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지오 기록문학 <량가하> 제9부
래원:중앙인민방송국      2018-07-10 16:06:00

라지오 기록문학 “량가하”는 습근평 총서기가 량가하에서 지냈던 지식청년 시절 생활을 생동하게 보여주고 수십년 사이 량가하에서 일어난 거대한 변화를 기록하였다.    

라지오 기록문학 <량가하>는 당 19차대회 정신을 학습, 관철하고 습근평의 새시대 중국특색의 사회주의 사상을 선전하는 좋은 교재이자 초심을 잃지 않고 사명을 명기하는 당원들의 학습교양활동을 깊이 전개하는 중요한 도서이기도 하다.  

 

량가하에서 습근평이 가장 많이 했던것은 뚝을 쌓는 일이였다. 촌에는 농사일이 서툰 젊은이들을 모아놓고  20여명이 되는 기본건설대를 설립하여 전문적으로 뚝을 쌓고 제전을 개간하게 했다.

뚝을 쌓고 제전을 개간하는 풍속은 황하 맞은 편에 있는 대채촌에서 전해온것이다. 량가화와 똑같이 가물고 경작지가 적은 대채촌은 뚝을 쌓고 제전을 개간한후부터 식량생산량이 7배나 늘었다. “계급투쟁”, “농업학 대채”, “공업학 대경”은 당시 가장 류행하던 구호였다.

뚝은 작은 산골짜기에서 구간을 나누어 가로 쌓아야 한다. 이렇게 쌓은 뚝은 폭우가 내린후에 홍수를 막을수 있으며 진 흙은 침적되여 밭으로 될수 있다. 제전을 개간하려면 산을 세로 깍아서 하나 또 하나의 계단식 밭을 만들어야 한다. 량가하에서 이러한 농사일들은 추수가 끝난후 9월부터 이듬해 2월, 3월까지 계속된다.

뚝과 제전에는 굶주림에서 벗어나려는 촌민들의 기대가 걸려있었다. 섬서 북부는 산이 많고 평지가 적으며 가물다. 뚝과 제전을 만들면 밭 면적을 증가할수 있을뿐만 아니라 토지 습도를 보존하고 식량 생산량을 늘릴수 있다. 농업과학기술이 락후한 섬서 북부에서 뚝과 제전은 사람들이 생각할수 있는 유일한 생산량 증가방법이였다.

지식청년들은 이같은 수치를 알고 있었다. 산동성과 하북성에서 무당 벼 생산량은 수백근에 달하지만 연천일대는 70근 좌우밖에 되지 않았다. 70근은 간단한 재생산과정도 유지하기 힘들어 배부름과 재생산확대는 상상할 엄두도 내지 못하는 일이였다.

수년후 연천현 관장공사의 하향 지식청년은 다음과 같은 글을 썼다. 로동에서 가장 힘든 점은 끝이 없고 효과가 없는것이다. 땅은 심을수록 얇아지고 생존환경은 점점 렬악해지고 있다. 옷에 헝겊은 늘어나기만 하고 상자는 비여가고만 있다...

하지만 뚝을 쌓고 경작지를 만드는것은 생산량증가에 현실적인 해결방안을 제공해주었다.

당시 농촌에는 대형기계가 없어서 촌민들은 인력으로 흙을 쌓고 무거운 돌을 들어서 푹신푹신한 흙을 단단하게 다졌다. 강도가 아주 큰 체력로동이였다.

“한 사람 하루에 2백차씩 날랐다.” 촌민들은 8개 차를 날라야 한방의 흙을 나를수 있었다고 한다. 옛날에는 로동보호조치가 없었다. 습근평은 장갑도 없이 맨손으로 나무 달구를 들고 흙을 다졌다. 하루종일 하다보면 손에는 온통 물집이였다. 이튿날에 일을 계속하면 물집이 터져서 피가 흘렀다. “일이 아무리 힘들어도 근평은 죽기살기로 했으며 종래로 잔꾀를 부리지 않았다”. 이는 촌민들이 습근평에 대한 평가이다.

공사 사원 량신영은 습근평이 기본건설팀에서 일하던 나날들을 회억했다. “그는 일을 정말로 열심히 했었지. 낡은 파란색 솜저고리를 입고 허리에는 도화선을 꿰고 하나도 선비의 틀이 없었습니다.”

뚝은 주로 한가한 겨울철에 쌓았는데 이는 가장 힘든 일이였다. 얼어붙은 흙을 폭발시키고나서 흙을 파고 나르고 다지고 하는 과정은 아주 간고했다. 습근평의 손에는 굳은 살이 생겼다. 공사 사원 량유창은 아직도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다. 음력 2,3월 섬북의 얼음이 금방 녹기 시작할때 습근평은 채자구에서 바지를 걷어올리고 맨발바람에 뼈속까지 시린 얼음물속에 뚝을 쌓았다.

가장 바쁠때 촌민들은 새벽부터 저녁까지 일을 해야 했다.

촌민들은 힘을 몰붓는 습근평을 향해 잇따라 엄지를 내밀었다. “좋은 후배일세.”

량가하 대대 당지부서기를 담임하기전까지 습근평은 촌민들과 함께 량가하에서 4개 뚝을 쌓았다. 전직 1대 대장인 석옥흥은 1969년 량가하 무당 옥수수 생산량은 4백근이였는데 뚝을 쌓은후 8백근까지 제고됐다고 말했다.

청년시절의 습근평

습근평은 한편으로 농민으로 살고 한편으로는 책속에서 정신적 자양분을 섭취하였다. “로동을 제외하고 그때는 군중과 어울리거나 책을 찾아서 보는수밖에 없었습니다.” 습근평은 이같이 말했다. “우리 세대는 어릴적부터 훌륭한 품행과 덕성을 닦은 후에 집안을 다스리고  나라를 다스리며 천하를 평정하는 사상의 영향을 받았다. 산에 오르고 하향할때 나는 15살이였다. 그때는 집안과 나라, 천하를 다스리는것은 먼 후날의 일이고 먼저 독서와 심신을 닦는것을 해야 되겠다고 생각했다”.

량가하 사람들의 기억속에 습근평은 벽돌처럼 두꺼운 책을 들고 다니면서 밥먹을때나 양을 방목할때나 상관없이 항상 들고 열독했었다.

그때 전기가 통하지 않아서 날이 어두워지면 량가하 사람들은 일찍이 잠을 잤지만 습근평의 토굴집은 항상 불이 밝혀있었다. 이 미약한 불빛이 습근평에게 어떠한 광명을 가져다줄지 그 아무도 몰랐다.

습근평은 늘 깊은 밤까지 담배를 피우면서 책을 봤는데 9전에 한곽인 “양군”표 담배는 저녁내내 피울수 있었다. 그후 량옥명이 복건에서 습근평을 만날때 습근평은 이미 담배를 끊었다.

습근평이 책 볼때 쓰는 등잔은 스스로 만든 남포등이였다. 빈 잉크병에 등유를 붓고 중간에 구멍낸 쇠조각을 병 입구에 붙이고 심지로 쓰는 굵은 무명실을 꿰면 남포등이 완성된다. 심지는 너무 굵어서는 안되고 가늘게 해야 기름을 적게 먹는다.

남포등에서는 연기가 많이 났다. 습근평은 가까이서 책을 보았는데 얼굴이 자주 까맣게 그을어졌고 이튿날 아침 가래까지 까맣게 됐다.

습근평의 손에 쥔 “벽돌처럼 두꺼운 책”들은 고대와 현대, 중국과 외국, 문학과 철학, 자연과학...등 각종 장르를 망라했다. 무휘는 습근평에게서 “십만가지 물음”, “삼국연의”, “수호전”, “강철은 어떻게 단련되였는가”, “고요한 돈하”, “어머니” 등 책들을 빌렸었다.

연천현에 하향한 북경 지식청년들은 북경의 십여개 학교에서 왔다. 그중에는 청화대학 부속중학교, 오십칠중 등 엘리트 가정의 학생들이 있었는데 그들은 모두 책을 메고 연천으로 왔다. 청년들은 책을 나누며 읽으면서 나중에 연천현에서는 책을 즐겨읽는 분위기가 형성됐다.

몇년후 연천현 관장공사에 하향한 리자장은 지식청년의 독서생활을 다음과 같이 묘사했다. 배가 고플수록 학문에 대한 갈증은 더 심해갔다. 문화가 박약한 곳에서 문화는 오히려 활기를 띤다. 생계를 이어가기 힘든 곳일수록, 특히는 리상과 현실이 충돌이 일어날때 사람들은 자신과 사회를 련계시키려고 한다. 때문에 많은 지식청년들의 사회에 대한 희망은 “전쟁”이 아니면 “혁명”이였다. 전쟁과 혁명은 현실생활에서 벗어나게 할수 있는 사회적충돌이다.

하지만 습근평은 이같이 생각하지 않았다. 그의 독서목적은 지식을 추구하는것이였다. 습근평은 지식이 부족하면 수치스럽다고 하면서 자신에게 요구했다. “학습시사지” 인터뷰를 받은 자리에서 대명은 이같이 말했다. “저와 근평은 모두 범문란 선생님의 저서 ‘중국 통사 간편’을 읽었는데 책이름은 비록 ‘간편’이지만 사실은 두터운 네권이였습니다. 저와 근평은 이 책을 처음부터 끝까지 읽었습니다. 저는 력사를 더욱 료해하고 지식을 충족시켰는데 근평은 책을 읽으면서 사고하고, 귀감으로 삼으며 비판적인 시각으로 보기도 했다.”

습근평은 “책벌레”이다. 북경 오십칠중의 한 학생은 그가 “파우스트”를 읽기 위해 30리 길을 걷어 그에게 빌리러 온적이 있다고 말했다. 책 빌릴때 습근평은 “나한테 빌려주면 보고 꼭 돌려준다”고 말했다고 한다.

하지만 습근평은 책에서 차마 손을 떼지 못할 정도로 책을 좋아했다. 습근평은 “파우스트”에 대한 애착을 털어놓았다. “그후 책을 빌려준 학생은 기다리다 못해 장마당에서 책을 돌려주라고 사람들에게 말을 전하라고 했는데 그래도 마음이 놓이지 않아서 30리 길을 걸어왔을때 책을 돌려줬습니다.”

습근평은 또 많은 로씨야 작품을 읽었다.

“우리 세대는 로씨야 저작의 영향을 많이 받았습니다. 뿌쉬낀의 사랑시 ‘예프게니 오네킨”을 읽었고 그후 오데사에 가서 시인이 남긴 유적을 참관했습니다. 나는 또 ‘당대영웅’이라는 레르몬토브의 작품을 좋아했습니다. 영웅이라고 하면 그 누가 영웅일까, 매 시대마다 영웅이 있는 법입니다. 옛날 량가하 산골짜기에서 이 책을 읽었는데 감명이 아주 깊었습니다. 도스또예브스키는 사상이 가장 깊은 로씨야 작가이고 똘스또이는 폭이 가장 넓은 작가입니다. 두 작가중 나는 똘스또이를 더 좋아했습니다. 똘스또이의 3부 대표작에서 ‘전쟁과 평화’를 가장 좋아하는데 ‘부활’은 사람들로 하여금 심리적으로 반성하게 하는 작품입니다. 나는 또 숄로호브 작가도 좋아했는데 ‘고요한 돈하’라는 작품은 큰 시대의 변혁과 인성을 잘 그려냈습니다.”

로씨야 작품에 대한 습근평의 추억은 이뿐이 아니다.

“체르니세브스키는 민주주의 혁명가입니다. 그의 작품은 우리를 많이 깨우쳐주었습니다. 그의 장편소설 ‘어떻게’는 내가 량가하 토굴집에서 읽은 작품인데 나에게 큰 충격을 가져다주었습니다. 책속의 주인공 라흐메또브는 고행승과 같이 생활했습니다. 그는 의지력을 키우기 위해 못을 거꾸로 박은 침대에서 잤는데 온몸에 피가 났습니다. 우리는 의지력을 키우려면 이렇게까지 해야 하는가 해서 담요를 치우고 맨구들에서 잤습니다. 비나 눈이 오면 우리는 밖에 나가서 데굴데굴 굴렀고 비가 오면 비를 맞고 눈이 오면 눈을 비볐습니다. 우리는 또 우물가에서 찬물로 씼기도 했는데 모두 이 책의 영향을 받은것입니다.”

“로씨야에는 또 예술가들이 많습니다. 음악가는 차이꼽스끼가 있고 화가로는 레빈이 있다. 나는 왜 레빈에 대해서 인상이 깊었냐면 그때 농촌에서 미술잡지들을 발견했는데 아주 소중한 자료였습니다. 나는 한권씩 다 봤었는데 그중 레빈의 ‘뜻밖의 복귀’라는 유화작품을 전문으로 소개하는 글을 읽었습니다. 그 작품은 추방당한 혁명자들이 돌연적으로 집에 돌아온 광경을 그렸는데 나에게 깊은 인상을 남겨주었습니다. 소개글도 잘 썼습니다.”

2013년3월, 습근평은 “브릭스 국가” 매체의 합동취재를 받은 자리에서 취미가 많지만 독서가 가장 큰 취미라고 말했다. 습근평에게 있어서 독서는 이미 생활습관으로 되였다.

2014년2월, 습근평이 소치에서 로씨야 텔레비죤방송국의 인터뷰를 받은 자리에서 사회자는 읽어본 로씨야작품에 대해서 질문했다. 습근평은 뿌쉬낀, 레르몬토브, 도스또예브스키 등 많은 작가의 이름과 작품을 이야기했다. 습근평이 로씨야 작품을 속속들이 알고 있는것을 보고 사회자는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우리 로씨야인들도 이렇게 많이 본적이 없습니다.”

사실 습근평은 어릴적부터 줄곧 독서습관을 유지해왔다. 독서습관의 시작은 동화책이였다. 습근평이 대여섯살일때, 그의 어머니 제심은 그를 데리고 “악비전” 한세트와 “악비 자자” 한권을 구매했다. 제심은 동화책을 들고 그에게 “충성 보국”, “악비 자자” 등 이야기를 해줬다. 습근평은 아직도 모자간의 대화를 기억하고 있었다.

“글을 몸에 새기면 얼마나 아플까요!”

“아프지만 마음속 깊이 기억할수 있잖아.”

습근평은 “충성보국”이라는 네 글자를 기억해두었으며 이를 한평생 추구하는 목표로 간주했다.

“문화대혁명”시기 습근평은 어머니를 따라 중앙당학교에 이사갔다. 거기서 습근평은 어렵게 독서기회를 얻게 됐다. 요구에 따라 중앙당학교내의 모든 책은 과학회당에 집중했다. 습근평과 면목이 있었던 직원은  습근평더러 책을 나르라고 했다. 책을 옮길때 습근평은 그중 몇권을 남겼다. 명나라 문학가 풍몽룡이 편찬한 “유세명언”, “경세통언”, “성세항언”은 습근평이 가장 좋아하는 작품이며 작품의 일부 구절을 지금도 외울수 있다.
 

농촌사회는 순박한 사회이다. 농촌의 도덕평가기준 또한 간단명료하다. 어려움을 견뎌낼수 있고 잔꾀를 부리지 않으며 착실한 사람은 촌민들의 존중을 받을수 있다. 촌민들이 보기에는 고생을 견뎌낼수 있는것은 앞으로 좋은 생활을 누릴수 있는것을 의미하며 잔꾀를 부리지 않은것은 믿음직한 표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