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학골목(府學胡同)
래원:국제방송      2016-11-18 10:32:00

북경 동성구 서북부 남라고항 남쪽입구 부근에는 상당히 널찍한 골목이 있다. 바로 부학골목(府學胡同)이다. 전체 길이가 681m, 너비가 7m되는 이 골목은 왜 부학골목이라 이름했을가?

옛날 최고의 교육기관이었던 태학, 즉 국자감은 모두 잘 알고있을것이다. 국자감은 국자감거리에 위치해 있고 이 거리에는 명나라와 청나라 시기 유명했던 '순천부학(順天府學)'이 있었다. 하여 부학골목이라는 이름을 얻게 된것이다. 그렇다면 부학은 또 어떤 곳이었을가? 부학은 북경 순천부의 학당, 도심에 있는 교육기관이였다.

명나라, 청나라 시기 북경의 정치기구를 순천부(順天府)라 불렀는데 오늘의 북경시정부와 비슷하다. 순천부학은 바로 시정부에서 관할하는 관변측 교육기구였으며 그 급별이 국자감 보다 낮았기때문에 태학이 아닌 부학이라 불렀다.

하지만 그 이전에 순천학부는 사실 사찰이였다고 한다. 원나라때만 해도 이 골목에는 부학이 아닌 보은사(報恩寺)라는 사찰이 있었다. 나중에 보은사 안에 부학이 건설된것이다.

여기에는 흥미로운 이야기가 깃들어 있다.

원나라때 한 승려가 있었는데 오래동안 시주를 받아 모은 돈으로 이 골목에서 보은사를 어렵게 건설했다. 기원 1358년 사찰이 금방 건설되고 내부공사가 아직 마무리 되지 않아 불상도 들어서지 않았는데 주원장(朱元璋)과 서달(徐達) 장군이 군사를 거느리고 원대도에 입성했다. 그후 원나라가 멸망하고 원대도는 명나라의 천하가 됐으며 그 이름도 '북평부(北平府)'라 개명됐다.

주원장은 비록 민초 출신이였지만 유학을 공경했던 관계로 그 누구든 공자묘를 파괴하거나 강탈해서는 안된다고 명령했다.

이 소식을 접한 승려는 즉시 사람을 시켜 사찰에 공자상을 세웠다. 그러자 골목에 쳐들어온 군사들이 공자상을 보고 감히 사찰을 건드리지 못했다.

그 후에도 승려는 공자상을 치우지 못하고 사찰에서 공자상을 봉안하기로 했다. 하지만 공자상은 보통 서당에서 봉안했던 원인으로 사람들은 사찰내에서 학당을 개설했다.

이 학당은 대흥현학(大興縣學)이었는데 부학보다 한등급 낮았다.

명나라 영락(永樂)원년인 1403년에 영락제(永樂帝) 주체(朱棣)가 도읍을 북쪽으로 옮기고 북평은 대명황성이 됐다. 따라서 북평부는 순천부로 승격했고 원래의 북평부학은 국자감이 됐으며 이 후퉁에 있던 대흥현학은 순천부학이 됐다.

그 원인으로 이 후퉁도 '부학골목'으로 불리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