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도 홍색혈맥으로 항일련군 정신 기려
래원:연변일보      2018-09-18 10:06:00

일전 성당위 선전부, 성당위 당사연구실, 성관광발전위원회, 성동북항일련군연구회는‘력사를 명기하고 항일련군의 정신을 고양하는’대형 탐방활동을 개최했다. 행사는 연변조선족자치주 각 현(시)의 홍색 력사 자원을 깊이있게 발굴하고 주내 동북항일련군의 중요 유적, 대표 인물을 탐방하고 중요 력사사건을 되돌아보는 등 활동으로 위대한 동북항일련군 정신을 충분히 구현했다. 여러 보도매체 기자, 당사사업자, 문예사업자와 대학생들이 이번 탐방활동에 참여했다.

안도현은 국가 갑류 로혁명구로서 풍부한 홍색자원을 보유하고 있다. 안도현에서 탐방단은 선후하여 동만특위 당조직, 단조직 회의 전람실, 동북항일련군 제2군기념관, 미혼진 동북항일련군 제2군 설립유적, 내두산항일유적근거지 등 88년의 홍색이야기를 담고 있는 유적들을 둘러보았다.

중공동만특위 당조직, 단조직 회의(또는‘중공동만특위 당조직, 단조직 열성분자회의’, ‘중공동만특위 옹성라즈 당조직, 단조직회의’) 유적지는 명월진에 위치해있다. 동행한 안도현당위 당사연구실 부주임 강경홍의 소개에 따르면 중공동만특위 서기 동장영이 회의에서 동만지구 항일투쟁과 관련해 반일유격대를 건립하고 ‘춘황’투쟁을 벌리며 여러가지 군중조직을 건립하는 등 일련의 중대한 결정을 하여 연변지역에 항일의 불꽃을 지폈다.

1936년 3월 상순, 중공동만특위 서기 위증민과 왕덕태 등 동북인민혁명군 제2군 주요간부들이 이곳에서 동만특위와 제2군 지도간부 회의를 소집하였는데 이 회의가 바로 ‘미혼진회의’이다. 위증민은 회의에서 공산국제 ‘제7차 대표대회’회의정신과 공산국제 중국공산당 대표단의 지시를 전달했다. ‘8.1선언’과 ‘동북항일련군통일군대건제선언’의 요구에 따라 동북인민혁명군 제2군을 동북항일련군 제2군으로 재편성했다. 왕덕태가 군장으로, 위증민이 정위로, 류한흥(진룡)이 참모장으로, 리학충이 정치부 주임으로 임명되였으며 전군의 병력이 2000여명에 달했다.

대사하전투는 중공남만성위의 령도하에 동북항일련군이 ‘성을 포위하여 적의 지원군을 공격’하는 전술’로 《중국공산당력사》 제1권에 기록된 유일한 전투이다. 1939년 8월 하순, 중공남만성위 서기, 동북항일련군 정치부주임, 제1군 부총사령 위증민과 제3방면군 지휘 진한장 등 장령들이 제1로군 제3방면군, 제2방면군 제9퇀과 항일련군 제5군 도정비부대 등 500여명을 령솔해 안도현성(오늘의 안도현 송강진)을 진공했다. 이틀간 지속된 대사하전투에서 총 7차례의 전투가 있었으며 100여명의 적군을 사살하고 대량의 군수물자를 로획했다.

안도현 이도백하진 내두산촌에는 동북인민혁명군 제2군 내두산 항일유격근거지기념관이 자리잡고 있다. 전람관에 진렬된 문물들은 동북인민혁명군 내두산 항일유격근거지의 력사를 검증하고 있다. 1935년 10월, 동만항일투쟁 형세가 날따라 준엄해졌다. 동북인민혁명군 제2군(동북항일련군 제2군 전신)은 차창자를 포기하고 내두산 항일근거지를 개척했다. 그 후 제2군은 인민군중들의 지원하에 적극적으로 출격하여 적에게 큰 타격을 입혔다. 1935년 11월의 어느 날, 일본침략자들은 일본군, 위만군, 경찰 등 800여명을 모아 내두산 항일혁면근거지를 ‘토벌’했다. 당시 근거지에는 두개 련대의 작전병력만 남아있었지만 제2군 군장 왕덕태는 4배나 되는 강적 앞에서 침착하게 한번 또 한번 적들의 맹렬한 공격을 물리쳤다. 그는 지형에 익숙해 기동령활하게 싸울 수 있는 우세를 살려 여러개의 소분대를 파견해 여러번 적의 주둔지를 기습하고 적들에게 앞뒤로 공격을 가함으로써 물러나게 했다. 동북혁명군 제2군은 적은 병력으로 많은 적을 타승하였으며 대량의 무기와 군수물자를 로획했다.

“해설원의 생동한 소개를 들으니 저도 모르게 존경심이 생겼다. 항일영렬들의 희생이 없었더라면 새 중국도 없을 것이다. 대학생으로서 학업에 열중하여 조국의 번영발전에 기여하련다.” 탐방단 성원인 장춘경제학원 ‘청년맑스주의프로젝트’학생 송흔예가 방명록에 정중히 글을 남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