귤자주 모택동청년조각상을 찾아
래원:중앙인민방송국      2019-05-13 10:53:00

 

지난 4월28일 오후, 필자는 호남성 장사시에 도착했다. 도착한후 필자의 첫 걸음이 상강에 있는 귤자주 모택동청년조각상을 찾는것이다.

호남성 장사시에서 가장 유명한 주인 귤자주(橘子洲)공원은 남에서 북으로 상강중심을 가로지르고 서쪽은 악록산풍경구이고 동쪽은 장사성이다.또한 사면이 물인 섬으로서 길이가 10리, 좁은 곳은 40메터, 넓은 곳은 140메터, 부지면적이 91.64헥타르이고 한개의 길다란 섬으로서 장사의 중요한 명승지이고 국가 5A급 풍경구이며 국가 중점풍경명승구로서 장사의 ‘산, 수, 주, 성’ 관광 구조의 핵심요소이다.

필자는 호텔에서 택시를 타고 반시간 서쪽으로 달려 5.1대도로 해서 귤자주대교 중간인 상강중심의 섬인 귤자주공원에 도착했다. 이곳은 또 지하철 2호선이 여기를 통한다. 우리가 이곳에 내리니 구경을 마친 관광객들이 여러대의 관광차에서 가득 내리고 있었다. 여기서 관광차를 타고 섬의 동쪽길로 따라 록음이 우거진 아름다운 공원과 섬 량측 풍경을 구경하며 큰 짐배들이 오가는 생각보다 물이 넘치고 큰 상강, 동쪽의 강 건너 장사성을 바라보며 ‘이곳이 진정 섬이구나’ 라는 강한 느낌을 주었다.

남쪽으로 한참 달려서 종점에서 내렸다. 계속 남으로 몇분 걸어가 오후 네시쯤 귤자주의 중요한 경관인 모택동의 청년시기 모습의 대형 조각상 광장에 도착했다. 모택동조각상 앞에는 커다란 푸른 잔디밭이고 량쪽과 앞의 길에는 기념사진을 찍는 관광객들이 많았다. 오래전부터 이곳을 동경했던 필자는 흥분된 마음으로 비록 날이 흐리고 비방울이 떨어졌지만 시간을 다투어 여러각도로 사진촬영을 멈추지 않았다.

소개에 의하면 1911년에서 1925년 가을기간은 모택동이 장사제1사범에서 공부를 하고 사업하며 혁명활동에 종사해온 청년시기이다. 귤자주는 모택동이 청년시기 장사에서 제일 즐겨찾던 활동장소이다. 그는 혹은 혼자 귤자주두에 서서 천하를 논하고 혹은 동행자와 유람하면서 진리를 탐색하고 문장으로 백성의 격정을 불러일으키며 상강에서 수영하군했다. 1925년 2월, 모택동은 상해에서 호남에 돌아와 농민운동을 전개했다. 8월 소산에서 장사를 거쳐 9월에 광주로 향해 전국 농민운동강습소를 주관하게 되였다. 그는 장사에 머무는 기간 재다시 귤자주를 유람하면서 가슴이 설레이고 정겨운 청년시절이 추억되여 사람들의 입에 널리 오르내리는 명작 《심원춘. 장사》(沁园春 · 长沙)사를 썼다.

새중국이 성립한후 그는 청춘의 발자취가 가득 널려 있는 이곳을 매우 그리워했고 후에 이곳을 9차나 찾아왔다. 1959년6월24일, 모택동은 무한에서 호남을 시찰할때 기차에서 내려 직접 후자석에 와서 상강에 내려가 한시간넘께 수영을 하고 람악정에서 귤주에 올라섰다. 여기서 채농과 소학생들을 만나고 함께 기념사진을 찍으며 사람들에게 따듯하고 행복한 회억을 남겼다. 1974년, 모택동은 마지막으로 호남에 왔는데 당년에 81세의 고령으로 10월15일 아침,차를 타고 귤자주두를 찾았다. 12월 상순의 하루, 또 상강에 수영하자고 했지만 수온이 낮아 그만두고 말았다.

위인의 풍채를 회고하고 혁명정신을 전승해가기 위하여 중공장사시위, 장사시정부에서 호남성위에 보고하여 중공중앙판공청의 비준을 거쳐서 이곳에 모택동청년예술조각상을 세우기로 결정했다. 조각상은 1925년 모택동의 청년형상을 기초로 예술적으로 청년 모택동의 가슴에 웅대한 포부를 가지고 한창 젊고 재능이 넘치는 비범한 기개를 재현시켰다.

조각상은 철사슬과 콩크리트 틀 구조에 외부시설은 강구조이고 차룡골 밖에는 영정홍 화강암을 걸었다. 조각상 기반은 기념관이다. 높이는 32메터이고 길이는 83메터이며 넓이는 41메터이다. 4년간의 공정을 시작하여 2009년12월26일에 준공락성되였다.

이곳에는 외국인 관광객이 수십명이 사진을 찍고 귤자주두에서 관광을 하고 있었다. 필자도 귤자주두(橘子洲头) 관경대에서 상강의 물이 끊임없이 사품치며 북으로 흐르는 모습을 바라보며 조국의 아름다운 강산이 이토록 장관한것 바라보고 당년의 모택동을 상상하며 가슴이 설레였다.

글쓴이:마헌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