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사해설 : 련임에 성공한 이란 로하니 대통령
래원:중앙인민방송국      2017-05-21 14:16:00

이란 내정부가 20일 선포한데 의하면 19일에 있는 제12기 대통령선거에서 현임 대통령 하산 로하니가 57%의 득표률로 승리함으로써 련임에 성공하였다.

1948년 11월에 태여난 로하니는 일찍 신학교에서 이슬람 교법을 학습하였고 이미 작고한 이란 정신적인 수령인 호메이니의 충실한 신봉자였다.

지난세기 6,70년대에 그는 팔라비 국왕의 통치를 반대하는 정치활동에 참가한것으로 수차 체포되였다.

1979년 이란 이슬람혁명이후 신생의 이슬람정권을 공고히하기 위해 호메이니는 이란 군대에 대한 정돈과 관리에 참여하도록 로하니에게 명하였다. 로하니는 이 사업에서 출중한 조직력과 지도력을 보여주었으며 당시 이란 의회 의장이였던 라프산자니의 눈에 들어 그의 신뢰를 받게 되였다.

로하니는 1980년에 의회에 들어가 선후하여 국방위원회 주석, 외교정책위원회 주석, 제1부의장을 력임하면서 라프산자니의 가장 유력한 조수로 활동했다.

1980년부터 1988년 이란이라크 전쟁기간까지 그는 또 전선 부총지휘, 국방 공군 총지휘를 맡기도했다.

1989년부터 2005년까지 라프산자니가 대통령을 지낼때 로하니는 이란 국가 최고안전위원회 사무총장직을 맡으면서 이란 최고안전기구를 16년이나 직접 관리하고 운영해왔다.

로하니는 법학분야에서도 조예가 깊었다. 1972년에 그는 테헤란 대학을 졸업하고 법학 학사 학위를 획득하였다. 지난세기 90년대에 그는 영국에 가서 공부하면서 법학 석사와 박사학위를 받았다.

영국에서 공부할때의 경력은 로하니로하여금 유럽-아메리카 국가의 정치모식과 의식형태를 료해하도록하였고 훗날 그가 서방인사들과 자유롭게 교제할수있도록하였다.

하타미 대통령의 두번째 임기 때에 이란 핵문제가 크게 불거졌다. 그때 당시 로하니는 이란 수석 핵담판 대표로 활약하였다.

2003년부터 2005년까지 로하니는 영국, 프랑스, 독일 대표와 수차의 협상을 진행하면서 농축 우라늄 잠시 중지와 관련한 합의를 달성함으로써 이란에 대한 서방의 핵압력을 많이 완화하였다. 그의 외교적 재능도 이때부터 이란 각계의 인정을 받았으며 언론은 그를 “외교 추장”으로까지 불렀다.

2005년 네쟈이드 대통령 시절 로하니는 수석 핵담판 대표와 국가 최고안전위원회 사무총장 직책을 모두 내놓고 이란 국가리익 확인위원회 산하의 전략연구센터 주임을 지냈다.

8년시간에 로하니는 잠자코 힘을 키웠다. 2013년 6월에 진행된 제11기 대통령 선거에서 로하니는 모든 사람의 예상을 깨고 첫라운드 투표에서 벌써 상대를 제치고 대통령에 당선되였다. 그는 경선기간 “세계와 건설적인 관계를 건립하기 위해 노력한다”는 주장을 내세움으로써 국제사회 특히는 서방사회의 주목을 받게 되였다.

4년동안 온화하고 실무적으로 일하면서 로하니는 줄곧 국제사회와의 대화에 진력해왔다. 그는 이란과 서방대국간의 관계를 개선하기 위해 힘써왔으며 2015년 7월 드디어 이란핵문제 6국과 력사적인 이란핵문제 전면협의를 달성하였다.

2016년 1월에 협의가 공식 발효되면서 서방 국가들은 이란에 대한 제재를 점차 해제하기 시작하였고 이란은 비교적 넉넉한 국제환경을 맞이하게 되였다.

하지만 간과할수없는것은 아직까지 이란의 경제는 뚜렷한 개선이 없고 실업률이 의연히 비교적 높다는 사실이다. 게다가 사람들의 큰 관심을 모으고있는 수십억 딸라의 외국 투자도 아직 약속대로 조달되지 못하고있다. 뿐만 아니라 미국 트럼프 대통령이 이란핵협의를 반대한다고 명확히 표함으로써 미국과의 관계를 처리하기 위한 로하니의 노력에 비교적 큰 어려움을 조성하고있다.

이러한 도전에 직면해 로하니는 경선기간, 만약 련임에 성공한다면 자기는 계속 국제사회와 건설적인 상호 작용을 진행할것이라고했다. 그리고 만약 최고 수령인 하메네이가 허용한다면 그는 비핵분야의 담판을 진행할 준비도 되였다고 말했다. 그는 비핵분야의 제재를 없애야만이 이란의 경제가 철저한 개선을 가져올수있다고 보고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