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공산당의 조기 혁명활동가이며 청도 당조직의 책임자였던 리위농 렬사는 안휘성 소현의 한 빈곤 농가에서 태여났다. 그는 어려서부터 농민의 고충을 보면서 자랐다. 어린시절의 환경은 리위농에게 “농업구국”의 리념을 키워주었다. 5.4운동 기간 리위농은 무호 학생운동의 인솔자로 활동했다.
1922년 6월 리위농과 조세염, 주은래 등 18명 인사들은 “유럽 류학 중국 소년공산당”이라는 단체를 설립했고 그 뒤 얼마 되지않아 리위농은 정식 당원으로 되였다.
1925년 리위농은 당의 지시에 따라 산동성 청도시에서 근무했다. 같은 해 4월에서 5월사이 청도 대강 방직공장 로동자들이 파업에 들어갔다. 리위농은 각 공장 로동자들과 련락해 공동 대파업의 형식으로 로동자들에게 힘을 주었다. 이로써 대강 자본가와 로동자 대표는 9개 조항으로 된 생산복귀 조건을 체결했고 대파업은 중대한 승리를 거두었다.
1925년 7월 26일 소포도에서 비밀회의 진행중 그는 반동 군경들에 의해 체포 살해되였다. 향년 30세였다.
오늘날 리위농의 고향은 우세 자원에 힘입어 혁명 특색촌을 건설하고 친환경 경제발전으로 현지 촌민들에게 복지를 마련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