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산
래원:중앙인민방송국      2018-02-14 09:24:00

어렸을 때 다른 집에는 기껏 집안기물이래야 반다지농짝 하나가 고작이었던 시절, 우리 집엔 자그마한 일본식 찬장 하나와 책궤 그리고 그에 달린 앉음뱅이 테이블 하나 말고도 서랍 달린 경대 한 틀과 러시아제 벽시계가 있었다. 그 덕분에 우리 집은 동네에서 부자 대접을 받았던 것 같다. 여덟 살 나던 해였던가 솜씨 좋은 어머니가 한족 마을에 가 양털을 사다 실을 뽑아 한겨울 내내 털내의를 떠서 판 돈으로 마을 치고 맨 처음 재봉틀을 갖추어 들여 우리 집엔 남들이 부러워하는 집안기물 하나가 더 늘었다. 옷 짓는 솜씨가 있었던 어머니는 그 재봉틀로 동네사람들의 옷을 많이 만들어 주었다. 지금처럼 삯전을 받는 것도 아니고 기껏해야 떡 한 사발, 달걀 몇 알 그렇게 아낙들이 성의로 들고 오는 예물을 받으면서 어머니는 낮에는 전간 일을 하고도 밤 시간을 타 짬짬이 일손을 다그치군 했다. 어머니가 재봉틀에 올라앉아 바느질을 할 때면 그 맞은 켠에 붙어 서서 옷감 위로 톡톡 뛰어다니는 노루발을 지켜보는 것이 나의 또 다른 취미였다. 그러다가 한 번은 어머니가 유의하지 않는 틈을 타 뾰족한 송곳 끝으로 재봉틀 몸체에 지울 수 없는 그림 흉터를 그려놓아 아버지에게 혼났던 일은 아직도 기억에 생생하다.

기력이 쇠한 부모님들이 더 이상 촌에서 살기 불편한 점이 많아 부모님들을 시내에 있는 우리 집으로 모셔왔다. 그렇게 합가를 하면서 어머니는 쓰던 살림을 그대로 가지고 올라오셨다. 비록 어머니 손끝에서 40여년을 머물렀던 세간살이라지만 아파트 생활엔 필요 없는 것들이 많아 애초부터 추려 던지고 오라고 하였으나 고집이 센 어머니는 쓰던 젓가락 한 모 마저도 내버리지 못하고 그대로 들고 오셨다. 그래서 우리 집은 고물상점 같이 이상한 물건으로 가득 차 있었다. 크고 작은 단지며 텃밭을 다루던 농기구며 지어 무거운 손맷돌까지 자리를 차지하고 있어 우리 집 베란다는 발 들여 놓을 자리가 없었다.

아버지가 세상을 뜨고 어머니가 반신불수로 자리에 누워 바깥출입을 못하게 되자 나는 어머니 몰래 세간살이를 하나 둘 처리해버렸다. 욕심내는 사람이 있으면 줘버리기도 하고 넝마장수에게 헐값에 팔아넘기기도 하면서 정말 필요한 것 외에는 거의 다 솎아버렸다. 작년엔 북조선에서 온 외삼촌에게 재봉틀까지 줘버렸다. 재봉틀을 분해해 화물포장을 하다 말고 물끄러미 재봉틀 몸체에 그려져 있는 생채기를 들여다보노라니 40년 전 그 저지레를 해놓고 아버지에게 야단을 맞던 생각이 떠오르며 감구지회가 갈마들었다. 이 재봉틀에 슴배인 어머니의 노고는 얼마며 그에 못지않게 맺힌 정은 얼마인가? 말문이 막혀 소리를 내지 못하고 거동이 안되어 누워계셔서 그렇지 조금만 기력이 있어도 재봉틀을 끌어안고 못 버린다고 뒤로 드러질 어머니가 아닌가? 우리 집으로 올 때 그랬다. 아파트 살림엔 별로 쓸모없을 것 같은 큰 함지를 내버리려 하자 그러는 내 손을 말리다 못해 아주 함지를 끌어안고 봉당에 주저 앉아버리는 것으로 항의를 했던 어머니였다.

“누이, 이 재봉틀, 얘들은 필요없데누만. 그래서 내가 가져가는데 가져가서 내가 누이 보듯이 모셔놓고 쓸 테니 그리 아슈. 내가 누이의 보물을 가져다 버리지 않고 잘 간수할 테니께니.”

외삼촌의 말에 어머니는 오랜만에 얼굴에 화색을 띄며 어머니 특유의 멍청한 웃음을 피워 올렸다. 온전한 말 한 마디 못하는 어머니에게 웃음은 “좋다”, “된다”, “그렇다”, “반갑다” 등 긍정적의미를 띤 대명사인줄 나는 안다. 어머니 생각에도 그렇게 하는 게 가장 합당하다고 생각하는 모양이었다. 그렇게 어머니의 세간살이 중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는 재봉틀을 처리한 이듬해 어머니는 이 세상을 떠났다. 장례를 끝내고 돌아와 지병으로 장장 9년을 뭉갰던 어머니의 자리가 텅 빈 것을 보는 순간 갑자기 한산해진 집안 분위기와 순식간에 고요해진 주위 환경이 낯설어 나는 반나절이나 집안을 서성대며 안정을 찾을 수 없었다. 부지중 베란다에 나가보니 어머니가 쓰던 손맷돌이 한 쪽 구석에 웅크리고 앉아있었다. 어머니가 쓰던 용품이라면 걸레 조각 한 올 남기지 말고 화장할 때 모두 함께 태워드려야 한다고 옆에서도 건의했고 나로선 빠짐없이 다 거두어간다고 했는데 그래도 남은 것이 있었다는 것이 그 시각 유감스럽기도 했고 한편 다행스럽게 생각되기도 했다. 넝마장수도 그깟 돌덩이를 가져다 어디다 쓰겠냐며 도리를 저어서 주지 못했고 주기만 하면 똥무지 말고는 다 가져가겠다던 북조선 외삼촌도 그것만은 무거워서 그만두겠다며 외면한 덕에 어머니의 손맷돌은 여태 우리 집 베란다에 남아 있을 수 있었다. 다가가 슬며시 어처구니를 잡아보니 어머니의 손을 잡은 듯 감회가 새로워나며 다 흘려버린 줄 알았던 눈물이 그 시각 다시금 솟구쳐 올랐다. 설이면 어머니는 밤새 이 손맷돌을 돌려 식구들과 친척들이 먹을 엿을 많이도 만들군 했었다. 그뿐만 아니라 엿감을 갈기 위해 온 마을에서 너도나도 빌려 쓰다나니 한 번 빌려 나간 맷돌은 온 동네의 엿이 다 만들어진 후에야 겨우 집으로 돌아오군 했었다. 이제 그런 이야기는 먼 옛말이 되어버렸다.

어머니는 갔지만 이제 어머니를 떠올릴 수 있는 물건은 이것밖에 남지 않았다. 석수쟁이 외할아버지께서 어머니를 시집보내며 결혼 혼수 삼아 손수 만들어 보냈다는 손맷돌, 이제는 하등 쓸모가 없는, 아니 쓰는 이가 없는 돌덩이가 어머니가 남긴 유일한 유물로 우리 집 베란다에 남겨졌다. 주위에는 부모들로부터 작게는 금은 장신구로부터 크게는 아파트까지 유산으로 물려받고 부모 복을 입었다며 흐뭇해하는 사람들이 적지 않다. 솔직히 그럴 때마다 부럽기도 하고 질투도 난다. 이게 내 운명인 걸 하며 체념하는 방식으로 갈마드는 욕심을 멀리 쫓아버리군 한다. 금반지도 아니고 은목걸이도 아니고 아파트 값에는 더구나 못 미치는 돌덩이 두 짝, 그러나 우리 가족의 역사가 새겨져 있고 어머니의 정서가 슴배어 있으며 어머니의 손때가 다분히 묻어있는 유서 깊은 돌덩이를 나는 죽을 때까지 버리지 못할 것이다. 나를 낳아주고 키워준 어머니가 나에게 남기고 간 유물을 다 버리고 이제 이 손맷돌 밖에 남지 않았기 때문이다.

작가:박옥남

<송화강> 2017년1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