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명으로 음악예술을 하는 박학림, 그는 누구인가?
래원:종합      2018-07-17 09:08:00

복동탄광 로동자들을 위한 고향음악회

연변가무단과 연변학림악단에서 주최한 복동탄광 로동자들을 위한 고향음악회가 일전에 연변가무단극장에서 열렸다.

음악회는 사진영상과 시랑송음악 <복동탄광, 그 그리운 이름속에>로 막을 열었다.

연변학림악단 단장인 박학림 작곡가는 1955년 화룡시 복동진에서 태어났다. 광부 아들인 박학림 작곡가는 일찍부터 어머니 고향이기도 한 복동 인민들을 위해 문화향연을 선물하고저 했다.

음악회에는 박학림 작곡가가 고향에 대한 애틋한 사랑으로 창작한 광산의 아침, 광산 마을 등 노래가 련창 형식으로 펼쳐져 관중들의 박수갈채를 받았다.

이외에도 제비가 돌아왔네, 장백련가 등 노래들이 합창, 독창 등 형식으로 박학림선생의 지휘 및 악대의 아름다운 선율과 어우러져 관중들에게 감동을 줬다.

향후 박학림 작곡가는 계속 고향인민들을 위한 음악회를 조직해 고향에 대한 추억과 따뜻한 정을 나눌 계획이다.

한편 2017년 연변학림악단 설립 10주년 공연이 지난 2017년에 열렸다.

민족음악을 지키는 “3자원칙”

감회를 자아내는 동요〈반디불〉을 열창는 학림악단

2006년 3월, 음악을 좋아하는 여러 단위나 단체의 9명 악사가 연주하고 싶은 음악을 마음껏 연주하면서 봉사도 하려는 목적으로 세운 한 작은 민간단체가 10년이 지난 2017년 40명의 악사와 60여명의 합창대 그리고 가수들로 대진영을 이루게 되였다. 그 중심에 연변가무단의 작곡가 박학림선생이 있었던 것이다.

박학림선생은 이 악단의 단장으로서 작곡과 편곡, 지휘를 도맡아 하면서 학림악단의 독특한 음악정취를 구사하고 민족음악예술의 경지를 펼쳐내고 있었다.

“저는 작곡을 해도 작곡가, 가수, 청중 이 3가지를 꼭 결합합니다. 무대공연에서도 역시 이런 창작원칙으로 무대아래 관중들이며 무대우의 공연자들의 정서를 모두 고려하지요.” 늘 보고 듣고 하던 음악프로이지만 학림악단의 공연무대를 마주하노라면 새삼스런 흥미와 깊은 감명을 받게 되는 그 리유를 알 것 같았다.

연변텔레비죤방송국 꽃봉오리예술단 예술지도 시절 미국공연길에서

〈중국의 아침 5시〉나 〈대중국〉과 같은 타민족 음악을 편곡할 때도 2선 해금이나 가야금 같은 민악으로 관중들의 정서를 사로 잡는다. 프로그램을 작성하면서도 무대우의 합창대원이며 악사들 그리고 무대아래 관중들 모두가 너나 없이 부르며 성장해왔고 또 지금도 부르고 있는 동요 〈반디불〉,〈고개길〉,〈색동저고리〉,〈나는 북경의 천안문을 사랑해요〉등 노래를 선택하여 대합창이라는 거창한 부름과 현대음악풍격과 진솔한 률동을 가미하면서 공연장을 메운 남녀로소가 감회와 흥분과 격동속에 들끓게 한다.

“대합창이 이렇게 재미있고 감동적일 줄은 미처 몰랐어요!”라고 하며 감격의 눈물을 훔치는 관중들도 한둘이 아니였다.

끝을 모르는 배움의 길

1955년생으로 올해 63세인 박학림선생은 지금 조선평양음악대학의 박사과정을 밟고 있다. 그 배움의 끝은 어디일까?

탄부의 아들이였던 박학림선생은 19세나는 해에 세상 뜬지 오랜 아버지의 뒤를 이어 탄광 로동자로 일하면서 늘 음악책을 몸에 지니고 다녔다. 휴식시간이면 탄모등 불빛을 빌어 음악책을 읽 군 하였는데 악상이 떠오를 때면 탄갱벽에다 악보를 그렸다. 책을 스승으로 음악공부를 하던 그는 25살 되는 해에 노래〈채탄공의 노래〉를 첫 작품으로 발표하였다.

25세에 첫 작품〈채탄공의 노래〉를 발표하고 원고비 5원을 받은 후 기념사진을 남겼다.

1975년의 어느 날, 중국조선족의 저명한 작곡가 동희철선생이 복동탄광으로 생활체험을 오셨다가 “박학림이라는 젊은이가 아주 전도가 있구만.”이라는 덕담을 남겼다. 그 덕담 한마디에 얼마나 큰 힘이 솟구쳤는지 몰랐다며 그 때를 상기하는 그의 얼굴은 희열로 차넘쳤다.

그후 연변탄광자제학교 음악교원으로, 연변신화인쇄공장 문예선전대 지휘, 연길시 신흥가두 문화소 소장을 지낸 그는 장춘영화촬영소 음악창작반, 중국통신음악학원 리론작곡공부를 하였고 1991년에는 상해음악학원 작곡지휘학부 간부연수반에서 3년간 작곡지휘를 배웠다.

연길시 신흥가두 문화소 소장으로 사업하던 시절

“학교에서 통일로 전등을 끄면 초불을 켜고 밤을 패가며 공부를 했지요. 공부를 마치고 나면 배가 너무 고파 잠이 오지 않았습니다. 참다 못해 신흥가두 한영금로인에게 편지로 사정이야기를 했더니 가두주임과 치보주임들을 동원하여 누룽지며 미수가루를 반마대 실히 되게 보내왔습니다. 편지까지 들어있는 누룽지주머니를 마주한 나는 감격에 못이겨 그만 울고말았습니다!” 그는 졸업할 때까지 그 누룽지를 먹으며 〈꿈의 재생〉이라는 교성곡을 졸업작품으로 완성하고 고향 연변으로 돌아왔다.

상해음악학원 간부연수반에서 공부하던 그때

1993년 9월부터 연변가무단 창작실에서 사업하게 된 박학림은 갈고 닦은 기량을 펼쳐 대중들이 즐기는 음악작품을 용약 창작하였다.〈제비가 돌아왔네〉,〈사랑의 푸른 하늘〉,〈세월은 흘러도〉,〈나의 집은 연변이라오〉등 가요와 텔레비죤드라마《별찌》(상하집), 《사랑의 품》(8집), 《초연속의 수리개》(15집)의 음악 그리고 동요 〈하늘나라 가고파〉,〈진달래고향〉등 무용음악, 화극, 창극, 민속가무극, 협주곡 등 다양한 쟝르의 여러가지 풍격의 음악작품 1000여수를 창작하였다. 그는 드디여 국가 1급 작곡가로 평의되였다.

그가 창작한 무극《장백정》의 음악은 19997년 중국문화부 작곡상을 수상하였고 창극 《심청전》(2013년),《춘향전》(2015년)의 음악은 중국소수민족문예콩클 작곡, 편곡상과 지휘상을 수상하였다. 창극 《춘향전》의 수상을 두고 연변가무단의 한 지도일군은 “초인간적 의지와 정신의 산물”이라고 말한적 있다.

퇴직을 눈앞에 둔 그였지만 오로지 민족예술의 정수를 전국인민들 앞에 전시하려는 일념으로 1개월 동안 하루 한두시간씩 밖에 눈을 붙이지 못하며 전반 음악창작을 완성하였고 단 10여명의 민악대원으로 기적의 대악장을 만들어냈다. 일을 마치고 그는 그만 몸져눕고 말았다.

박학림선생은 민족음악을 지키고 발전시키기 위한 탐구를 시종 멈추지 않았다. 21세기 초 조선평양음악대학 작곡지휘학부 공부를 시작한 그는 2014년에 예술학 석사증을 발급받았고 지금은 박사공부를 계속하면서 〈중국주제로 된 조선식 가극〉이라는 론문을 집필중이다.

“예술에 무슨 퇴직이 있겠습니까? 사람은 죽을 때까지 배워도 못다 배운다고 하지 않습니까?” 배움에 대한 그의 견해였다.

예술학 석사학위를 받은 날 스승 박정남을 모시고

‘고향사람들과 함께 하는 음악회’

전업예술의 대중화를 말하면 그는 20년전부터 연길시의 유치원으로부터 대학교에 이르기까지 그리고 여러 단위의 합창지휘로 초청되여 창작과 편곡, 지휘로 대중들의 수요에 걸맞는 작품을 창작하였다.와중에 그는 대중들의 심리를 한순간 휘여잡는 마력같은 재능을 과시하였다. 지금도 역시 여러 소학교 예술고문을 맡고 있는 그는 소학생들을 연변학림악단의 후배로 각종 공연에 동참시키고 있으며 민족예술을 이끌어갈 인재를 양성하기 위한 후계자 양성사업도 펼치고 있다.

학림악단은 설립이래‘박학림작품음악회'만도 5차나 치렀고 두만강문화관광축제며 크고작은 공익공연에 앞장섰다. 그리고 시골마을 촌민들과 변경부대 장병들을 찾아 위문공연도 수차 진행하였다.

연변학림악단의 공연을 관람한 문필가이며 평론가인 장정일선생은 학림악단의 성원들을 “생명으로 음악을 하고 생명으로 민족음악을 지키며 생명으로 정신적인 삶을 영위하는 사람들”이라고 높이 평가했다.

창작근거지에서의 하루

박학림은 “나의 사상이나 신앙, 추구 지어 과격한 성격까지도 혈육처럼 리해하고 받아들여주는 ‘학림악단’”이라고 하면서 “그들을 정신적으로 어디까지나 책임질 각오”가 되여있다고 밝힌다. 이미 80여만원의 거금을 들이며 악단의 운영을 굳혀온 그는 화룡시 서정진 장항촌 시골농가를‘박학림창작근거지’로 마련하기도 하였다.

그곳은 단원들과 함께 농사도 짓고 친목을 도모하고 서로 교류하는 장소로 활용된다. 그 곳에서 ‘고향사람들과 함께 하는 음악회’도 공론중이다. 우선 탄광로동자들을 앞자리에 모신다. 악단사무실에다 석탄덩이를 정히 받쳐놓고 ‘초심’을 다지는 단장이다. 그는“남들 눈에는 다만 석탄덩이로 보일지 모르겠지만 내 눈에는 황금덩이보다 더 귀중하다.”고 말한다.

“당시 탄광서기로 사업하던 김서기가 지금 91세로 생전입니다. 그 분이 계실 때 탄광로동자들을 모시고 〈채탄공의 노래〉를 비롯하여 고향노래를 주제로 한 회보공연을 하고 싶습니다! 꼭 할겁니다!”

어머니 생전에 지극히 효도하던 아들 박학림(왼쪽)과 그의 동생

어머니를 꼭 모시려 했던 '고향음악회'이지만 어머니는 이미 3년전 별세하였다.“어머니는 세상 뜨셨지만 지금도 늘 마음으로 교류하며 살고 있습니다. 워낙 어머니 생전에 장가도 들어 어머니를 기쁘게 해드려야 했었는데…”

하고 싶은 음악회도 많고 해야 할 숙제들도 너무 많다는 그에게 결혼이라는‘인생숙제’에 대해서도 여쭤보았다.

“사람이 너무 한곬으로 정력을 몰붓다 보면 자연 그렇게 되나 봐요. 어쩌면 나에게는 과외애호마저 한가지도 없어요. 앞으로 어떤 녀성을 만나든 음악에 대해 싫어하는 정도는 아니고 어느 정도 리해는 하면서 음악 감상이나 음악회 같은 것을 좋아하면 족하겠지요.”

역시 음악으로 아퀴를 짓는 박학림 단장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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