락엽 따라 가버린 청춘… “가을 타나?” “가을 우울증입니다!”
래원:동아일보      2018-09-15 10:44:00

50대 중반의 A 씨는 요즘 시간이 남아돈다. 주 52시간제 근무가 시행되기 전인 지난해부터 회사가 야근 금지와 정시 퇴근을 ‘강요’하고 있기 때문이다.

처음에는 저녁 시간에 여유가 생긴 덕에 해방감까지 느껴지기도 했다.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무기력해지기 시작했다. 20년 넘게 나름대로 ‘잘’ 돌아가던 생활 패턴이 갑자기 바뀐 탓이다. 퇴근 후에 동료들과 한잔 걸치고 이야기꽃을 나누던 때가 그리워졌다. 아내가 “저녁 먹고 들어올 때가 난 편했는데…”라고 농담할 때면 서운하게 느껴졌다. 후배들처럼 자기계발에 열정을 쏟을 나이도 지났고, 무엇을 해야 할지도 막연하다.

최근에는 환절기가 시작돼서인지 온몸이 찌뿌드드한 때가 많다. 선선한 바람이 부니 우울하기까지 하다. 소파에 오래 앉아 있다 일어날 때 자신도 모르게 “끙” 하는 소리를 내고는 스스로 놀란다. TV 리모컨을 들고 요리조리 채널을 돌리는 자신이 한심스러울 때도 많다. 하지만 병원에 가고 싶지는 않다. 무슨 병이라도 걸렸다는 소리를 들으면 절망에 빠질 것 같아서다.

주 52시간제 근무가 모든 직장인들에게 행복을 가져다준 것은 아니다. 회사라는 틀에서 젊은 시절을 보낸 중년 남성들에게는 박탈감을 주기도 한다. 이래저래 대한민국 중년 남성은 피곤하고 우울하다. 하지만 정확한 원인을 알지 못한다. 심리적 원인인지 신체적 변화에 따른 원인인지 검사를 해봐야 알지만 중년 남성들은 병원 가기를 꺼린다. A 씨도 “이 정도로 유별나게 굴 거까지 있나”라며 병원을 가보라는 지인들의 권유를 거절했다.

○ 가을을 탄다? 우울증 의심해봐야

50대 초반의 직장인 B 씨는 요즘 들어 축축 처지는 느낌을 지울 수 없다. 좀처럼 즐거운 기분이 들지 않고 항상 피곤하다. 눈치도 없이 위장은 자꾸 먹을 것을 달라 한다. 폭식이 늘어난다. 환절기라서 그런지 몸이 부슬부슬 떨리기도 한다.

B 씨는 그 이유를 알 수 없다. 폭염으로 힘든 여름을 났으니 선선한 가을바람이 반갑다. 곧 다가오는 명절도 손꼽아 기다리고 있다. 오랜만에 고향에 내려가 친척과 친구들을 만날 수 있다는 마음에서다. 그런데도 이 우울한 기분을 지울 수 없다. 도대체 왜 그럴까.

40대 이후에서 이런 증세를 보인다면, 자신도 모르게 “가을을 타는 것 같다”고 말한다면, 그러면서 특별한 이유 없이 우울해졌다면 ‘가을 우울증’일 가능성이 높다.

우울증은 계절의 영향을 많이 받는 질환으로 알려져 있다. 이런 질환을 ‘계절성 우울증’이라고 별도로 분류할 정도다. 가을 우울증의 원인은 명확하게 밝혀지지 않았다. 다만 가을로 접어들면서 일조량이 감소하고 기온이 떨어지는 자연현상과 관계있는 것으로 추정할 뿐이다. 정석훈 서울아산병원 정신건강의학과 교수는 “자연 현상의 영향을 받아 뇌에서 화학물질이나 세로토닌, 멜라토닌 같은 호르몬의 변화가 생겨 우울증이 나타나는 것으로 추측하고 있다”고 말했다. 정 교수는 이어 “가을 우울증은 겨울까지 이어지는 게 보통이며 봄이 돼야 증세가 개선되는 경우가 많다”고 덧붙였다.

가을 우울증의 증상은 일반 우울증과 비슷하다. 기분이 저하되고 우울한 느낌에 빠진다. 쉽게 피로를 느끼며 집중력이 떨어진다. 긴장감과 초조감을 느끼며 스트레스를 받으면 평소보다 더 큰 상처를 받거나 폭발할 수도 있다. 나가기 싫고, 방에 처박히려는 경향도 보인다.

다만 가을 우울증은 다른 우울증과는 달리 식욕이 증가하는 게 특징이다. 특히 탄수화물이 많이 들어간 음식을 탐하는 경향이 있다. 그 결과 체중이 증가하기도 한다. 잠의 품질도 크게 떨어진다. 불면까지는 아니지만 잠을 충분히 자도 개운하지 않고 졸리기만 하다.

매년 가을에 같은 증세가 반복되고 그 정도가 심해진다면 방치해선 안 된다. ‘봄이 되면 절로 낫겠지’라고 생각하고 그냥 넘어갔다가 우울 증세가 더 깊어질 수도 있다. 게다가 심리적 피로가 신체적 질병으로 이어질 수도 있다. 가급적 의사를 찾아 상담을 받아보는 게 좋다.

○ 성호르몬 수치를 지켜라

50대인 A 씨의 증세를 의사에게 들려주고 간접적으로 진단을 의뢰한 결과, A 씨의 호르몬 수치를 측정하지 않았기 때문에 단언할 수 없지만 일단 ‘갱년기 증세’를 보이는 것 같다는 답이 돌아왔다.

남성 갱년기는 40대 후반 이후 남성호르몬(테스토스테론)의 분비가 줄면서 나타나는 신체적·심리적 증세를 가리킨다. 대한남성과학회의 자료에 따르면 국내 40대 이상 남성의 30% 정도가 남성 갱년기를 겪는다. 50대로 가면 치료가 필요할 정도로 갱년기 증세가 심해지기도 한다. 경윤수 서울아산병원 건강증진센터 교수팀이 2년 동안 이 병원에서 건강검진을 받은 50대 이상의 남성 3115명을 대상으로 조사한 결과 10%(307명)는 치료가 필요할 정도로 남성호르몬 수치가 낮았다.

남성 갱년기의 대표적인 증세는 성욕 감소 같은 성기능 장애다. 하지만 우울증을 겪을 때의 증세도 나타난다. 이를테면 우울한 느낌이 커지고 무기력해지며 모든 일에 의욕이 사라진다. 불안을 호소하는 경우도 있다. 이 때문에 갱년기 증세와 우울증을 혼동하기도 한다. 하지만 남성 갱년기의 우울한 느낌은 남성호르몬의 부족에 그 원인이 있다.

따라서 남성호르몬의 수치를 떨어뜨리지 않도록 일상생활을 관리하는 게 가장 중요하다. 규칙적으로 운동하고 단백질이 풍부한 식품을 먹어야 한다. 몸이 힘들다고 해서 근력 운동을 게을리해서는 안 된다. 나이가 들면서 근육이 약해지기 때문이다. 유산소 운동과 근력 운동을 병행하도록 한다.

심리적 원인을 제거하려는 노력도 중요하다. 안철우 강남세브란스병원 내분비내과 교수는 “과도한 업무 스트레스는 남성호르몬의 감소를 유발한다. 하지만 업무가 줄어들었다고 해도 바뀐 생활 패턴에 적응하지 못하고 심한 스트레스를 느낀다면 이 또한 남성호르몬 수치를 떨어뜨리는 원인이 된다”고 말했다. A 씨가 이런 경우에 해당한다. 실제로 60대 이후에 은퇴하는 남성의 경우 공허함과 무기력증이 겹치면서 남성호르몬 수치가 급격하게 낮아진다.

○ 유쾌한 중년으로 살기

남성 갱년기는 그 자체로 큰 병이 아니다. 다만 나타나는 증세들이 다른 신체적·심리적 질병으로 악화할 수 있다. 이를테면 우울한 느낌이 만성적인 우울증이 될 수 있다는 얘기다. 만성질환을 갖고 있는 중년 남성이라면 더욱더 조심해야 한다. 실제로 의외로 많은 사람들이 대수롭지 않게 여기다가 증세가 심해지고 나서야 병원을 찾는다.

무엇보다 긍정적으로 세상을 바라보려는 마음이 필요하다. 안 교수는 “떨어지는 락엽을 보면서 인생무상을 생각하지 말고, 가족과 여행할 계획을 짜보려는 전향적 자세가 있어야 한다”고 말했다.

그래도 갱년기 증세가 심해진다면 치료를 고민해 봐야 한다. 일단 호르몬 치료가 가장 보편적이다. 치료기간은 남성의 건강 상태에 따라 달라진다. 그러니 먼저 검사를 한 뒤 의사와 상담해서 치료법을 결정한다. 섣불리 민간요법에 의존하거나 정력에 좋다는 정체불명의 식품을 먹는 것은 금물이다. 모든 병이 그렇듯이 갱년기에 특효인 식품이나 약은 없다. 규칙적인 운동과 생활습관 관리가 정답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