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은 보이는만큼 쓴다
래원:중앙인민방송국      2019-02-15 16:19:00


아침에는 엘레베이터에서 회사 동료를 만나서 그 친구의 차를 함께 타고왔다. 고맙고 또 덕분에 빨리 오고 편안하게는 왔는데 걷고 지하철을 탈 때보다는 보고 들은 것이 적다. 얻는 것이 있으면 잃는 것이 있는 법이다.

팥 심은데서 팥이 난다. 팥을 심어놓고 소눈알만한 콩을 기대하면 안된다.

나는 위챗에서 할머니, 엄마, 안해를 쓰면서도 아버지는 쓰지 못했다. 앞으로도 마찬가지다. 왜냐하면 15세이후로 아버지에 대한 이야기가 없었기 때문이다. 물론 이미 많이 나와 있는 부성애에 대한 글도 공부하고 여러 자료들을 찾아서 퍼즐 맞추듯이 훌륭한 아버지상을 그려놓을 수는 있다. 그러면 진짜 친아버지를 쓴 글보다 훨씬 완벽하게 부각할 자신도 있다. 그러나 그게 무슨 의미가 있을가.

나는 위챗에서 그냥 내가 겪어왔던 일과 주변에서 발생했던 사소한 현상들을 많이 써왔다. 세계적인 위인이나 력사적인 대 사변이나 영어가 들어간 론거들을 전혀 언급하지 못했다. 내가 그런 쪽을 접촉해 보지 못했기 때문에 나올 수가 없는거다. 그래도 괜히 번역엔진을 가동해 역으로 번역한 다음 멋있게 영어로 주석을 달 수는 있다. 그런데 나는 소학교 철자법만 뗀 학생들이 알아봐 줘도 충분하다. 그렇게 심오하게 갈 욕심이 없다.

글짓기 공모전에서 보면 여러 책들에서 따다가 짜집기를 해서 멋있는 글을 완성하는 사람들도 보아왔다. 물론 표절은 나쁘지만 그만큼 독서를 많이 했다는 점에서만은 긍정할만한 일이다. 아무리 유능한 며느리도 쌀이 없는 밥을 짓지는 못한다. 10여년전에 회사 선배가 이런 말을 하더라.

“난 니가 차분하게 앉아서 책을 보는걸 본적이 없는 것 같다. 공부를 좀 해라.”

그 당시에는 “나도 집에 가면 책을 본다”고 언짢게 대답했지만 마음 한구석으로 켕기기는 하더라. 그때까지만 해도 나는 책의 간접 경험보다는 사회 실천의 직접 경험이 더 실용적이고 효과적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부단히 사람들을 만나고 여러 행사에도 빠짐없이 쫓아다녔다.

그때 나는 책은 출판되여 나오는 순간부터 낡은 지식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그 낡았다는게 구체적으로 무엇인지조차도 생각하지 않고 그냥 멀리 했다. 또 학교 때에 시험을 위해 싫은 책도 지겹게 보아왔는데 이제 시험 볼 일도 없는 호시절에 내가 왜 다시 또 책에 묶여야 하냐는 천진한 생각도 했었다. 그냥 흘러가는대로 몸을 맡기고 살고 싶었다.

그러다가 어느날 친구들과 한잔 하면서 대학교수 친구가 이런 말을 하는걸 들었다.

“어제 저녁에는 침대에 누워서 책을 보다가 갑자기 오늘 약속이 생각났다. 아니면 깜빡할번 했네.”

순간 이런 생각이 들더라. 나는 침대에 누우면 잘 일밖에 없는데 저 친구는 그 시간에도 책을 보네. 그래서 저 친구는 교수가 돼도 되고 나는 그냥 흘러가는대로 사는거다. 그 친구는 그냥 지나가면서 한 얘긴데 내 눈앞에는 침대에 비스듬히 기대여 책을 읽는 그림이 괜히 품위있고 멋있어 보였다. 그래서 나도 독서를 좀 폼이 나게 해야 겠다는 생각을 갖게 되였다. 구지욕이 아니라 그냥 멋있어 보일려구...친구따라 강남 간다.

친구들끼리 만나서 술 한잔 하고 웃고 떠들며 생활적인 얘기를 할 때는 너도나도 아주 기분이 좋다. 그런데 대학 교수나 연구기관의 학자 친구들이 조금 깊은 얘기를 하면 나는 조용히 입을 다문다. 끼일 지식이 없다. 기가 죽고 얼굴이 뜨겁지만 그렇다고 괜히 아는척 하면 밑천이 더 드러난다. 이럴 때 속보이지 않으려면 그냥 웃으면 된다. 내 경험에 의하면 어떤 경우든 가만히 있으면 중간은 가더라.

내 녀자동창중에는 집에서 남편하고 가끔 다투는 일도 독서문제로 인기된단다. 남편이 책을 좀 보라고 동창을 닥달을 하나 보더라. 내가 알기로는 그 동창의 독서량도 만만치 않다. 그런데 이런 고급스러운 가정 싸움을 하는걸 보면 부럽기도 하고 내 스스로가 많이 부족해 보기이도 한다.

최근에 와서 더 간절하게 느끼는건 급속한 사회 변혁에 따라가기 숨차다는 생각이다. 신매체에 적응하기도 힘들고 그렇다할 기발한 아이디어도 떠오르지 않는다. 한때는 모든 최신 전자기기는 나오는 족족 사들여서 사용방법을 익히고 게임도 하고 그랬는데 이제는 아, 옛날이여~ 로 됐다. 4차 산업혁명시대는 반복적인 단순 작업은 전부 로봇이 사람을 대체한다. 인간이 로봇으로 교체될 가능성이 제일 높은 분야가 번역이고 다음은 기자의 원고 작성이란다. 그것도 늦어서 5년안에 그 변혁이 일어난다고 한다.

우리가 스마트폰의 발전속도를 돌이켜보면 이게 불가능한 일이 아니라는걸 느끼게 될 것이다. 우리는 전에 현금 일전한푼 없이 휴대폰 하나만 들고다녀도 생활이 전혀 불편함이 없는 시대가 올 것이라는 생각을 미리 하고 살았던가? 그런데 어느날 아침에 눈을 뜨니 세상은 오히려 현금이 불편한 시대에 와 있다. 휴대폰은 그래도 전부터 생활화가 되여서 그럭저럭 묻어왔다. 그런데 이제는 단순히 패드와 같은 전자기기나 다루어서 시대를 따라갈 수 있는 차원이 아니다. AI시대는 지금의 이동인터넷시대와도 근본적으로 다른 변혁이다. 이동인터넷도 그럭저럭 적응해 왔는데 그때 가서 다시 보자는 사고방식은 위험한 발상이다. AI시대에 로봇에 밀리지 않으려면 그 로봇을 만드는 원리와 기술이 지레 아름차서 포기하기보다는 그 로봇이 나를 위해 봉사하게끔 만들수 있는 그런 사유를 가지고 자신을 AI시대 맞춤형 인간으로 성장시켜가는게 급선무일 것 같다. 이런 의식을 가지는 순간부터 그 시대를 살아가는 준비를 해가기 시작하는거다. 물론 이렇게 대비했다 하더라도 단지 준비의 시작에 불과하다.

더 생활적으로 얘기하면 풍당이란 작가는 “무소위”란 책에서 나이가 들수록 휴대폰도 부지런히 최신으로 바꾸고 옷도 자주 사 입으라고 했다. 휴대폰을 잃어버리거나 고장나기전까지 쓰고 옷도 겨울만 되면 그 옷이면 곤난하다는거다. 젊은 친구들은 걱정하지 않아도 으레 알아서 새것으로 바꾸기에 게을리하지 않겠지만 나이가 들면 이면에서 감각이 무뎌진다는거다. 물론 그 작가의 개인적인 견해고 근검절약에 위배되는 언론일 수도 있다. 그런데 어떤 물건은 버려야 다른 물건이 갱신되고 더우기는 창조가 이루어질 수 있다는 견지에서는 미래 지향적인 관점이라고 본다. 또 쉽게 설명하기 위해 휴대폰과 옷을 례로 들었지만 진정 말하려는 의중은 구체적인 물질이 아니고 항상 그런 생각을 가지고 이 격변의 시대를 살아가라는 얘기다. 풍당이란 작가는 단순 문학쪽의 인물이 아니고 의학박사에, 미국에서 공상관리석사까지 마치고 현재는 개인 사업에서 상당히 성공한 사람이다.

설기간에 외사촌 동생들과 식사를 하면서 들었는데 주변에서 위챗 일인방송을 하는 친구의 방문자수는 만을 넘는단다. 그리고 그중에서 반은 악플이란다. 그런데 모든 인기 연예인은 다 악플속에서 성장한다. 악플도 일종 역방향 공감이다. 그리고 악플도 꾸준하게 달면 그것도 골수팬이다. 악플의 부지런함과 근력만큼은 인정하고 넘어가면 인터넷세상을 살아가기가 많이 편해지지 않을가 싶다. 물론 말이 그렇지 실생활에서 실천하기 쉽지는 않다. 어마어마한 내공을 필요로 하는 수련이기도 하다.

정 어렵다면 한국의 홍석천이라는 연예인이 했던 이런 말을 추천하고 싶다.

“나를 모르는 다른 사람들의 쉬운 비난 때문에 왜 내 삶이 망가져야 되지?”

또 혜민 스님은 이런 말을 했다.

[다른 사람에 관해 하는 이야기를 가만히 들어보면 결국 말하는 본인이 어떤 사람인가를 더 드러내는 경우가 많아요. 왜냐하면 다른 사람의 다양한 면 가운데 내 마음에 딱 걸리는 부분을 이야기하기 때문입니다.]

글을 보이는만큼 쓰듯이 보는 이도 자기 마음만큼 본다.

궁금이

youshengxiangban@126.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