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몽골 기행 제4부 장인(匠人)의 고향 - 정란기
래원:중앙인민방송국      2017-07-28 15:59:00

비가 질척질척 내리는 아침이였다.  실린골맹 정란기(锡林郭勒盟正蓝旗)에 도착한 취재팀은 아침비를 맞으며 취재일정을 시작했다. 

아침부터 내린 비에 우리는 많이 불편했지만 우리를 안내하러 나왔던 현지 몽골족은 아주 기뻐했다. 

내몽골은 련속 3년간 아주 가물었다고 한다. 일부 지역에서는 련속 2년동안이나 비를 구경하지 못할 정도였다고 한다. 때문에 손님들중에서 비를 몰고 온 손님은 가장 귀한 손님이라며 우리를 반겨주었다.

정란기는 차간이드의 고향(查干伊德之乡)이라고 한다. 차간이드란 백색 유제품을 가리키는데 정란기는 유제품의 고향이라는 별칭을 가지고 있다.

내몽골의 차거운 아침공기와 비물을 가르며 우리는 현지에서 아주 유명한 차간이드 무형문화재 전승인 도고(陶高)가 경영하고 있는 작업장을 방문하러 떠났다.

차하얼(察哈尔)부족의 유제품은 원나라때부터 아주 유명했다고 한다. 원상도가 건립되여서부터 차하얼부족의 유제품은 백성과 왕족들의 사랑을 받았다고 한다. 청조에 이르러 차하얼부족의 유제품은 황실에 특별 공급되였다고 한다.

차하얼부족의 유제품은 아주 엄밀한 제조과정을 거치게 되는데 제조법은 대대로 전해진다고 한다. 우리가 취재한 도고가 바로 차하얼유제품 제조공예의 제4대 전승인이라고 한다.

이름을 듣고 나는 오늘 취재해야 할 도고가 남성인줄로 알았는데 만나서보니 54세의 녀성이였다.

우리가 그의 작업장에 도착했을때 그는 한창 우유두부를 만들 우유를 가마에 넣고 휘젓고 있었다. 그의 작업장에는 어릴적 마을의 두부작업장에서 맡았던 쉬쉬한 냄새는 조금도 나지 않고 우유냄새가 그득했다. 옆에는 이미 완성된 우유두부들이 나란히 배렬되여 있었다. 새하얀 우유두부는 마치 티 한점 없는 옥처럼 윤기나고 아름다웠다.

옥과 같은 우유두부를 보며 내가 아침에 먹었던 우유두부의 맛이 생각났다. 몽골족들의 우유두부는 맨입으로 먹으면 우유맛에 약간 떱떱한 감이 있었지만 우유차에 넣고 먹으면 부드러운 우유차가 떱떱한 맛을 없애주어 너무 맛있었다.

목축구에서 태여난 도고는 어머니가 만든 유제품을 먹고 자랐다고 한다. 그는 지금도 어머니의 손맛이 생각난다며 어머니가 유제품을 만들때 그 모습이 지금도 눈앞에 선하다고 한다.

옛날 목축민가정의 녀자들은 모두 유제품을 만들줄 알았으며 아주 평범한 일이였다고 한다. 그 시대의 사람들은 자신의 유제품을 판매해야 한다는 관념이 없었으며 그냥 귀한 손님을 접대하고 친척, 친우한테 선물하는 물품에 불과했다고 한다.

1990년 도고는 첫 가정식 유제품 가공작업소를 꾸렸다고 한다. 비록 규모는 작았지만 기계화가 아닌 수공업으로 만든 그의 유제품은 많은 사람들의 사랑을 받았다. 

취재시 여러가지 원인으로 많은 목축민들은 유제품을 만드는 법을 잊게 되여 천여년의 력사를 이어온 유제품은 전승의 위기를 가져오게 되였다며 도고는 안타까움을 감추지 못했다. 

현재 공무원으로 일하고 있는 도고의 딸은 자신이 어릴적부터 어머니가 늦잠을 자는 모습을 본적이 없다며 휴일에도 새벽 3,4시에 일어나 유제품을 만든다고 한다. 

다른 집의 어머니들은 마작이나 놀고 낮잠을 잘때 어머니는 유제품을 만들기 위해 항상 고생하신다며 어머니가 건강하고 장수하시는게 자신의 가장 큰 소원이라고 한다. 

그가 어머니한테 항상 일을 그만두라고 말할때마다 도고는 딸한테 돈이 중요한것이 아니라 무형문화재 전승인이라는 영예를 따냈으면 유제품 공예를 전승을 위해 견지하는게 가장 중요하다고 말하고 있다고 한다. 

말수가 적은 도고가 묵묵히 일하는 모습에서 우리는 차간이드 무형문화재 전승인의 장인정신을 느낄수 있었다.

그윽한 우유의 향기를 페속에 담고 우리는 다음 취재지로 이동했다. 우리가 도착한 곳은 바로 몽골포를 만드는 공장이였다.

금련천몽골포유한책임회사(金莲川蒙古包有限责任公司)의 조부영 사장은 몽골포 제고사업에 종사한지 어언 30년이 되였으며 이미 20여명의 제자를 배양해냈다고 한다. 이 회사에서 만들어낸 몽골포는 국내외에서 판매되고 있으며 또 몽골포문화를 세계각지에 전파시키는데 큰 힘을 이바지했다고 한다.

취재중 조부영 사장은 몽골족이 아닌 한족이라는것을 알게 됐다. 몽골족의 몽골포 제작기법을 한족이 발전시키고 있는데 대해 많은 사람들은 의문을 제기했으나 그는 “전승은 민족을 가리지 않는다(传承不分民族)”라고 말해 우리는 깊은 감명을 받았다. 

비록 녀자의 몸으로 기업을 운영한다는것은 쉬운일이 아니였다. 하지만 그는 꾸준히 노력해 주변의 기타 기업들보다 못지않은 성적을 따냈다.

그의 노력은 헛되지 않았다. 그는 관광산업 선진개인으로 평선되였고 또 우수한 전승인이라는 명예를 따냈으며 중앙텔레비죤방송국, 내몽골텔레비죤방송국에서 그를 전문취재했고 또 “몽골포 제조기예”라는 프로촬영에도 참가했다고 한다. 2012년 그는 실린골맹의 무형문화재 “몽골포 제조 공예”의 대표적 전승인이라는 칭호를 수여받았다고 한다.

현재 30여명의 직원을 두고 있는 금련천몽골포유한책임회사의 몽골포는 내지뿐만아니라 몽골, 한국, 일본 나아가서는 미국, 카나다에까지 주문이 들어오고 있다고 한다.

아담한 몽골포들을 보면서 우리는 몽골족의 생활지혜에 탄복할수 밖에 없었다. 몽골포는 유목생활에 맞게 아주 간편한 구조를 이루었지만 여름에는 시원한 바람이 들어올수 있고 겨울에는 엄동설한을 막아줄수 있었다.

취재를 마치고 다음 취재지로 이동했다. 또 두시간의 시간을 거쳐 취재팀은 나르트소목 고거스타가차(那日图苏木 高格斯台嘎查)에 이르렀다. 나르트소목 고거스타가차라는것은 왜서 이렇게 긴가고 묻자 우리를 안내하던 현지 몽골족 기자는 우리한테 나르트소목의 소목이란 일종 행정급단위를 가리키는데 향급행정단위에 해당되며 고거스타가차의 가차는 행정촌과 평급단위라고 한다. 

우리가 취재할 목민 하스바트르 가정목장은 자치구의 고기소 양식시범기지라고 한다. 

하스바트르는 우리 취재팀을 문앞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하스바트르의 집은 현대화한 구조에 전통적인 몽골족 풍격의 가구와 기물들로 장식되였다. 하스바트르가 부어준 구수한 우유차를 마시며 우리는 취재를 시작했다.

하스바트르가 살고 있는 고거스타가차는 온친다가사지에 위치해 있어 초원의 생태가 취약하고 한다. 특히 최근 3년간 지속된 가뭄때문에 생태는 목축업발전의 근본으로 되고 있다며 생태를 개선하기 위해 현재 정부와 목민들은 갖은 노력을 다하고 있다.

하스바트르 로인은 현재처럼 련속되는 가뭄하에 많은 목민들은 경영난에 빠졌다며 만약 이러한 가뭄이 계속 된다면 온친다가사지의 복지에 있는 목축업은 큰 위험에 빠지게 될것이라고 우려를 표했다.

이러한 가뭄을 극복하기 위해 하스바트르는 여러가지 노력을 했다고 한다. 그는 첫째로 생태보호를 견지하고 둘째로는 사료용 청예옥수수의 재배를 견지하는것이며 우량소 수정란이식 사업으로 소의 품종을 우량화하고 넷째로는 방역을 잘하며 다섯째 살충작업을 잘하고 여섯째로 과학기술창신으로 목축업을 발전시키는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하스바트르는 소를 낮에 우리에 넣고 기르고 밤에는 초원에 풀어 놓는다고 한다. 이래야만이 낮에 소들의 활동량을 낮추어 사료에 대한 소모를 줄이고 소의 상태를 더욱 잘 관찰할수 있어 생육 최적시기를 놓치지 않을수 있다고 한다. 

하스바트르의 말에서 한 목민의 노력과 장인정신을 읽을수 있었다. 취재시작전 현지 몽골족 간부의 말이 생각났다. 많은 목민들은 하스바트르의 가정목장에 와서 기술과 경험은 배워갔지만 그의 근면하고 소박한 품질은 배워가지 못했다는 말이 가식적인 빈말이 아니라는것이 새삼스럽게 느껴졌다. 

하스바트르의 목장를 나온 취재팀은 정란기의 취재일정을 마치고 다음 취재지인 실린호트시(锡林浩特市)로 향했다.

중앙인민방송국 김정익

흑룡강라지오텔레비죤방송국 박청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