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지오 기록문학 <량가하> 제11부
래원:중앙인민방송국      2018-07-12 15:59:00

라지오 기록문학 “량가하”는 습근평 총서기가 량가하에서 지냈던 지식청년 시절 생활을 생동하게 보여주고 수십년 사이 량가하에서 일어난 거대한 변화를 기록하였다.       

라지오 기록문학 <량가하>는 당 19차대회 정신을 학습, 관철하고 습근평의 새시대 중국특색의 사회주의 사상을 선전하는 좋은 교재이자 초심을 잃지 않고 사명을 명기하는 당원들의 학습교양활동을 깊이 전개하는 중요한 도서이기도 하다.  

습근평이 조가하에 온후 조가하의 한 “미결 사건”을 다시 처리하기로 했다. 조가하에는 무강문, 아명은 수와라고 부르는 사원이 있었다. 마을 사람들이 보기에 수와는 령리하고 능력있는 사람이였다. 농사일을 잘하는 외에도 방목과 같은 일도 다른 사람보다 더 잘했다. 그가 방목할때는 양떼가 밭에 들어가서 곡식을 먹거나 마구 헤집는 일이 없었다. 생산대장이였던 그는 원견성도 있었고 사람들을 항상 단합시킬수 있는 교제능력도 있었다.

그렇게 능력자인 무강문이 생산대장을 안하고 방목을 한다는것은 리해하기 어려운 일이였다. 습근평은 수와라고 부르는 무강문이 생산대장에서 면직되였던 경과를 알아냈다.

1965년 봄, 연천현 당위원회 서기가 간부 두명을 데리고 오면서 자전거를 타고 청평천에서 산을 넘어 조가하에 시찰을 내려왔다. 조가하에 들어설때 수와는 사원들을 동원해 황무지를 개간하고 있었다. 연천현 당위원회 서기 일행은 황무지를 개간하는 촌민들을 발견하자 버럭 화를 내면서 자전거를 길옆에 버리고 “누가 생산대장이요? 담도 크게 황무지를 개간하다니, 이는 자본주의 길로 나가는 위험한 행동이요”라고 소리쳤다.

그 시절 황무지를 개간하는것은 정책을 위반한 엄중한 착오였다. 그러나 수와가 생각하기에는, 황무지를 개간해 식량을 더 많이 생산하여 배를 불리는 일은 틀린 일이 아니였다. 이런 생각을 했던 수와는 현위서기와 말다툼이 붙었다. 그후 수와는 생산대장 일을 영원히 하지 않겠다는 맹세를 하고 생산대장을 그만두었다.

수와가 생산대장을 하지 않자 조가하의 알곡 수확고가 떨어지면서 다년간 밑바닥을 치고 있었다.

습근평이 조가하에 갔을때 수와의 나이는 27세였다. 습근평은 조가하의 알곡 수확을 제고하려면 그래도 수와가 생산대장이 되여야 한다고 생각하고 그를 찾아갔다.

“수와, 당신이 대장을 계속 맡아야 겠소.”
  “아니요, 나는 할만큼 해서 안할거요.”
  “수와가 대장이 되여야 생산량이 올라갈수 있소.”

습근평은 수와를 수차 설득했다. 집체를 위해 더 많이 고려하고 생산대에 더 기여할것을 바라는 마음에서였다. 그러나 수와는 생산대장을 하지 않으면 속 썩일 일도 없고 또 다른 사람들이 자신에게 의견도 없을것이라고 생각했던차라 계속 거절했다.

습근평은 포기하지 않고 수와를 계속 설득했다. 습근평의 간곡한 부탁과 기대를 받은 수와는 생산대장직에 복귀하기로 마음먹었다.

그후 마을 사람들은, “습근평이 그렇게 고집쟁이인 수와를 설득한것을 보면 수완이 이만저만이 아니라고” 말했다.

습근평은 또 조가하에서 야학교를 세우고 사원들에게 글을 가르쳐주었다. 야학교에서 글을 익힌 촌민 고소매는 그때에야 자신의 이름 석자를 쓸수 있었다.일재간이 좋은 고소매는 남성들보다 일을 더 잘했다. 습근평은 고소매를 “무쇠처녀”라고 불렀다. 고소매는 당시 습근평이 즐겨하던 “기차가 빨리 달리려면 기관차가 제일 중요하고, 쇠를 단련하려면 장인 자신부터 강해야 한다”는 말을 기억하고 있었다.

습근평은 조가하에서 8개월간 머물렀다. 사회주의교양사업이 끝나던 무렵, 풍가평 공사 당위서기 조정벽은 습근평을 남기려고 했다. 그후 문안역 공사 당위서기 백광흥은 “우리는 이렇게 훌륭한 인재를 보내주지 않을것”이라고 말했다.

이때로부터 습근평의 정치 상공에 한갈래의 빛이 들었다. 바로 1972년 겨울, 습근평이 공청단에 가입하게 된것이다.

습근평에게 있어서 공청단 가입은 로동할때 산길을 걷는것과 마찬가지로 우여곡절이 많은 과정이였다.

량가하촌 

북경을 멀리 떠난 량가하에서도 습근평에게는 보이지는 않지만 항상 “반동 자녀”라는 모자가 짙누르고 있었다.

습근평의 부친 습중훈은 우리 당과 우리 군의 탁월한 정치사업 지도자이고 섬감변 혁명 근거지의 주요 창시자와 지도자의 한사람이다. 오래전 습중훈과 류지단 등 전우들은 섬감변 혁명근거지를 세우고 그후 섬북 혁명근거지와 련결하여 서북 혁명근거지를 형성해 장정을 하고 있는 홍군에 소중한 진지로 되여주었다. 모택동은 습중훈을 수차 치하하면서, 습중훈을 “당의 리익을 첫자리에 두는 사람”, “군중속에서 걸어나온 군중의 령수”,“살아있는 맑스주의자”라고 평가했다.

1962년 9월, 습중훈은 이른바의 “류지단 소설 반당문제”로 강생에 의해 “소설을 리용해 당을 반대한다”는 루명을 쓰고 조사를 받았다. “문화대혁명”이 시작해서도 잔혹하게 박해를 받았으며 심사와 수감, “감호”를 받은 세월만 해도 16년이 넘는다. 습근평이 지식청년으로 내려가 있을 때도 섬북에서는 그의 부친에 대한 비판을 계속하고 있었다. 그때 습근평은 부친 습중훈을 비판하는 신문을 사람들앞에서 읽어야 했다.

그 시절, “반동 자녀”라는 모자는 한 사람을 무자비하게 억누르고도 남음이 있었다. “반동 자녀”에게 있어서 모든 문은 닫겨있었다. 일자리를 찾고 학교에 입학하며 군에 입대하고 공청단, 공산당에 가입하는것은 “반동 자녀”들과는 모두 관계없는 일로 간주되였던 시절이였다. 비록 량가하에서 이 “모자”가 “교육으로 개조될수 있는 자녀”로 바뀌였음에도 일련의 일들이 있었다.

입단 신청서를 쓴후 습근평은 대대 지부서기를 숙소로 청했다. 두 사람이 계란볶음과 만두를 먹은후, 습근평은 입단 신청서를 상급에 전달했는지를 물었다.

대대 지부서기는 “상급에서 말하기를 자네는 교육으로 개조될수 있는 자녀라고 하는데 어떻게 신청서를 전달하냐”고 반문했다. 대대 지부서기는 상급에 습근평의 입단 문제를 교류한적이 있었다.

이에 습근평은 “교육으로 개조될수 있는 자녀라는 말은 뭔 뜻이지요?”라고 물었다.

대대 지부서기는 “상급에서 자네가 부친과 계선을 나누지 않았다고 하던데”라고 대답했다.

이에 대해 습근평은, “결론이 어디에 있습니까? 한사람에게 무슨 문제가 있다면 결론이 나와야지요, 저의 부친에 대해서 어떤 결론이 내렸습니까? 중앙의 문건이라도 받아보았습니까?”라고 반문했다.

습근평의 말에 설득된 지부서기는 습근평의 입단 신청서를 상급에 올려보내겠다고 답복했다.

그후 얼마 지나지 않아 습근평은 결과를 알게 되였다.

공사에서 돌아온 대대 지부서기는 공사 서기로부터 비평을 받고 돌아왔다며, 이런 사람의 입단 신청서를 감히 올리냐는 말을 듣고 왔다고 말했다.

습근평은 “나는 무슨 사람이고 내가 무슨 일을 저질렀는지, 내가 반동 표어를 쓰고 반동 구호라도 불렀는지, 그리고 나는 진보하려는 청년인데 여기에 뭐가 틀렸냐”고 반문했다.

이렇게 습근평은 입단 신청서를 계속 써내려갔다. 두부, 세부...그는 도합 여덟부의 입단 신청서를 썼다. 습근평은 자신의 부친은 좋은 사람이고 자신 역시 좋은 사람이라는것을 확신하고 있었다. 습근평은 “나는 그때 슬퍼하거나 혹은 자비감을 느껴본적이 없습니다. 공산당 내부와 공청단 내부에 좋은 사람이 더 많아져야 나쁜 사람들이 적어진다고 생각했습니다.”라고 말했다.

어느날 공사 공청단위원회 간부 류명승이 습근평을 찾아와 이야기를 나눈후 습근평의 손을 들어주기로 했다. 여덟번째로 쓴 입단 신청서가 상급에 전달되여 끝내 비준을 받아 습근평은 공청단원으로 되였다.

이렇게 지식청년시절의 생활은 줄곧 평온하지만은 않았다. 습근평이 공청단에 가입할것을 신청할때에도 습근평을 무함하는 “검은 자료”가 량가하에 도착했다. 공사 지식청년 판공실 주임이 된 류명승은, 이 자료들은 습근평을 모함하는 자료라고 판단하고 습근평의 앞에서 태워버렸다.

1973년 8월 량옥명은 습근평에게 공산당에 가입하고 싶은지를 물었다. 공청단 가입에서 어려움을 겪었던 습근평은 “공산당 가입은 어려울것 같다”고 말했다. 량옥명은 “자네가 진보를 요구하지 않으면 어떻게 당원으로 발전시킬수 있겠소?”하면서 그의 뜻을 물었다.

그후 량옥명은 습근평의 입당 소개인이 되였다. 량옥명이 습근평의 입당 신청서를 공사에 바친후 그 역시 비평을 받았다.

“당신은 담도 참 크오, 어떻게 감히 ‘검은 다섯가지 종류의 사람’을 소개하다니.” 공사의 한 부서기는 신청서를 보자마자 이렇게 말했다.

량옥명은 “상급의 정책 문건에서 부모 세대에 문제가 있다해도 그 자녀에게는 영향을 주지 말라고 말했소. 관건은 지금 표현이 좋으면 되는거라고 생각하오. 비준하는 일은 당신의 일이지만 나는 그를 책임질거요.”라고 말했다.

량가하에 돌아온 량옥명은 “그들이 비준하든 말든 두려워 할 필요가 없다며 자네는 반드시 진보해야 한다”고 말했다.

습근평이 살았던 토굴집 

습근평은 또 한번 필을 꺼내들고 입당 신청서를 한부, 한부 써나갔다. 그렇게 10부를 쓴후에야 비준을 받을수 있었다.

사실 습근평이 공산당에 가입할수 있었던것은 그가 부단히 신청서를 쓴것도 있지만 다른 원인도 있었다.

연천현 당위원회 신역 서기는 섬감변 혁명근거지 홍군의 후대로서 실무적이고 견식이 넓으며 감당력이 있는 간부였다. 그는 문화가 있고 사상이 있는 지식청년들은 지방 간부들보다 안목이 넓다고 생각하고 선후하여 도해조, 채옥주, 형맹란, 맹하, 손립철과 같은 지식청년들을 등용했다. 북경에서 온 지식청년중에서 많은 사람들의 부모세대가 연안에서 사업했거나 학습한적이 있었다. 신역 서기는 이들을 섬북의 자녀들로 간주했다.

당시 습근평은 조가하에서의 사회주의 교양사업을 방금 마치고 량가하에서 사회주의 교양사업을 시작했던 무렵이였다. 량가하에는 성씨가 복잡하고 종친간의 모순이 첨예했다. 대대 지도부를 조절하는것은 량가하에서 사회주의 교양사업을 펼치는 선차적인 과제였다. 농촌에서 대대 1급 인솔자는 반드시 능력이 있고 모든 촌민을 평등하게 대하는 흉금을 가져야 했다. 그때 마을 사람들이 생각한 적임자가 바로 습근평이였다. 지식청년인 습근평은 마을 사람들과 가족관계가 없고, 또 성품이 온화하고 마을과 공사에서 모두 좋은 평판을 가지고 있었다. 량가하의 사회주의 교양사업 실무팀은 통일적인 방안을 내오고 습근평이 량가하 대대 당지부서기를 맡도록 제의하고 상급 당위원회에 보고했다. 실무팀의 회보를 청취한 신역 서기는 습근평은 능력이 있고 사원의 옹호를 받으며 또 당조직에 접근하면서 수차 신청서를 바쳤다며 그를 반드시 지지해야 한다고 말했다.

그렇게 되여 1974년 1월 10일, 공사 당위원회에서는 습근평의 입당신청을 비준하고 그를 공산당원으로 접수했다. 그후 량가하 대대에서는 습근평을 당지부서기로 임명하고 전 당지부서기 량옥명은 대대 혁명위원회 주임과 당지부 부서기를 맡도록 했다.  

습근평은 드디여 정치생활에서의 서광을 맞이했다.

당시의 연안은 줄곧 빈곤에서 해탈되지 못하고 있었다. 1973년 6월 9일, 주은래 총리는 윁남 당정 대표단과 함께 연안을 참관 방문했다. 연안 행정공서 담당자 토금장은, 당시 연안의 적지 않은 사람들이 배를 곯고 한집의 다섯 식구가 이불 한채를 덥고 잔다는 말을 들은 주은래 총리는 “왜 이렇게 곤난한가”고 반문했다고 말했다. 그때 주총리는 한 상 차려진 술좌석에서 좁쌀 밥 한그릇만 먹었다. 주총리는 자신이 “총리역할을 잘하지 못해서 연안 인민들의 생활이 어렵다”고 하면서 눈시울을 붉혔다.

연안지역에는 당시 14개 현에 130만명의 인구를 가지고 있었다. 한사람에게 배당되는 식량은 250킬로그람이 되지 않고 일인당 소득은 50원에도 못미쳤다. 솥에는 식량이 없고 주머니에는 돈이 없는 상황이 대다수 농민들의 가난을 반영하는 진실한 모습이였다.

주총리는 연안지구 당위원회와 행정공서에 “연안이 3년내에 면모를 바꾸고 5년내에 식량 배당량을 배로 늘여야 한다”는 요구를 제기하고 연안이 잘 건설된 후에 한번 다시 찾겠다고 말했다.

주총리의 요구가 각계에 알려지자 연안 사람들은 적극 호응해나섰다. 지식청년들도 일떠섰고 간부로 등용되였던 지식청년들도 농촌에 돌아가 식량 생산에 힘다하겠다고 각오를 밝혔다.

사실 그때의 습근평 역시 량가하의 식량 증산 계획을 자세히 검토하고 있었다.

그가 대대 당지부서기로 당선된후 마을 사람들을 탄복하게 하는 계획이 실시되였다. 바로 량가하 골안에 댐을 건설하는것이였다.

그 계획은 산골짜기에 두갈래의 대들보를 세우고 물이 산세를 따라 내려오면서 모여지는 흙으로 산밑에 댐을 건설하는 신 기술이였다. 댐이 세워지면 량가하의 산골짜기 일대에 고산전이 형성되여 량가하 사람들이 더는 배를 곯지 않을것이라는 구상에서 출발한것이다.

이와 같은 아름다운 동경은 그를 부단히 격려했다. 습근평은 계획을 발표하고 집집마다 돌아다니며 구체적인 구상을 해석해주었다.

마을 사람들은 “근평이 우리 마을에 큰 댐을 수건해 식량 생산량을 늘이는것은 좋은 일이지만, 해마다 우기가 되면 산사태가 심하여 댐을 무너뜨릴수도 있다”고 우려했다.

촌민들의 우려에 도리가 없는것은 아니였다. 장마철이면 량가하 골짜기에 해마다 거대한 배수구가 생기고 삼림피복이 없는 상황에서 산사태가 일어날 위험이 있었다. 산사태가 일어날때마다 진흙이 골짜기로 흘러내려 배수구를 충격하는 경우가 나타날수 있기 때문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