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은 시작으로 큰 꿈 이뤄낸 “따농남”
래원:연변일보      2017-04-18 14:29:31

고향이 화룡시 투도진 명동촌인 한영철씨는 1999년에 야망차게 청도에 진출, 그러나 가방끈이 짧고 배운 재간이 전무한 그가 청도에서 할수 있는 일은 많지 않았다.

회사 출퇴근을 반복하며 거의 일년간 친구 집에 얹혀살면서 “내 인생의 한방은 언제쯤 터질가”라며 전전긍긍하던 그의 인생이 어느날 야간포장마차에서 양고기 꼬치구이를 먹으면서 바뀌게 된다.

그의 입맛에는 별로였지만 함께 간 친구들이 맛있다고 호평일색인것을 보고 놀란것이다.

“그렇다. 화룡의 작은 꼬치를 청도에서 팔아보자!”

한영철의 머리에 떠오른건 맛과 향기가 일품인 고향 화룡에서 류행되던 작은 양고기 꼬치구이였다.

하나에 1원씩 하는 작은 양고기 꼬치구이가 2원짜리가 류행인 청도시장에서 먹힐것 같았다.

대학생 큰 아들에 비해 가방끈이 짧은 둘째 아들 때문에 항상 걱정이던 부모님들이 지원사격에 나섰고 녀자친구마저 응원해 나섰다.

그는 화룡의 지인을 찾아 양념 배합법을 배워왔고 녀자 친구와 함께 본격적으로 꼬치구이에 나섰다.

2012년 봄 “따농남”, 즉 따뜻한 농촌 남자라는 이름으로 명명된 간판이 청도시 성양구 야간포장마차 거리에 오픈했다.

그 누구도 자그마한 포장마차에 구이가마 달랑 6개로 시작한 꼬치구이가 돌풍을 일으키리라고는 예상하지 못했다.

살고기와 비게가 적당히 조합을 이루고 많이 먹어도 질리지않는 1원짜리 양고기 꼬치구이는 시영업 첫날부터 “따농남”이라는 독특한 브랜드를 타고 선풍적인 인기를 타기 시작하였다.

날마다 문전성시를 이뤘고 매출액은 급상승하여 하루 최고 1만 4000원까지 치솟았다.

대박이였다.

꼬치구이를 시작해서부터 그와 녀자 친구는 하루 3시간 이상 자본적이 없단다.

새벽3시까지 영업하고도 새벽 5시면 한영철은 어김없이 오토바이를 타고 시장에 가서 가장 신선한 식자재를 직접 구입했다.

“따농남”이 인기를 누리자 여기저기에서 작은 꼬치를 구워대기 시작했고 “따농남”은 일순간 위기에 봉착한다.

매출액이 떨어지기 시작했고 단골들이 이집 저집 기웃거리는것을 지켜봐야만 했다.

가족들은 요즘 옆집에서 잘 팔리는것이 어떠 어떤것이라면서 한번 해보자고 권장하였다.

그러나 한영철은 호의를 거절했다.

남들을 본따는건 영원히 누군가의 뒤꽁무니를 쫓아야만 한다는 판단 때문이였다.

“남들이 잘하는것을 굳이 모양새 내기 보다 내가 업계를 이끌고싶었습니다.”

노릇하게 구워진 고기사이로 뽀송뽀송 육즙이 배여나오는것을 지켜보면서 한영철씨가 수줍게 던진 한마디다.

가벼운 어조였지만 결연한 의지가 돋보였다.

흉내는 언제나 흉내일 뿐이다.

“따농남”을 본따는 가게는 많았지만 제맛을 내는 사람은 없었다. 작은 꼬치의 맛을 인정한 사람들은 또다시 청도 작은 꼬치 원조인 “따농남”을 찾았고 “따농남”은 다시 상승가도를 달렸다.

불과 일년만에 “따농남”의 한영철은 옷견지 3개를 달랑 들고 청도를 찾았던 백수 청년으로부터 살림집, 자가용과 이쁜 안해를 둔 멋진 청년으로 환골탈태했고 연태, 위해, 교주, 장가구는 물론 한국에도 체인점을 둔 사업가로 성장했다.

그러나 체인점이 늘어나면서 여러가지 문제들이 수면우로 떠올랐다.

장사가 억수로 잘되는 체인점이 있는가 하면 일부는 날마다 하락세를 보이다 심지어 문을 닫는 경우도 나타났다.

원인을 캐여 본 결과 장사가 안되는 체인점에서는 주방장의 입맛에 따라 맛을 조절했던것이다.

체인점의 경영관리에 직접 깊숙히 개입할수 없었기에 여러가지 문제가 발생했다는것을 알게 된 한영철은 현재 체인점 대신 직접 투자하고 직접 경영관리하는 직영점 개발에 책략을 두고 사업을 추진하고있다.

다음달 상해에 오픈하게 되는 “따농남”도 합작형식으로 운영하는 직영점이라고 한다.

인젠 성공한 기업가로 여유있게 보낼법도 하건만 이른 새벽 일찍 일어나 물건을 구입하고 양념을 배합하는것으로 시작하는 한영철의 하루 일과는 지금도 변함없다.

“확실하게 믿고 절대 맛보지 말라!”

한영철이 직영점에 내린 철같은 규정이다.

그는 그 누구를 불문하고 정해준 표준대로 원자재와 양념을 저울에 달아서 넣으라고 강조한다.

인간의 혀바닥은 간사해 컨디션의 좋고 나쁨에 따라 입맛도 틀려지기에 그때 그때의 입맛대로 하다보면 원래의 맛을 잃게 된다는것이 그의 지론이다.

요즘 한영철씨는 행복한 고민에 빠져있다.

이쁜 마누라에 세살짜리 귀염둥이 딸까지 있어 너무 행복하지만 가족려행을 떠나자는 안해의 요구를 들어줄수 없기 때문이다.

밤낮없이 꼬치만 구워 팔다보니 련애 한번 제대로 못하고 결혼했는지라 안해에게 항상 빚진 마음이여서 안해의 요구를 꼭 들어주고싶지만 지금은 아니라며 고개를 저었다.

“우리는 이만큼 잘 살고있지만 량가 부모형제들은 아직도 넉넉하게 생활하지 못하고있습니다. 주변 사람들이 다 잘 살 때 누려도 늦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잘 살아보겠다고 한국출국 꿈에 부풀어 6만원 고리대금을 꿨다가 몇해동안 뼈빠지게 고생했던 부모님의 피눈물 겨운 사연을 터놓으면서 한영철은 “량가부모님의 만년을 행복하게 해드리는것이 최대의 소원”이라고 했다.

고향행사가 있을 때마다 성금을 내어 후원하고 어려운 이웃들에게 항상 따뜻한 손길을 내밀었던 한영철씨는 올해 청도화룡향우회 부회장으로 당선되고 더 폭넓은 봉사의 길에 나섰다.

자그마한 양고기 꼬치에 희망을 담아 인생 대역전을 실현한 따뜻한 농촌남자 한영철, 꼬치구이의 외길을 달려가는 한영철의 래일에 진달래 미소를 보내주고싶다.

글·사진 허강일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