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족의 부흥 영웅렬사 계보] 신해혁명 공신 황흥
래원:중앙인민방송국      2018-04-13 09:58:00

계속해서 민족의 부흥 영웅렬사 계보, 황흥 편을 보내드리겠다.

황흥의 본명은 황진이다. 1874년 10월 25일 호남 선화현 량당에서 출생한 그는 5살부터 부친의 사숙에서 계몽교육을 받았고 8살 소거인의 사숙에서 공부하고 11살부터는 퇴직한 한림 주립초를 스승으로 삼고 학습했으며 1893년 성남서원에 입학하고 1898년 장사 상수 교경당에 전학했다가 무창 량호서원으로 재차 전학해 학습했다.

1902년 황흥은 호광 총독 장지동을 통해 일본류학길에 올랐다. 짜리 로씨야가 중국 동북지역을 강점한후 황흥은 재일 중국류학생들과 함께 짜리 로씨야를 물리치는 “의용군”을 조직하고 우리나라 동북지역에 진출해 짜리 로씨야를 물리칠 준비를 했으나 청정부의 저애를 받았다. 이때 황흥은 제국주의를 반대함에 있어서 우선 청정부를 반대해야 한다고 인식하고 류학생활을 접고 귀국해 반청 혁명을 전개했다.

1904년 2월 15일 황흥은 장사에서 혁명단체인 화흥회를 조직하고 회장직을 맡았다. 1905년 7월 황흥은 일본에서 손중산을 만났고 이어 두 사람은 혁명단체와 반청문제와 관련해 합의를 달성했다. 이해 8월 20일 동맹회가 일본 도꾜에서 성립됐다.

동맹회가 성립된후 황흥은 여러차례의 무장봉기를 기획하고 령도했다.

1911년 4월 27일 황화강 봉기에서 황흥은 돌격대 백명을 이끌고 청정부의 량광 총독서를 진공했고 전투에서 식지와 중지가 부상입었지만 끝까지 전투를 지휘했다.

그러나 적아 쌍방의 력량차이로 봉기는 실패했다.

1911년 10월 10일 무창봉기가 일어난후 황흥은 10월 28일 무창에 도착했고 11월 3일 중화민국 군정부 전시 총사령으로 임명됐다.

1911년 12월 중순 황흥은 각성 대표회의에서 대원수로 추천됐지만 손중산을 대원수로 추대할것을 주장했다. 혁명과정에 황흥은 손중산의 령도지위를 시종일관 견지했다. 1921년 1월 남경 림시정부가 성립된후 황흥은 륙군총장 겸 총참모장으로 임명됐고 4월 남경 류수직을 맡았으며 6월 남경 류수직을 사직했다.

1913년 7월말 원세개 토벌작전이 실패하자 황흥은 상해와 향항을 통해 일본으로 갔다. 당내 단결을 도모하고 원세개를 토벌하기 위해 1914년 6월말 황흥은 미국으로 떠났다. 이 기간 황흥은 혁명자들에게 고하는 글을 발표하고 원세개를 토벌할것을 촉구했다.

1916년 7월 8일 국내 각계의 초청하에 황흥은 상해에 도착했다. 그러나 피로가 쌓여 발병했고 10월 31일 42세를 일기로 상해에서 세상을 하직한후 1917년 4월 15일 장사 악록산에 국장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