니다.”

상해의 조선인 공산주의 운동은 림시정부의 요원으로 있었던 리동휘와 려운형에 의해 주도 되였다. 국제공산당에 의해 중국공산당 강소성 법남구(法南区) 한인지부로 된후 조봉암, 홍남표(洪南杓), 한용(韩鎔), 김원식(金元植) 등이 지부성원으로 활약하였다. 이들은 중화쏘베트정부를 적극 지원하였고 간행물을 만들어 반일투쟁을 적극 선전하였으며 국내에 대표를 파견해 조선국내 공산중의 운동을 이끌었다.

상해의 림시정부 유적지를 보고나서 답사팀은 중국공산당 제1차 대표대회유적지를 찾아갔다. 림시정부 유적지에서 멀지 않은 곳이였다. 마당로와 흥업로가 만나는 곳으로부터 100메터도 안되는 거리를 두고 중국공산당 제1차 대표대회가 열렸던 건물이 나타났다. 주소는 로만구 흥업로 76번지이다. 원래는 망지로(望志路) 106번지였는데 그 사이 번지수가 바뀌였다.

 

수덕리 중국공산당 제1차 대표대회 유적지 기념관 입구

 

역시 석고문식 층집이였는데 2층으로 되어있었다. 푸른 색과 붉은 색의 벽돌을 섞어 지은 건물 정문은 검은 널대문이였다. 거기에는 동으로 만든 커다란 문고리가 달려있었다. 문 오른쪽에는 중국공산당 제1차 대표대회 개최지 기념관이라고 씌여있었고 왼쪽에는 상해력사박물관이라고 씌여있었다. 문위 벽에는 수덕리(树德里)라는 큰 글자가 새겨져있었는데 수덕리는 1920년대 이곳 주소였다.

1925년에 축조된 이 건물은 중국공산당 창립대회에 참가한 리한준(李汉俊)의 형 리서성(李书城)의 저택이였다. 1921년 7월 23일 건물 1층의 18평방메터 되는 작은 방에 모여 13명 대표들이 중국공산당 제1차 대표대회를 소집하고 중국공산당의 창립을 이룩해 냈던 것이다.

방에 들어서니 정방형 모양의 식탁이 보였다. 식탁 주변에는 12개 작은 나무걸상이 둘러있었고 식탁에는 꽃병과 다기가 놓여져 있었다. 너무나도 간소하고 작은 회의실이였지만 장중하고 숙엄한 분위기를 느낄수 있었다. 기념관에는 별도의 전시실이 없이 회의장 벽에 모택동, 동필무(董必武)를 비롯한 13명 대표의 사진이 걸려있었을 뿐이였다. 

중앙당학교 최룡수교수는 중국공산주의자들이 조선독립운동과 혁명에 적극적인 동조를 준 상황을 소개해 주었다.

(최룡수 교수) “1917년 로씨야 10월혁명의 승리는 동방 식민지, 반식민주 국가 인민의 민족해방운동을 크게 불러일으켰습니다. 그리하여 1919년 조선에서는 ‘3.1’운동이 폭발했고 중국에서는 ‘5.4’운동이 일어났습니다. 중국 ‘5.4’운동의 지도자였던 리대소와 진독수는 조선의 ‘3.1’운동을 높이 평가했습니다. 진독수는 자기의 글에서 조선의 ‘3.1’운동은 위대하고 비장한 운동이며 무력으로가 아닌 민의로서 력사의 새 기원을 개척해 놓았다고 말했습니다. ‘3.1’운동과 ‘5.4’운동에 참가한 혁명투사들은 서로 동정하고 지지하면서 20세기 중조 인민의 혁명적 친선관계의 새로운 페지를 장식했습니다. 중국공산당을 ‘5.4’운동의 적극적인 성과라고 본다면 한국 림시정부도 ‘3.1’운동의 성과라고 할 수 있습니다. 조직의 성격과 형식은 다르지만 다같이 레닌의 커다란 지지와 관심을 받았습니다. 창립초기에 중국공산당은 상해 림시정부를 적극 지원했고 밀접한 관계를 가졌습니다. 그것은 조선독립운동과 중국혁명사업이 다 세계 무산계급의 구성부분으로 되기 때문이며 조선공산주의자인 리동휘 등이 림시정부의 주요직을 맡았기 때문이라고 봅니다. 후에 중국공산당의 훌륭한 당원으로 조선인 한락연, 김훈, 장지락 등 동지들은 한때는 한국 림시정부의 활동에도 참가하였습니다...1928년후에 제3국제의 결정에 따라 상해에서 활약하던 조선공산주의자들은 중국공산당에 참가하여 중국공산당 강소성 지부를 창설하여 많은 일들을 하였습니다.”

수덕리의 원 건물을 중심으로 중국공산당 제1차 대회 개최지 기념관은 1952년 개관하였다. 50여년래 무려 천여만명이 이곳을 방문하였다. 1997년 6월 중공중앙 선전부에서는 이곳을 전국 애국주의 교양 시범기지로 확정했다.

 

로만구의 한국림시정부 유적지와 중국공산당 제1차 대표대회 개최지에 대한 답사를 마치고 만국공동묘지를 찾아 떠났다. 당시 상해에서 활동하던 많은 조선인 지사들이 만국공동묘지에 안장되였다.

상해시 정안사로(静安寺路)에 위치한 만국공동묘지는 지금 송경령 릉원으로 개칭되였고 정안사로도 송원로(宋园路) 개칭되였다. 로만구의 회해중로를 빠져나와 회해서로를 지나 송원로 21번지에 도착하니 거대한 릉원이 나타났다. 중국의 혁명선구자 손중산의 부인이며 중국의 유명한 민주인사였던 송경령 녀사를 기념하기 위해 1981년부터 이곳을 송경령 릉원이라고 했다.

부지면적인 12헥타르에 달하는 릉원은 록음이 우거지고 푸른 잔디가 깔려있는 아름다운 원림으로 되여있다. 릉원 중앙에는 송경령 묘소와 기념관이 있고 묘소 동서 량쪽으로 외국인 묘지와 명인 묘지가 지금도 보존되여있다.

외국인 묘원(墓园)에 이르니 타원형 비석 하나가 있었다. 거기에는 외국인 묘원이라고 밝혀있었는데 이곳이 바로 옛날 만국공동묘지 자리이다.

 

사적지가 많은 상해 로만구지역도

길 안내를 해준 현지인들과 함께(좌 조향란 기자, 우 조선옥 기자)

송경령공원(원 상해 만국공묘)

 

외국인 묘원은 드넓은 잔디밭에 자리잡고있었다. 무성하게 자란 풀을 헤치면 하얀 대리석으로 만든 묘비가 나타난다. 답사팀 일행은 묘지에 밝힌 이름들을 하나하나 검증하기 시작하였다. 한국 림시정부 제2대 대통령을 지냈던 박은식(朴殷植), 림시정부 법무총장, 국무총리 대리 겸 외무총장을 지냈던 신정, 군무총장과 국무총리를 력임하였던 로백린(卢伯麟), 인성학교 교장이였던 김태연(金泰渊), 림시정부 국무원 비서장 김립(金立) 그리고 김구의 부인 최준례 녀사를 비롯해 수십명 민족독립 지사들과 일반 조선인 유해가 안치되여있었다. 1993년 박은식, 신정, 로백린을 비롯한 지사들의 유해는 한국으로 봉환해 갔기 때문에 지금은 묘비만 남아있다.

1859년 황해도 황주(黄州)에서 태여난 박은식은 일찍부터 문필활동에 종사하였다. 그는 선후로 《황성신문》과 《대한매일신보》 주필로 활약하였고 중국 상해에서 신규식, 홍명희 등과 더불어 《동제사》를 조직하기도 하였다. 박은식은 상해에서 독립활동에 종사하는 한편 박달학원을 세워 조선청년들을 교육하였고 민족사학 저작인 《한국통사》를 저술하였다. 1919년 그는 한국 림시정부 기관지인 《독립신문》사 사장을 맡고 민족언론을 주도하였다.

1924년 박은식은 림시정부의 국무총리를 맡았고 대통령 대리를 겸했다. 1925년 리승만 대통령의 탄핵 면직 사건이 있은뒤 그는 림시정부 제2대 대통령에 취임하였다. 그러나 이시기 림시정부는 내외로 극심한 곤경을 겪고있었다. 곤경에서 벗어나기 위해 그는 전민족의 대단결을 주장하면서 정부의 조직력을 강화하기에 힘썼다. 이해 그는 제2차 헌법개정을 거쳐 대통령제를 국무령 중심체제로 바꾸었다.

년로함에도 불구하고 민족독립을 위해 로심초사하던 박은식은 1925년 11월 1일 상해에서 병으로 영면하였다.

로백린은 1873년 황해도 송화(松禾)에서 태여났다. 무예와 한문에 능한 그는 일찍 일본 륙군사관학교를 졸업하고 무관으로 있었다. 조선이 국권을 상실하자 그는 안창호, 량기탁, 리동휘, 신채호 등과 함께 신민회를 조직하고 중국 동북에 독립운동 기지를 건립할 계획을 작성하였다. 그는 또 고향인 송화에서 뜻이 있는 청장년들을 양성하기도 하였다.

3.1운동이 일어나자 로백린은 즉시 상해로 달려가 한국 림시정부 수립에 참여하였다. 미래 전쟁에서 막강한 군력을 키우려면 기술이 뛰여난 비행사가 많이 수요된다는 것을 파악한 그는 1920년 림시정부 군무부 총장의 신분으로 미국에 건너가 비행사 양성소를 설립하였다. 미국의 조선인들이 복격적으로 도와주었기 때문에 이 양성소는 선후로 수십명 조선인 비행사를 양성해냈다.

1921년 로백린은 다시 상해로 와서 무관학교 출신인 청년들을 규합해 일제에 대한 무력항쟁을 적극 준비하였다. 이듬해 그는 리승만의 지명으로 국무총리 대리를 맡았고 1923년에는 정식 국무총리로 추대되여 림시정부를 이끌었다. 1924년 박은식이 대통령으로 당선되자 그는 국무총리에 임명되였고 군무총장을 겸직하면서 계속 독립운동을 위해 활동하였다. 1926년 1월 22일 상해에서 병으로 세상을 떴다.

인성학교 교장으로 있었던 김태연은 1891년 황해도 장연(长渊)에서 태여났다. 그는 1919년 5월 상해에서 려운형과 함께 상해한인거류민단(上海韩人居留民团)을 조직하고 상해지역 조선인들을 단합하여 림시정부 활동을 지원하였다. 이해 그는 또 려운형과 함께 대한적십자회(大韩赤十字会)를 조직하고 손정도(孙贞道) 등과 함께 교육회(教育会)를 조직하기도 하였다.

상해 한국 림시정부에서 김태연은 황해도 의원으로 사업하였다. 1921년 11월 그는 인성학교 교장으로 선임되여 중국 상해의 조선인 교육에 진력하다가 병사하였다.

어느덧 저녁녘이 되어 황폰빛이 비쳐들기 시작하였다. 만국공동묘지에서 수많은 지사들의 이름을 하나하나 찾아보고 확인하기란 쉽지 않았다. 고이 잠든 지사들의 넋을 욕보일까 두려워 일행은 두 손으로 조심조심 풀과 락엽을 쓸어내며 더듬어 갔다. 신규식, 박은식, 로백린, 김인전(金仁全), 김태연, 안태국(安泰国), 김립...너무나도 쟁쟁한 이름들이였다. 조국을 찾겠노라 맹세하고 중국에 망명하여 싸워왔던 지사들, 망국의 한을 지니고 해방을 보지 못한 채 이들은 이곳에 조용히 잠든 것이다.

석양이 만국공동묘지를 붉게 물들이고있었다. 투사들의 넋이 깃든 비석들도 황혼의 금빛에 서서히 물들어 갔다.

(중앙인민방송국 글: 김성룡/사진: 조향란, 조선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