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통(疏通)과 소통(沟通)
래원:중앙인민방송국      2018-03-28 09:47:00

‘돼지고기 파는 매대에서 본 것 같습네다’

필자의 연길 입성은 2000년대 문턱에 금방 걸터앉는 무렵이였다. 연길에 집도 없어서 어깨힘이 풀려 후줄근한 꼴로 그냥 량수에서 뻐스나 기차를 리용하여 신문사로 통근하였다. 뻐스를 타면 곧장 량수로 통하고 기차에 앉 으면 도문에서 다시 뻐스로 갈아타야 하는 번거로움이 있어 웬만해서는 기차 를 피했지만 때론 부득이한 사정으로 뻐스를 놓쳐 기차를 리용할 때도 있었 다. 기차란 씩씩거리는 둔중한 운수도구인데도 내부시설은 인성화로 꾸며져 있어 얼굴을 모르는 초면 사이라도 같은 려객이라는 동질성으로 서로 급속하 게 가까이 다가갈 수도 있었는데 그것은 려객들이 마주앉아 얼굴을 마주보게 만든 기차의 물리적인 좌석장치가 주되는 요인인 것 같다. 기차에서 친해져서 결혼에 골인했다는 일화가 있는 걸로 미루어보면 필자의 말이 과장은 아닐 게 다. 그 ‘친하다’ 함은 소통(疏通)에서 시작된다. 그날 연길에서 대부분 려객들을 부리운 기차는 홀가분하게 도문으로 내려갔는데 거기에서 첫눈에도 령세(보 따리)장사군인 듯한 얼굴에 피곤기가 가득 매달린 50대 아주머니와 마주앉게 되였다. 짐작한 대로 아주머니는 료녕성 해성시 서류진으로 가서 눅거리옷 을 도매해오는 길이였고 필자도 정부기관에서 사업할 때 촌장, 서기들을 이끌 고 서류진으로 두번 가본 적이 있어 급속하게 공동화제를 찾을 수 있었다. 료 동반도의 급속한 경제발전으로부터 시작된 대화내용은 종횡으로 질서가 없 어도 소통(疏通)이 유연했다. 하지만 대화 내내 아주머니의 눈길에서 나의 신 분을 혼돈하고 있음을 민감하게 감지했다. 이 사람을 어디서 본 듯한데 확실 하게 감을 잡지 못하겠다는 표정을 읽어냈던 것이다. 기실 그 아주머니에게는 내가 그저 수없이 스쳐지나는 길손처럼 자고 나면 잊어지는 시답지 않은 존재 일 수도 있었다. 도문에 도착할 무렵 아주머니를 도와 짐을 정리해주면서 혹 나를 본 적이 있는가, 내가 무슨 일을 하는 사람으로 보이느냐고 넌지시 물었 더니 나의 아래우를 다시 유심히 살펴보던 아주머니는 도문의 북시장 돼지고 기매대에서 돼지고기를 팔지 않느냐고 물었다. 아하… 그래서 이런 표정을 지 었구나. 그런 대로 소통(疏通)은 되였지만 진실이 부재해서 소통(沟通)은 안된 것이다. 난 그래도 그 당시 기자들이 사용하던 ‘기자가방’을 메고 있는 문화부 주임이여서 어디를 보나 돼지고기매대에 설 차림은 아닌 것 같았는데… 연변 방언으로 ‘돼지고기장시(장사군)’고 좋게 말하면 시장에서 돼지고기매대를 하 는 령세장사군이다. 옛 투를 빌면 백정 쯤으로 보인다는 말이다. 량반, 상놈의 계급계선이 있었던 조선시대에 백정, 갖바치, 광대들은 다 천민이였다는 점으 로 미루어보면 난 진짜 더 강등될 데가 없는 ‘막장천민’이 되여버린 셈이다. 조 선시대에 ‘막장천민’이라는 계급이 있었는지는 몰라도. 그 이야기를 후에 술상 에서 동료들에게 재미 삼아 이야기해주었더니 모두들 앙천대소했지만 믿기 어렵다는 표정을 지었다. 천민으로 보였든, 량반으로 보였든 아주머니의 인상 착의는 자유다. 그후 꽤 오래동안 도문 북시장에 나와 얼굴생김이 비슷한 ‘돼 지고기장시’가 있는가 착각했다. 그러다가 어떤 기관의 정문에서 불심검문에 걸려들면서 얼굴생김새가 비슷한 문제가 아니라 기질문제가 크게 작용했다 고 단정하기에 이르렀다. 나의 기질 어딘가에서 ‘돼지고기장시’와 비슷한 냄새 가 난다는 말이다. 좋게 말하면 옆집 아저씨고 시골말로 표현하면 ‘왕바신’(솜 신)을 신고 마을길을 오르락내리락했던 시골의 텁텁한 ‘아즈바이’와 매치가 되는 부분이 있다는 설명이다. 대대손손 시골에서 살아오면서 뼈속까지 스며들 었던 조상들의 농경의식과 그 피가 어디로 가겠는가.

내가 남에게 ‘돼지고기장시’로 보이는 건 타인에게 민페를 끼칠 것도 없으니 웃어주면 그것으로 끝나는 해프닝이다. 문제는 ‘돼지고기장시’가 불심검문과 련계된다는 것이다. 하얀 와이샤쯔거나 반반한 옷을 입은 손님들은 공무원으로 여겼는지 보는 체도 안하는데 꼭 나만이 잡히는 꼴이 된다. 직장동료의 뒤를 따 라서 들어가는데도 앞에 선 동료는 그대로 지나보내고 뒤에 선 나만 꼭 표적이 된다. 표적이 된다는 건 농경후예라는 기질과 ‘돼지고기장시’와 상관관계가 있 다. 격하게 질의하고 싶지만 어디에 질의를 해야 할지도 모른다. 그런 날이면 기 분이 대단히 음울해진다. 얼핏 생각하면 별로 큰일이 아니고 또 초면이여서 그 럴 수 있다고 생각할 수도 있고 소통(疏通)의 부재에서 비롯된 오해라고 좋게 여 길 수도 있다. 허지만 그렇게 생각하려 해도 어떤 시스템의 문제인 것 같아서 그 냥 지나칠 수 없다. 한마디로라도 구시렁거려야 글쟁이의 도리인 것 같다. 기관 의 정문에는 낯선 출입객들이라는 개념이 성립될 수 없고 ‘돼지고기장시’라고 거절당하거나 정리될 수도 없다. 기관의 모든 방문객들의 명함과 지위는 백성 들이다. 하기에 지위의 높고낮음을 따질 수 없다. 소통(疏通)은 정문에서부터 시 작된다고 보아야 한다. 군중로선이라는 것도 결국 소통인 것이다.

‘아즈바이’

관북사람들의 명칭이 혼란스럽다는 건 우리 민족들이 다 알고 있다. 한동 네에서 친척여하를 떠나 돌아가면서 ‘마다매(큰어머니)’, ‘마다바이(큰아버지)’라 고 호칭하는데 그중에서 가장 대표적인 명칭이 바로 ‘아즈바이’다. ‘돼지고기장 시’란 생계를 위해 매일 바삐 뛰여다니는 웃집의 텁텁한 ‘아즈바이’ 같다는 말이 다. 시골에서 ‘아즈바이’의 대명사는 겨울에는 투박한 ‘왕바신’(솜신)을 신고 산판 에서 나무를 찍거나 소발구로 통나무 이와실이를 하는 산판인부이고 여름에는 색이 바랜 낡은 런닝을 입고 손발이 새까맣게 타서 헉헉 기음을 매는 평범한 농민이며 현재는 한국의 3D현장에서 일당(日薪)을 뛰는 조선족 아저씨들이다. 어 린시절부터 필자는 음식상에서 부모들에게 구박과 설음을 너무 많이 받았다. 게다가 음식을 너무 급하게 먹어서 부모들한테 “누가 뒤에서 쫓냐?”는 핀잔을 심심찮게 들었다. 사회에 진출한 후 음식상에서 친구들은 내가 음식을 맛 있게 먹는다고 칭찬(?)했다. 오, 내가 그런가? 난 그때까지 뭔가를 모르고 있었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맛 있게 먹는다는 실생활언어 속에 숨은 암시와 코드 를 읽을 줄 몰랐고 사회적인 통념을 무시하고 있었다. 국가 대 국가 간에 외교 적인 암시와 코드가 있다면 우리들의 실생활에서도 아무리 가까운 친구 사이 라도 암시와 코드가 따로 있는 것이다. 결국 장가를 간 후 마누라에게서 실말 을 들었다. “바른말로 하면 당신은 맛 있게 먹는 게 아니라 허겁지겁 게걸스럽 게 먹슴다.” 음, 그게 그렇게 되는가? 과장을 보태 말하면 쇼크 직전에 이르렀 다. ‘맛 있게’는 외교적인 암시와 코드고 ‘게걸스레’는 진실이다. 그러니까 친구 들은 ‘게걸스럽다’는 진실과 소통(沟通)을 피하고 ‘맛 있게’라는 코드를 빌어 가 벼운 소통(疏通)으로 순화한 것이다. 음식상에 앉으면 조건반사로 두팔을 걷 어붙이고 허리띠를 느슨히 풀어놓고 허겁지겁 먹어대는 추습은 지금까지 한 점도 처지지 않고 진행형이다. 사실 부부지간처럼 소통이 잘되는 관계가 더 이상 없다. 안해는 남편한테 거짓말을 안했을 것이다. 소통(沟通)이란 진실해 야 비로소 가능한 것이다.

‘쎄쎄(谢谢)’

연길의 문학족들은 걸핏하면 커피점으로 가는데 필자는 아직도 ‘아즈바 이’수준이라 커피맛을 잘 모른다. 커피맛을 모른다는 게 목에 힘을 주고 자랑 해야 할 일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적성에 맞지 않으면서도 억지로 커피맛을 아는 것처럼 너스레를 떨기도 힘들다. 웬만한 일에도 말끝마다 ‘쎄쎄(谢谢)’가 오가고 지어 점원에게도 련발해야 하는 ‘쎄쎄(谢谢)’ 포위 속에서 진실한 대화 가 나올지 의심되고 속으로는 엉뚱한 타산을 하면서도 입으로는 려과된 미사려구만 늘어놓는 그런 장소가 기질적으로 맞지 않는 것이다. 내가 아는 ‘쎄 쎄(谢谢)’는 진정으로 고마움을 느껴야 발하는 언어다. 그리고 옛날에는 ‘쎄쎄 (谢谢)’가 꼭 동지(同志)라는 말과 결합됐지 지금처럼 아가씨(小姐)거나 점원 혹은 남자복무원(服务生)과 련계되지 않았다. ‘쎄쎄(谢谢)’란 우리 말로 ‘고맙 다’, ‘감사하다’ 혹은 방언으로 ‘아쉼채이우’다. 그런데 지금은 감사한 일이 아 닌데도 ‘고맙다’가 람용되는 형국이다. 이 단어가 아니면 소통(疏通)이 안될 것 같은 착각이 들어 오히려 ‘쎄쎄(谢谢)”란 말이 없으면 더 편할 것 같다. 이 전에 유럽영화를 보면서 무랍없이 구사되는 ‘쎄쎄(谢谢)’를 들으면서 문명사 회가 다르구나 하고 느꼈던 적도 있지만 정작 우리 곁으로 다가온 ‘쎄쎄(谢 谢)’가 너무도 람용되니까 사람과 사람 간에 상호 벗길 수 없는 철갑을 걸치 고 있는 듯한 엉뚱한 상상도 하게 된다. 결론적으로 이것도 소통(疏通)의 방 식이라면 순응해야 하는데 문제는 람발되는 ‘쎄쎄(谢谢)’ 속에 진실이 안 보이 고 진실이 부재하면 소통(沟通)을 운운할 수 없다는 것이다. 내가 배운 진실 과 소통은 이런 게 아니다.

내 고향 남대천의 뒤덕 우에 사래 긴 황토밭이 펼쳐져있었는데 아지랑이 피여오르는 씨붙임계절이면 일밭에 나간 아낙네들이 끼리끼리 밭고랑에 아 무렇게나 주저앉아 이야기를 주절거리군 하였다. 진종일 자리를 떠날 줄 모르 고 지껄여대는 화제라 해봐야 남편, 아들, 딸부터 시작하여 시누이, 동서를 두 루 들먹이는 시시한 신변잡기들이겠지만 거기에는 진실하게 살아가는 사람 들의 평범한 이야기가 있었다. 현대말로 풀이하면 시골사람들의 소통의 플랫 폼(沟通平台)은 대개 로동의 현장이였다. 이때면 산기슭의 락엽송밭에서 뻐꾸 기가 울고 하늘에 뜬 종달새가 지종지종 울어댄다. 이런 시골의 정취를 뼈속 까지 담고 지금도 망향가(望乡歌)를 부르고 있기에 어찌 보면 내가 선호하는 소통은 소박하고 촌스럽다 할 수 있겠다. 버드나무그늘 밑에 ‘쏘료(塑料)’라는 비닐박막을 펴놓고 웃통을 벗고 맥주를 병 채로 마시면서 개미가 기여오르는 넙적다리를 툭툭 치고 몸을 움찔거릴 때마다 너른 속옷 가랭이 사이로 불알이 얼른얼른 비치는 풍경 속에서 세상을 진실하게 살아가는 평범한 사람들의 과 거, 현재를 가감없이 이야기하고 마지막에 당뇨병에 걸린 고모부가 남자구실을 못해서 고모가 옆집남자와 바람을 피우던 구질구질한 사연들이 오가야 진 정한 소통인 줄로 안다. 이런 촌스러움을 고집하는 기질이라면 정문에서 불심 검문도 받을 개연성이 있어 이의를 제기할 멋도 없다. 그런데 이번엔 류가 다 른 불심검문이다. 청사 쪽에서 어떤 환송식을 한단다. 이제는 통지문에 이름 까지 박아서 싫어도 가야 했는데 그날은 전날에 산 괜찮은 잠바에 양복바지 를 입고 구두까지 받쳐신었고 가슴에 당기(党旗) 마크도 달았다. 누가 봐도 ‘간 부차림’이였다. 정문에서 무사통과되리라고 생각했지만 천만에… 먼저 대여 섯 사람이 정문을 통과하면서 저마다 자기의 소속을 밝혔다. 한여름인데도 검 정 목구두의 신끈을 질끈 동이고 장승처럼 뻗치고 섰던 경찰은 “오늘 같은 회 의에 작가협회라는 민간조직의 책임자를 초대할리가 없겠는데…”라고 혼자 말을 해서 하는수없이 우리 직장을 잘 알고 있는 어떤 주임에게 전화로 도움 을 청해서야 입장이 가능했다. 원래 회의에 참가하면 온통 다른 데 정신이 팔 려서 회의정신을 전달하는 데 번번이 실패했던 나는 그날 아주 엉뚱한 창조적 상상을 했다. 민간조직이라는 작가협회의 명칭을 바꾸어야 한다. 그럼 무슨 명칭이 합당할가? ‘협회’라는 말이 붙어있어 민간조직이라는 오해를 받는다면 ‘협회’ 대신 ‘국(局)’이라고 하면 어떨가? 그러자면 우선 ‘중국작가협회’라는 명 칭부터 바꾸어야 한다. ‘중국작가총국’이라고 하면 어떨가? 만약 이것이 불가 능하다면 어느 나라처럼 ‘작가동맹’이라고 하면 안될가? 그러면 ‘연변작가협 회’는 ‘연변작가국’이거나 ‘연변작가동맹’이 되고 필자는 ‘주석’이 아니라 ‘국장’ 이 된다. 내 이름을 사석에선 ‘아즈바이’, 공석에선 작가국 ‘최국장’이라고 부릅 세다. 나도 한번 이 기회를 빌어서 승천해봅세, 제길할…

작가: 최국철

<연변문학> 2017년 8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