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구따라 강남 간다
래원:중앙인민방송국      2018-10-26 09:37:00

오래 동안 안 만나고 연락을 안 해도 관계가 소원해진게 아닌가 하는 걱정을 전혀 하지 않는, 몇달만에 만나도 어제 만났던것처럼 그렇게 편안하고 믿음직한 사이가 친구다.

친구를 보고 그 사람을 안다고 했다. 그만큼 취향과 정서가 맞는 사람들끼리 친구가 되는 법이다. 친구는 자주 만나는만큼 알게 모르게 서로에게 영향을 준다. 그것이 긍정적인 것이든 부적인 것이든. 나의 등산 운동도 친구의 조언에서 시작됐다. 마침 우리 집은 산에서 멀지 않다. 걸어서 40분거리니 버스로 3개역이면 도착이다. 친구의 론리대로라면 북경은 강이 없기에 산이 더욱 소중하단다. 늘 가까이에 있으니 소중한줄 모르고 산것 같다. 북경의 서산은 령광사가 있어 더욱이 유명하다. 1200여년의 력사를 자랑하는 령광사는 불교 명승지이다. 그러다보니 매달 음력 초하루와 보름날에는 절을 찾는 사람들로 인산인해를 이룬다. 10월 1일 국경절이나 설련휴때는 오전 9시전과 오후 4시후에만 정기입장권이 유효할 정도로 사람들이 많이 몰린다.

내 친구는 집이 동쪽이라 서산하고는 거리가 멀다. 등산 한번 하려면 별러서 일부러 시간을 내야 하고 막히는 길에 운전을 해야 한다. 운동을 좋아하는 친구의 요청으로 몇번 산행을 다녀오다가 자연스럽게 산에 정을 붙이게 되였다. 그 뒤로 시간만 나면 산에 가는 것이 일상으로 되였다. 물론 술을 좋아하는 나로서는 술을 더 잘 마시기 위한 체력을 축적하는 운동이기도 하다. 노세 노세 젊어서 놀고, 마실수 있을 때 많이 마셔 두자는 것이 내가 살아가는 방식이다. 이를 실천하기 위해서는 체력과 주량 확보가 필요하다. 그러려면 운동을 해야 되고 운동중에서도 별 기교가 필요없는 등산이 적격이다.

산은 단순하게 체력단련의 장소에만 그치지 않는다. 홀로 천천히 산에 오르다 보면 공기 좋은 곳에서 나만의 시간을 가질수 있다. 평시에 할수 없었던 생각들을 많이 정리해보는 시간이기도 하다. 물론 밑도 끝도 없이 “야~호~”를 웨치는 사람들이 살풍경이긴 하지만 그것도 자주 만나면 그러려니 하고 습관이 된다. 꼭 산에 오면 소리를 질러서 온갖 새들을 놀라게 하는 사람들은 무슨 생각으로 그러는지 모르겠다. 일종 해탈의 표현이고 산에 올랐다는 성취감일가? 그걸 꼭 그렇게 고함으로 표현해야만 한다면 그것 또한 그 사람들 나름의 방식이겠지만...

일각에서는 등산이 관절에 안좋다며 만류도 한다. 그런데 사람에 따라 체질 나름이라고 본다. 7-80세 로인들이 나보다 더 부지런히 더 높은데로 꿋꿋이 등산을 견지하는 모습을 보면 저 사람들의 관절은 뭐지? 술 담배를 일절 안 하는데 간이 나쁜 사람도 있다. 인생이라는 것이 다 미리 정해진 시간표대로 가는 것이고 무슨 일이 발생했다면 그것은 그렇게 발생할수 밖에 없는 최상의 결과이다.

본격적으로 등산을 시작하기 전에 고향에서 친구가 와서 산에 함께 갔다가 중턱도 못 오르고 돌아섰던 기억이 난다. 친구는 한번 끝까지 올라보자고 잡아끌건만 숨이 차서 더 이상 오르지 못했다. 지금도 그 자리를 지나가면서 그때 그 친구의 소원을 들어줬을걸 그랬다는 생각을 종종 한다. 나는 수시로 갈수 있지만 그 친구는 평생에 두번 올가말가 한 산이다. 그때도 지금처럼 역지사지로 배려했더면 어떻게 해서든 올라갔을텐데...운동을 견지하려면 동력이 있어야 한다. 올해 건강검진에서 혈당이 높게 나왔다. 식단을 조절하고 운동을 하라는 것이 모든 의사들의 공동 조언이다. 약을 먹기는 싫고 먹고 싶은 음식을 안먹을수도 없고 유일하게 할수 있는게 운동이다. 검진결과가 나온 이튿날부터 산정상까지 오를수 있는 의지와 힘이 한순간에 생기더라. 참 진작에 잘하지...

어느날 친구가 북경의 날씨조건에서 밖에서만 운동을 견지하기는 어렵다며 집에 런닝머신을 사놓았단다. 좋은 발상인 것 같아서 나두 따라서 마련해 놓았다. 옛날에도 샀던 적이 있었지만 많은 경우에 그러하듯이 보통 런닝머신은 일주일이 고봉기이고 그 뒤로는 그냥 옷걸이나 빨래 건조대로 사명을 마감한다. 그런데 나이가 들면서 건강에 대한 자각성이 높아졌는지 친구 따라 다시 사놓은 런닝머신은 지금도 잘 견지해 나간다. 그 친구는 그냥 자기가 설계해 놓은 생활의 궤적대로 가고있었을 뿐이겠지만 나한테는 그것이 따라 배워야 할 좋은 선례이고 친구가 나에게 보여 주는 좋은 본보기였다.

이 친구는 또 여러 가지 세계 맥주를 즐겨 마신다. 전에 나는 쌀밥과 랭면과 맥주는 아주 최악이 아니면 아무것이나 상관 없다고 주장해 왔다. 학교 때 불면 날아나는 빠도 나는 맛있게 먹기만 했다. 그리고 맥주맛을 따지는 친구들이 별나다고 여기기도 했다. 그런데 욕하다가 닮는다고 어느날 내가 독일 맥주에 맛을 들이고 보니 누구보다도 거기에만 집착하고 있었다. 그래서 슬쩍 말을 바꿨다. 인생이 얼마라고 유한한 생에 좋은 맥주로 무한하게 마셔야지...그렇게 시작한 것이 이제는 식당을 정할 때도 료리가 좋은 집보다는 독일 맥주가 있느냐 없느냐가 절대 기준이 됐다.

친구따라 강남 간다더니...

친구중에는 대학교수들도 몇명 있다. 평소에는 그냥 편한 친구고 야한 롱담도 서슴치 않는 가까운 사이들이지만 모임에 다른 사람들이 섞이거나 깊은 얘기가 시작되면 친구가 교수였다는 것을 내가 잊고 있었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석사 박사가 되는데는 다 그만한 지식의 저력이 있는 것이고 대학 교수는 다 그만한 학술적인 깊이가 있는 법이다. 그걸 느낄 때마다 나한테는 한번씩 채찍질로 된다. 또 이런 친구들이 존경스럽고 자랑스럽고 부럽다. 나는 깊이 보다는 가벼운 얘기, 학문적인 얘기보다는 다소 엉뚱하더라도 재미있는 얘기를 선호해 왔다. 그래도 나이가 들면서 깊이의 중요성과 매력을 실감하게 된다. 그래서 독서의 중요성을 더 느끼게 되고 그걸 실천하기 위해 노력중이다. 서당개 삼년이면 풍월을 읊는다고 했던가. 우리 조상들은 왜 이 좋은 뜻의 속담을 꼭 개에 련계시켰는지 모르겠지만 아무튼 공감이 확 가는 말이다.

독서를 떠올리면 생각나는 “친구”가 있다. 이 친구는 그냥 스쳐지나가는 룸메이트 정도의 친구 아닌 “친구”다. 독신 때 려관에 숙박을 했는데 한방의 남은 침대에는 손님이 수시로 바뀌였다. 어느날 들어온 손님은 신강에서 온 젊은 친구였다. 이 친구의 독서 원칙이라고 할가 방법이라 할가 그의 주장에 따르면 독서는 욕심을 가지 지말고 하라는 것이다. 한달이나 일년에 몇권을 읽겠다든가, 한 책을 며칠내에 다 보겠다든가, 하루에 반드시 몇페지를 읽겠다든가 라는 식으로 누가 시키지도 않는데 스스로 압력을 자초하지 말라는 말이다. 하루에 한페지를 봐도 좋다. 그것이 열흘 한달 몇달을 가다보면 책 한권이 된다는 론리이다. 아무리 바쁜 사람도 하루에 한페지를 읽을 시간은 있다. 이 론리를 적용하면 이 두꺼운 책을 언제 다 볼가? 못볼거면 시작을 말자며 포기하려는 생각을 없애준다. 그리고 아무런 부담없이 책을 쉽게 접하는 좋은 방식이기도 하다. 학교 때 은사님이 길거리를 가다가 말다툼을 하는 현장을 들여다 봐도 배울 것이 있더라는 말씀을 하셨다. 그냥 스쳐지나가는 려관방의 생면부지의 손님으로부터 이런 실용적인 계시를 받을 줄은 생각도 못했다. 지금도 나는 책보기 싫을 때면 그 친구의 독서 원칙을 떠올리며 한페지라도 펼친다.

직장 생활에서 스트레스를 받지 않는 사람이 없다. 그리고 스트레스 해소에는 친구만큼 좋은 령단묘약은 없다. 사회 생활을 하다 보면 사무실 동료에게도, 집 식구에게도 말하기 어려운 스트레스가 있기 마련이다. 이 경우에 친구는 정말 적벽지전의 동풍같은 존재다. 사무실 일은 집에 갖고 가지 말고 집안 일은 사무실에 들고 오지 말자는게 내 직작생활의 원칙이다. 그래서 직장도 집도 아닌 제3의 장소에서 친구하고 한잔 하면서 씹고 싶은 사람을 실컷 씹고 거기에다 친구가 양념을 뿌리며 맞장구를 쳐주면 그만큼 시원한 술자리도 없다. 물론 이튿날 술을 깨고 나면 또 그 자리지만... 그래도 그 당시만이라도 통쾌했던 것도 요즘 말로 소확행이다. 작지만 확실한 행복이다. 물론 나는 어떤 원인에서든 원망하는 것을 주장하지는 않는다. 원망은 잘못하면 그걸 들어주는 사람한테도 스트레스를 줄수 있고 또 하소연한다고 해서 본인의 문제가 해결되는 것도 아니다. 하지만 그냥 아무 우려없이 그때 그순간의 속을 털어놓을 수 있다는 자체로 친구에게 고마울 뿐이다.

애주가라면 누구나 오밤중에 전화해서 친구를 불러낸 경험이 한번쯤은 있을 것이다. 나는 새벽 두시에 자는 친구를 깨워서 불러낸 적도 있고 밤 11시에 30키로메터 밖의 친구을 다짜고짜로 나오라고 한 적도 있다. 그들은 번마다 거절 한번 안하고 다 나와주었다. 오죽 하면 이 밤중에 나한테 전화를 했을까 라는 속깊은 아량에서 나와준거라고 생각한다.

때아닌 술 전화는 밤에만 그치지 않았다. 제 애비도 못알아본다는 낮술은 또 얼마나 마셨는지... 대낮부터 불러내서는 해를 중천에 이고 마시기 시작하면 날이 저물고 자정을 넘어 새벽으로 간다. 이른바 하루 12시간 술타임이다. 이럴 때도 번마다 구실 한번 안둘러대고 꼬박꼬박 술친구가 돼준 정말 고마운 친구가 있어서 돌이켜 생각할 때마다 항상 고맙기만 하다. 그래서 나는 지금 웬만하면 친구의 술요청을 거절하지 못한다. 이제 웬만한 술자리는 이런저런 구실을 찾아 피하라고 권고하는 사람들도 있 지만 친구들한테만은 도무지 그렇게 할수가 없다. 내가 좋을 때나 내가 슬플 때는 친구가 옆에 있어줘야 하고 이제 친구가 한잔 하자는데 내 개인 사정으로 거절한다는 것은 너무 리기적이고 매정한 일이다.

친구 때문에 좋아하게 된 노래도 있다.이름 그대로 “친구”다.

괜스레 힘든 날 턱없이 전화해

말없이 울어도 오래 들어주던 너

늘 곁에 있으니 모르고 지냈어

고맙고 미안한 마음들

...

사람은 자기가 듣고 싶은 것만 들린다고 했던가? 원래부터 많이 들어왔던 노래 가사지만 자기가 어려운 환경에 처했을 때 한잔 하고 2차 노래방에서 친구가 부르는 이 노래는 그처럼 내 얘기인것 같았고 친구가 내 심경을 헤아려 부르는 것 같이 느껴졌다. 누군가의 노래에는 그 사람의 인생이 담겨있다고 말하는 이들도 있다.

...

세상에 꺾일때면 술 한잔 기울이며

이제 곧 우리의 날들이 온다고

...

이 대목이 나오면 괜히 눈시울이 젖어오고 친구가 든든해 보인다. 누가 한국 노래는 “눈물”과 “이별”과 “사랑”이란 단어가 없으면 가사가 안된다고 했다. 그렇게 보면 그냥 수많은 노래 가사중의 하나지만 특정 환경에서 그 노래가 꼭 마치 나를 위해 만들어졌고 나를 위해 부르는 것 같은 자아도취에 빠질 때가 있다.

또 한곡은 “해뜰날”이다. 단 한 구절로 사람을 공감하게 만들수 있는 노래다.

...쨍 한고 해뜰 날 돌아온단다...

역시 오래된 노래지만 전에 어떤 친구가 부른 뒤로 귀에 쟁쟁해진 노래다.

한동안 노래방에 가면 피같이 소중한 술을 적게 마시는 한이 있어도 이 두 노래만은 불러야만 직성이 풀리는 고정 애창곡으로 되였다. 그뒤로 진짜 쨍하고 해가 떴고 모든 여의치 못한 일들이 지나갔다. 그러고 나니 노래는 다시 그때 그때의 기분에 따라 바뀌면서 평온한 일상의 흐름을 타고 계속 아름다운 멜로디로 이어져 가더라.

그런데 언제부터인가 위챗 단체방이 생기면서 내거 인듯 내거 아닌 내거 같은 친구가 타나나기 시작했다. 위챗은 천해지각의 사람을 이어줘 가깝게 만드는가 하면 지척에 있는 사람을 소원하게 만드는 묘한 속성을 갖고 있다. 전화 통화는 익숙한 목소리와 진정어린 마음, 간절한 어투, 격동된 억양, 풀이 죽은 어감...등이 전화기 너머로 느끼진다. 그래서 저도 모르게 응했던 술요청들이 이제는 전혀 무표정한 위챗메시지 하나로 단호하게 퇴짜 맞는 일들이 많아진다. 특히 단체방은 묘한 분위기로 흐를 때가 있다. 한 친구의 요청이 튀여나오면 선택이 애매할 때 먼저 답하지 않고 다른 사람의 태도를 지켜볼수 있다. 그리고 따르면 된다. 또 안가도 되겠다 싶으면 제일 마지막에 거절해도 되니까 섣불리 결정할 필요가 없다. 그리고 직접 말로 하는 것보다는 그냥 문자로 하는 거절이 훨씬 쉽다. 그것도 어려우면 기껏해야 그냥 아무말도 안하고 묵비권을 행사하면 된다. 그러면 나는 문자를 확인못한 것이고 약속이 지난 후에야 본것으로 된다. 그야말로 멀고도 가까운 위챗이다.

친구사이에는 믿음이 중요하다. 간혹은 당신의 친구가 당신의 뒤담화를 하더라고 일러바치는 사람들이 꼭 있다. 이럴 때 친구를 믿느냐 그 일러바치는 사람을 믿느냐의 문제인데 당연히 친구를 믿어야 한다. 설사 일러바친 사람의 말이 사실이라 할지라도 친구를 믿어야 한다. 리유가 없다. 그냥 친구이기 때문이다.

가까운 것이 친구지만 가까울수록 서로간의 존중이 필요하다. 가깝다고 함부로 대해도 된다고 생각하면 큰 착각이다. 친구 사이는 물론이고 모든 인간관계는 존중을 해야 받는다. 그리고 나이가 들수록 취향이나 정서가 맞는 사람을 새로 만난다는 것이 쉽지 않다. 친구로 10년이상이면 가족이다. 입안의 혀도 씹을때가 있다 했거늘 친구사이에 종종 이런저런 견해 차이가 생기는 것도 지극히 정상적이다. 친구로 받아들였으면 이 나이에 서로의 약점을 포용하고 오래 함께 가는 것이 그사이 쌓아온 우정에 대한 정확한 판단이라고 생각한다.

친구가 없는 인생은 오아시스가 없는 사막이다.

작성자: 궁금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