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지오 기록문학 <량가하> 제10부
래원:중앙인민방송국      2018-07-11 13:45:00

라지오 기록문학 “량가하”는 습근평 총서기가 량가하에서 지냈던 지식청년 시절 생활을 생동하게 보여주고 수십년 사이 량가하에서 일어난 거대한 변화를 기록하였다.      

라지오 기록문학 <량가하>는 당 19차대회 정신을 학습, 관철하고 습근평의 새시대 중국특색의 사회주의 사상을 선전하는 좋은 교재이자 초심을 잃지 않고 사명을 명기하는 당원들의 학습교양활동을 깊이 전개하는 중요한 도서이기도 하다. 

지식청년 시절 습근평은 도처로 책을 찾아다녔다. 그러다가 농촌 학교에서 교편을 잡던 몇몇 교원들로부터 좋은 책들을 발견하게 되였다. “붉은것과 검은것”, “전쟁과 평화”그리고 청나라, 명나라 시기의 교본을 얻을수가 있었다. 또 마을의 설옥빈이 군 복무를 마치고 귀향하면서 “림해설원”, “옛성에 휘몰아치는 불길”과 같은 명작을 가져다주었다. 습근평은 이런 책들을 모두 빌려다가 열독했다. 당시 연천에서 발행되던 “산 꽃”이라는 문학지 역시 습근평이 애독하던 잡지였다.  “산 꽃”을 통해 습근평은 후날 유명 작가로 성장한 로요를 만나게 되였고, 둘은 밤을 새며 문학을 담론했던 적이 있다. 로요는 후날, 네살 어린 습근평의 지식의 폭과 높은 지향을 극찬했다.

습근평은 “당시 빌릴수 있었던 문학 고전 명작은 모두 읽었다며, 지금 즉석에서 나오는 력사적인 전고는 그때 책을 읽으면서 습득한것”이라고 말했다.

2014년 3월 28일, 습근평은 독일 콜베 기금회의 요청으로 베를린에서 발표한 강연에서 중국의 평화발전의 길과 독립자주의 평화외교정책을 소개했다. 강연에서 습근평은 괴테의“파우스트”에서 나오는 인물 메피스토펠레스로 서방사회의 “중국 위협론”에 반론했다.

“파우스트”는 엥겔스로부터 “천재 시인”으로 불리우던 괴테가 로년에 창작한 가장 성공적인 문학 거작으로서 인류의 진취정신을 구가하는 대표적인 작품이다. 명작 “파우스트”는 16세기 독일 마법사 파우스트가 마귀에게 령혼을 파는 대가로 지식과 청춘을 바꾸는 전설에서 비롯된것이다. 마귀는 파우스트를 마법으로 끌어들일 자신이 있다고 신에게 말한다. 마귀는 파우스트의 시종이 되기로 하고 반백이 넘은 파우스트와 새로운 인생을 시작한다. 파우스트가 만족을 느끼는 한, 령혼은 파우스트의 몫으로 되돌려진다. 여기에서 등장하는 마귀가 바로 메피스토펠레스이다.

당시 강연에서 습근평은 이렇게 말했다. “개혁개방의 30여년의 쾌속적인 발전을 거쳐 중국의 경제총량은 세계 2위에 올라섰습니다. 중국의 경제성장에 대해 어떤 사람들은 우려하기 시작했고 또 일부 사람들은 색안경을 끼고 중국을 바라보기 시작했습니다. 마치 중국의 발전을 ‘위협’이라고 억측하기도 했다. 심지어 중국을 무시무시한 ‘메피스토펠레스’라고 묘사하면서 어느날 중국이 세계의 령혼을 모두 독차지하듯이 말하는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더 유감스러운것은 어떤 사람들은 이러한 억지의 생각에 상상의 나래까지 펼치기도 했습니다. 이는 편견이 쉽게 가셔지지 않는다는 진리를 재차 증명해줍니다.” 

그 시절 습근평은 쉑스피어의 작품 “한 여름밤의 꿈”,”베니스 상인”,”십이야”, “로미오와 쥴리엣”,”햄릿”, “오쎌로”, “리어왕”, “맥베스”와 같은 극본을 읽었다. 습근평은 파란만장한 이야기 줄거리와 생동감이 넘쳐흐르는 인물에 깊이 매료되였다.

습근평은, 좋은 문예작품은 사람들에게 계발을 가져다줄뿐만아니라 부동한 나라와 민족이 서로를 알고 소통해나가는 방식이라고 생각했다. 습근평에게 있어서 독서는 생활방식일뿐만아니라 부단히 성장하고 자신의 정신세계를 풍요롭게 하는 과정이기도 했다.

량가하에 와서 2,3년후 습근평은 연천 방언을 류창하게 할수 있었다. 2009년 11월, 그가 연안을 시찰할때도 류창한 연천 방언을 했다. 식사할때 습근평은 배석한 섬서성 당위원회 조락제 서기에게 연천 토배기 말로 만두를 “메메”라고 한다고 말했다.

습근평은 량가하의 산이며 골짜기며, 마을의 모든 농가를 머리에 새겨두었다. 2015년 2월 13일, 40년만에 다시 만난 마을 사람들을 그는 보자마자 알아보고 이름과 아명을 척척 불렀다.  

습근평은 또 량가하의 향토 음식도 잘 기억하고 있었다. 그날 점심 그는 팽려원과 석춘양, 려후생, 장위방, 량옥명, 왕헌평과 나란히 앉아 량가하의 “향토 음식”을 먹었다. 습근평은 팽려원에게 반찬마다 무엇으로 만들고 어떤 특색을 가지고 있는지를 자세히 소개해주었다.

습근평은 지식청년 시절, 마을 사람들이 그의 숙소로 와서 구들에 걸터 앉아 이야기를 나눌때, 그들이 이부자리와 베개를 더럽히지 않을가, 혹시 벼룩이나 이를 옮겨오지 않을가 하는 걱정을 전혀 하지 않았다. 

석춘양은 “근평이는 우리 농촌사람들과 마찬가지로 이의 독소에 대한 저항력이 생겼다”고 말했다. 

땅을 일구고 분변을 메나르며 식량을 수확하고 운반하는 일을 습근평은 촌민들과 함께 했다. 간혹 모르는 부분이 있으면 촌민들에게 허심하게 물어보면서 일을 익혀나갔다.

습근평이 공량을 바치고  량곡 수매소에서 받은 수매 증명서 

습근평은“처음 농사일을 할때는 6점을 벌어 녀성들보다도 낮았지만 2년이 지난후에는 청장년 로력들이 버는 공수 10점을 벌었다”고 말했다. 밭에 거름을 낼때면 7,8십근 되는 거름을 단숨에 몇리밖의 산으로 메날랐고, 여름에 밀을 거둘때면 100근이 넘는 밀을 메고 10리 산길을 걸었다. 

장청원의 집에서 이사나온 습근평은 려후생의 토굴집에서 살았다. 그때 마을에서는 지식청년들을 위해 새 토굴집을 짓기 시작했다. 토굴집을 짓는 40여일간 습근평은 물을 나르고 흙을 반죽하고 벽을 바르는 도장 일을 맡았다. 새 토굴집이 완성된후 습근평은 왼쪽의 네번째 구역에 살았다. 지금 그곳은 지식청년원으로 불리운다.

습근평은 농가일을 모두 숙련되게 할수 있게 되였다. 그는 털실을 끼고, 옷이나 이불을 깁는 일을 손쉽게 해냈다. 습근평은 강한 생활 자립능력을 그때 련마했다고 말했다. 

습근평은 “가장 중요한것은 농민들의 실사구시 정신과 고생을 두려워하지 않는 정신을 따라배웠다”고 허심탄회하게 말했다. 

당시의 생활은 고난을 이겨내는 련마의 과정이였다.

벼룩이나 이가 많은 환경 그리고 그곳의 음식, 생활,

로동에 모두 적응하고 나아가 사상면에서도 새로운 높이에 이르렀다.

량가하는 습근평에게 “향토”의 학문을 가르쳐주고 습근평은 량가하에 새로운 학문을 전수했다.

량가하의 한 사원은 평소에 집체 로동에 참가하지 않고 게으름을 피우다가 좀도적질도 하는 나쁜 버릇이 있었다. 공사로부터 “단속 대상”으로 찍혔음에도 그는 교양을 받지 않고 있다가 대대에서 심은 파를 훔치다가 발각되였다. 당시의 관리방법대로 사원 대회를 열고 비판대회를 시작했다. 그 비판대회에 습근평과 뢰평생도 참가했다. 습근평은 그를 꾸지람하지 않고 먼저 도리를 하나하나 따지면서 그가 잘못을 인정하기까지 인내심있게 이야기를 해주었다. 그가 잘못을 인정하고 고개를 끄덕이자 습근평은 그럼 섬서 민요 “신천유”를 부르라고 했다. 습근평의 그 한마디에 회의장의 긴장하던 분위기는 모두 말끔하게 해소되였다.

마을 사람들로부터“단속 대상”으로 락인이 찍현던 그 사원은 “이후부터 나는 북경 젊은이들을 따라배울거요, 이젠 뭘 훔치는 일이 없을거요.”하면서 다짐했다. 습근평의 이와 같은 너그러운 일 처리 방법은 량가하 사람들에게 큰 계발을 가져다주었다. 마을 사람들은 “그래도 북경 젊은이들이 대단하다”고 엄지손가락을 내들었다. 매사에 게으름만 피우던 “단속 대상”은 그후로부터 마을의 로동에 적극 참가하는 훌륭한 사원으로 전변했다. 습근평은, “그는 작은 잘못을 저질렀을뿐이고 만약 잘 개조한다면 여전히 단결할수 있는 사람이 된다며 우선 교양이 중요하다”고 말했다.

사람을 존중하고 타인을 도와주며, 사람들을 단합시키는 습근평의 일 처리 방법에 량옥명은 탄복을 금치 못했다. 그후 어려운 일에 봉착할때마다 량옥명은 습근평을 찾아가 의논했다. 량옥명은 “이 청년은 견식이 넓고 나보다 아는것이 많다”고 말했다.
  점차 습근평이 주숙하고 있던 지역은 량가하촌의 중심으로 되였다. 사람들은 습근평의 집으로 찾아가 이야기를 나누고 싶어했고, 습근평으로부터 력사이야기, 바깥 세상의 이야기를 듣고 싶어했다. 이렇게 습근평은 명실상부하게 량가하의 일원으로 되였다.

1973년 초봄, 섬북의 대지가 아직 녹기 전에 습근평은 연천현에 가서 일하게 되였다. 그는 연천현 공청단 위원회 서기이며 북경 지식청년인 도해조와 한팀을 무어 풍가평 공사 조가하 대대에 가서 사회주의 교양사업에 참가했다.

조가하 사람들은 후날 “습근평이 조가하에 온후로 조가하는 새롭게 탈바꿈했다”고 말하면서 습근평이 조가하에서 사회주의 교양사업을 할때의 소중한 시절을 회억했다.

1973년, 습근평(왼쪽으로 두번째)과 북경 지식청년 뢰평생(왼쪽으로 첫번째),요해속(왼쪽으로 세번째), 뢰용생(왼쪽으로 네번째)이 연천에서 함께 찍은 사진 

조가하에서 우선 바뀐것은 회의를 하는 모식이였다. 

습근평이 오기 전 조가하에서도 사회주의 교양활동을 조직했지만 회의 할때 누구도 관심이 없었다. 강단에서 강연자가 자기 발언을 하고 밑에서는 녀성들이 뜨개질을 하면서 한담을 했다. 습근평이 조가하에 온후로부터는 촌민들이 모두 제 시간에 회의에 참가하고 회의 절차를 모두 준수했다. 조가하의 임후생은 “근평이의 말은 그렇게 구수했다”고 말했다.

습근평은 군중을 료해하고 군중의 생각을 잘 알았기때문에 항상 백성들이 관심을 가지고 즐겨 듣는 화제를 선정했다. 사회주의 교양사업에서 습근평은 풍습과 인문, 사회, 력사를 통합해서 알아듣기 쉬운 언어로 강의했다. 당시 마을에는 아무런 문화 오락생활이 없었다. 습근평이 “삼소”라는 영화 이야기를 재미있게 생동하게 들려주었고, 관건적인 부분에서는 “다음번 회의에서 계속 얘기드리겠습니다”라고 말해 객석의 호기심을 불러일으키기도 했다.

이 기간 조가하에서 쟁의가 많았던 사건은 신차골에 대한 관리 문제였다. 일부분 사원들은 댐을 쌓고 토지를 늘여 산출을 늘여야 한다고 주장했고, 어떤 사원들은 홍수가 져서 댐이 무너지면 로동이 수포로 돌아간다고 반대해나섰다.

습근평은 신차골 관리는 현지 군중들에게 유익한 일이라고 생각했다. 땅이 아직 얼어있었지만 더 미루어서는 안되였다. 그는 즉각 사원 동원 대회를 열고 “반드시 해야 한다”고 선포한후에 그 이튿날부터 공정 관리에 착수했다. 습근평은 “솥에 먹을것이 있으면 밥그릇에도 있을것이고, 솥이 비면 밥그릇도 빈것”이 될것이라고 말했다. 이는 당시의 정치적 분위기에서는 일정한 모험을 띤 말이였다.

댐 건설에 착수한후 습근평은 일군들이 매일 점심마다 집으로 돌아가 밥을 먹고 또다시 산으로 돌아오려면 시간과 정력이 소모된다는 점을 발견했다. 습근평은 점심밥을 지어올려와 일군들이 산에서 밥을 먹으면서 일하고 잠간 휴식을 취하는 방안을 모색해 로동효률을 높였다.

이렇게 습근평은 아침 6시부터 저녁 늦게까지 마을 사람들과 함께 로동했다. 마을 사람들은 “근평이는 대도시에서 왔지만 고생을 이겨내고 일도 잘한다”고 극찬했다.

석달도 안되여 신차골의 댐이 완성되여 조가하에는 근 백무의 고산전이 늘어났다. 그해 마을 사람들은 신차골에 옥수수를 심었다.

이듬해 봄 연천현 공청단 위원회 도해조 서기는 각 공사 공청단 위원회 서기들을 조직하여 조가하에 가서 참관하고 학습하도록 했다. 올때 이들은 백양나무 묘목을 가져와 신차골 주위에 심었다.

40여년이 지난 지금 그 백양나무들은 아름드리 나무로 성장했다. 마을 사람들은 백양나무 수림을 “지식청년 림”이라고 부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