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혁개방의 선봉] 하문항공사업의 개척자 오영남과 개혁개방 평화환경을 보호한 전투영웅 위창진
래원:중앙인민방송국      2019-01-13 13:47:00

개혁개방의 선봉인물들, 오늘은 하문항공사업의 개척자 오영남과 개혁개방 평화환경을 보호한 전투영웅 위창진을 소개해 드린다.

1984 7, 하문항공유한회사가 개혁개방의 봄바람을 타고 탄생하여 우리나라 국내 첫 시장화 운영의 항공회사로 되였다. 하지만 시작할때 항공사는 집 한채 없었고 밑천이란 단돈 5천원뿐이였다. 그것도 빌려온 돈이였다.

1986년초, 오영남은 하문항공회사에 취임하였다. 사무장소가 없어 오영남은 대나숲에서 사무를 보았고 비행기가 없었기에 민용항공에 비행기를 임대할수있도록 조률하여야했다. 그리고 비행사가 없어 공군으로부터 인재를 유치해야했다. 오영남은 분발 진취의 정신을 최대한 발휘하면서 사업을 개척해 나갔다. 1986년말에 하문항공회사는 드디어 자주적으로 비행팀 첫 비행을 실현하게 되였다. 1987년에 하문항공사는 3년간 결손보던 국면을 돌려세우고 처음 리익을 보기 시작했고 그때로부터 지금까지 쭉 이어왔다. 그리하여 하문항공사는 중국민항중 유일하게 련속 32년간 지속적으로 순리익을 본 항공사로 되였다.

오영남은 또 하문항공사를 이끌고 남먼저 국내대학 본과졸업생 가운데서 비행사를 모집하였고 중금을 들여 국외에 보내 비행기술을 전면 훈련받게 하였다. 이와 같은 비행조정사의 대변혁 인재양성 모식은 후에 전 민항분야에 보급되기도 하였다. 그리고 3년 시간을 들여 편집한 9백만자에 달하는 하문항공사 운영총책도 중국민항분야의 규범화 관리의 모범적인 책으로 되였고 하문항공사는 련속 수년간 항공봉사 최우수 항공사라는 영예칭호를 수여받았다.

1985 3, 입대한지 일년 남짓한 위창진은 부대를 따라 변경의 자위전쟁 전선에 나가게 되였다. 한차례 치렬한 전투에서 네명의 전우가 선후하여 희생되거나 중상을 입은 상황에서 위창진은 11시간을 자기의 전투 위치에서 홀로 적과 싸웠다. 위창진은 포병들에게 정확한 신호를 보내 포격으로 적의 수십명, 백여명 규모의 공격을 여덟차례나 격퇴하였다.

아군의 진지를 지키고 적을 더 유력하게 타격하기 위해 위창진은 공격해오는 적이 가까이에 썩 다가왔을때에야 수화기에 나를 향해 포격하시오!”라는 신호를 보냈다. 맹렬한 포격이 있은후 적을 대량 살상하고 물리쳤지만 위창진도 수많은 파편을 맞고 쓰러졌다. 위창진은 우른쪽 가슴에 파편을 맞았고 왼쪽 눈도 멀게 되였다. 몸에 22곳이나 상처를 입은 위창진은 7주야를 혼수상태에 빠져 있었다.

이와 같이 포화의 세례를 받은 위창진은 평화를 더욱 각별히 아꼈으며 그후 30여년동안 평화로운 환경에서도 줄곧 전사의 본색을 잃지 않았다.

위창진이 련의 지도원으로 훈련해낸 병사들 가운데는 세명이 간부로 제발되였고 네명이 사관학교에 입학하였다. 그리고 사관학교 교원으로 사업할때는 자기가 전장에서 겪었던 생동한 사례들과 결부해 기층의 정치사업 학과를 잘 강의했다. 인민무장부 정위를 담임할때 위창진은 큰 힘을 들여 기층 무장부대의 간부대오를 잘 정돈하였다. 그의 좋은 경험은 상급에 의해 기타 부대에까지 보급하게 되였다. 군분구 정위를 담임할때 위창진은 당위 지도부 성원들을 이끌고 민병 무기장비 창고를 정돈하고 민병조직정돈을 규범화하였으며 민병들도 자기의 초소에서 시종 돌격할수있는 자세를 유지하도록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