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지팥죽
래원:중앙인민방송국      2003-07-14 00:00:00

동지날에 쑤는 붉은 팥죽. 동지날을 아세(亞歲)라 했고 민간에서는 작은설이라 하였다. 옛날부터 이날 팥죽을 쑤어 조상께 제사 지내고 대문이나 벽에 뿌려 귀신을 쫓아 새해의 무사안일을 빌던 풍습에서 남아 있는 절식이다. 동지팥죽은 새알심을 넣어 끓이는데 가족의 나이 수대로 넣어 끓이는 풍습도 있다. 그래서 팥죽을 먹어야 한 살 더 먹는다는 말이 전해 오고 있다.

유래

『형초세시기(荊楚歲時記)』에 의하면 “공공씨라는 사람이 재주 없는 아들을 두었는데 동짓날에 그 아들이 죽어 역귀가 되었다. 그 아들이 생전에 팥을 몹시 두려워했으므로 동짓날에 팥죽을 쑤어 역질 귀신을 쫓는 것이다(共工氏有不才之子, 以冬至死爲疫鬼, 畏赤小豆, 故冬至日作赤豆粥以禳之……).”라고 했다. 이러한 풍속이 우리나라에 전래된 것으로 여겨지나 전래된 시기는 알 수 없다. 고려말의 학자인 이색(李穡)의 『목은집(牧隱集)』에 팥죽의 기록이 있으니, 그 이전부터 팥죽을 먹어왔을 것은 분명하다.

내용

동지는 해가 가장 짧은 날이라 음(陰)이 극에 달한 날이어서 음성인 귀신이 성하는 날이다. 이를 물리치기 위해 상대적인 양(陽)의 기운을 요구하게 된다. 그래서 양을 상징하는 붉은 팥죽이 음의 기운을 물리친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고대인들은 붉은 색이 주술적인 위력을 지닌 것으로 믿었다. 그래서 태양, 불, 피 같은 붉은 색을 생명과 힘의 표식으로 삼았고 이를 숭상한 것이다. 따라서 동지는 태양이 죽음에서 부활하는 날로 여겼기 때문에 고대인들의 적색 신앙의 잔영으로 붉은 색의 팥죽을 쑤게 된 것이다.

『해동죽지(海東竹枝)』에 “붉은 팥으로 집집마다 죽을 쑤어 문에 뿌려 부적을 대신한다. 오늘 아침에 비린내 나는 산귀신을 모두 쫓으니 동지에 양기 나면 길한 상서 맞는다.”라는 시에서 보듯이 붉은 팥죽의 벽사성을 알 수 있다.

동짓날 팥죽은 조상께 제사 지내고 방, 마루, 광, 헛간, 우물, 장독대에 한 그릇씩 놓는다. 또 들고 다니며 대문이나 벽에 뿌리면 귀신을 쫓고 재앙을 면할 수 있다고 믿었다.

고조리서인 『규합총서(閨閤叢書)』, 『군학회등(群學會騰)』, 『부인필지(婦人必知)』 등에 구체적인 조리법이 기록되어 있고, 그것들이 오늘날까지도 이어져오고 있다. 붉은 팥을 씻어 일어서 물을 충분히 붓고 한소끔 끓인다. 그 물을 버리고 새 물을 다시 부어 팥이 터질 때까지 푹 삶아서 거르고, 찹쌀가루는 익반죽하여 새알 모양의 단자를 만든다. 이를 새알심이라고 한다. 거른 팥의 웃물을 먼저 붓고 끓여 빛깔이 고와지면 앙금을 넣어 저으면서 다시 끓인다. 펄펄 끓을 때 새알심을 넣는데 새알심이 떠오르고 짙은 팥색이 되면서 걸쭉해지면 소금으로 간을 하여 불에서 내려놓는다. 식성에 따라 설탕을 넣어 먹기도 한다. 동지를 작은설이라고 했기 때문에 팥죽을 먹어야 한 살을 더 먹는다고도 했다.

의의

세시음식을 차려먹는 것에는 같은 민족으로서 일체감을 결속하는 의미가 담겨 있다. 동지팥죽도 같은 재료로 만든 음식을 모든 사람이 먹음으로써 신분의 격차가 극심했던 시절에도 민족의 동질성 확인이나 강화와 함께 사회적, 신분적, 경제적 격차를 좁히는 평등화의 강화에 기여했다고 본다. 한편 동지팥죽에는 가족과 이웃이 같은 음식을 나누어 먹으면서 새로운 한 해에 건강하고 액을 면할 수 있기를 기원하고 우리 마음속의 사악함도 씻어내기를 염원하는 정성도 깃들여 있다.

기타

경상도에서는 동구 밖에 서있는 신목(神木)에 금줄을 치고 팥죽을 뿌려 마을의 안일을 빌었다. 전라도에서는 새해 풍년을 점치는 데 팥죽을 썼다. 동지 외에도 여름 삼복에도 끓이며 이사하거나 새 집을 지었을 때도 팥죽을 쑤어서 잡귀를 쫓아내고 무사를 기원했다. 전염병이 창궐할 때에도 팥죽을 쑤어 길에 뿌려 병마를 쫓았으며 초상집에 팥죽을 쑤어가 잡귀를 범접하지 못하게도 하였다.

편집: 심영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