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제통치시기 조선족의 주택상황 3
래원:중앙인민방송국      2016-02-25 15:08:00

일제통치시기 동북3성에 거주한 조선족 인구는 200만명이 넘었는데 그중 대부분은 농민이였다. 이 시기에 일제는 조선족들과 한족들의 관계를 리간시키기 위하여 조선족들에 대해 회유, 리용하는 정책을 실시하였다. 그리하여 조선족농민들이 임자 없는 황무지를 마음대로 개간하였을뿐만아니라 돈만 있으면 지주들의 토지도 얼마든지 살수 있게 되여 토지를 소유하고있는 농민들이 민국시기보다 훨씬 많아졌다. 하여 자연히 자기에게 속하는 주택을 짓고 사는 사람들이 많아졌다.

이 시기에 조선족농민들의 주택형태에 있어서 새로 나타난 현상은 집단이주민들의 주택이였다. 일본침략자들은 조선사람을 리용하여 동북에서 많은 수전을 개발하기 위하여 여러가지 기만술책을 써 허다한 조선농민들을 동북으로 이주시켰다. 그들에게 마련된 집은 모두 군대의 병영식으로 지은것인데 조선족들은 그것을 “줄집”, “어부렁집”이라고 불렀다. 조선족의 주택류형에서 이런 형태가 나타난것은 이때가 처음이였다.

1) 문헌기록

(1) 리훈구 ≪만주와 조선인≫, 평양숭실전문학교 경제학연구실, 소화 7년 8월 29일 발행.

조선인 이주민의 대다수는 보통 冬節에 만주로 간다… 엄동 寒節에 그들은 먼저 와서 있는 조선인 이주자 집단지에 가서 寄生적으로 살던지 또는 생활의 대가로 翌年農場에서 勞動을 하겠다든지 혹은 地主가 命하는 무엇이든지 하겠다는 契約아래서 中國人地主가 給予하는 음식과 거처할 곳에 살러간다.

소위 “馬架子”라는것은 單間방으로 되였는데 이 馬架子는 一時적 목적을 위한 移住者가 많아서 개척사업 기간을 위하여 사용되는것이다. 이런 주택건축재료는 형편에 따라 다르다. 例를 들면 森林지역에는 木材가 광범히 사용되고 一方 다른 지방에서는 粘土와 沙土의 混合物을 사용한다. 지붕은 안장과 같고 보통으로 蒿와 草類로 덮는다. 室內의 取溫法은 所謂 “炕”으로 한다. 炕은 室內한구석 땅우에 둔 粗暴한 寢床같이 보이지마는 이것이 一便에는 出口가 있고 다른 편에는 煙突이 있다. 火口에서 연료가 연소될 때에는 화염과 연기는 石板 혹은 煉瓦板아래로 퍼져 마즈막으로 지붕구역을 뚫고 연통을 통해야 나가버린다. 조선인은 이 炕과 류사한 온돌을 사용한다. 온돌은 炕과 같은 불아궁이가 室外에 있고 방바닥 전부가 石板으로 깔리운것이다. 硝子窗은 사용치 않고 紙窗을 사용한다. 그 紙窗의 大小와 數가 보통 적은 결과로 通氣의 불편이 있고 室內를 어둡게 또는 음울하게 만든다.

(2) ≪화룡현 일반정황(한문)≫ 강덕 2년.

주택은 여전히 고대의 형식을 따랐는데 지붕은 4개 경사면으로 되여있고 일반적으로 짚으로 지붕을 하며 토기와나 양철기와를 올린것도 간혹 있다. 주택구조가 간단하여 짓기 쉬우며 비용도 수십금이면 된다. 집안은 비교적 협소하지만 빈부를 막론하고 모두 침실, 객실, 부엌간 등 3개 부분으로 나누어져있다. 그 격식은 일본주택과 다소 비슷하다. 방에는 모두 통구들을 놓았으므로 밖에서 방안으로 들어가려면 신발을 문밖에 벗어놔야 한다. 오로지 농민들의 주택만은 우사간이 주택내에 설치되여있는데 위생에 불리하므로 최근에 와서 우사간을 집밖으로 옮기도록 요구하였으나 아직 철저한 개변을 이루지 못하고있다.

2) 조사실례

(1) 연변

① 렴춘덕: 남성, 1918년생, 화룡시 숭선진 상천촌에 거주. 1998년에 조사.

렴춘덕은 1943년에 숭선과 두만강을 사이두고있는 삼장리에서 개척단이민으로 상천촌에 이주해왔다. 도합 25세대가 되는 개척단이 상천이란 곳에 오니 주택뿐만아니라 솥과 그릇 같은 취사도구도 마련돼있었는데 무상으로 제공한것이 아니라 모두 빚으로 안기였다. 그들이 거주한 주택은 모두 일본사람들이 한족사람을 고용하여 한족집식으로 지은것인데 집 한채에 두호씩 들게 하였다.

집단개척민 주택평면도

① 출입문 ② 부엌 ③ 침실 ④ 연통

② 왕청현 백초구진 팔과수촌. 2001년 2월 7일에 조사.

조선족주택은 일반적으로 남향집을 짓는다. 그런데 20세기 30년대에 집단이주민들이 이곳에 와서 마을을 건립할 때 모두 동향집을 지었다. 마을의 남쪽과 북쪽에는 모두 산이 가로놓이고 동서로 골짜기가 형성되였는데 남향집을 지으면 산에서 활동하는 항일유격부대와 련락암호를 주고받기 쉽다 하여 당국에서 강박적으로 동향집을 짓게 하였던것이다. 그때 지은 주택은 너비 4메터, 길이 10메터, 높이 2메터 되는데 집 한채에 두세대가 거주하였다.

③ 허창섭: 남성, 1915년생, 연길시 장백향 명신 4대에 거주. 1999년에 조사.

일제시기 연길일대 함경도사람들의 8간초가집 평면도

① 출입문 ② 부뚜막 ③ 아래방 ④ 퇴마루 ⑤ 중간방 ⑥ 웃방 ⑦ 고방 ⑧ 웃고방 ⑨ 연통 ⑩ 마구간 ⑪ 방아간

* 아래방에는 세대주 내외와 어린 자식들이 거주하고, 중간방엔 할아버지, 할머니가 거주하고, 웃방에는 손님을 모시고 고방에는 아들이나 딸이 들고 웃고방에는 사감을 모신다.

(2) 길림성

① 윤진술: 남성, 1921년생, 류하현 강가점진 강가점촌에 거주. 1992년에 조사.

윤진술은 1935년에 조선에서 강가점으로 이사왔다. 1943년에 몇십호가 되는 집단이주민들이 강가점에 왔는데 그들을 위하여 당국에서 한족들을 고용하여 한족식주택을 지어놓았다. 실내구조는 단칸짜리도 있고 남북구들로 된것도 있었다. 온돌을 만들 때 땅을 공글고 다진 다음 구들골을 판다. 그우에 버들가지같은것을 엮어서 펴고 진흙을 바른다. 또 그우에 버들가지를 펴고 흙을 바른다. 불을 때면 아래층의 버들은 타도 웃층의 버들은 타지 않는다. 이런 구들을 “골방”이라고 하였다. 출입문의 문틀은 도끼로 찍어 만들었고 창문은 철창모양으로 만들고 종이를 붙였다.

집단이주민들의 주택구조

① 출입문 ② 부뚜막 ③ 온돌 ④ 창문 ⑤ 연통

② 집안시 량수조선족향 영천촌 백교장의 주택, 1989년에 조사.

이 주택은 1930년대에 지은것인데 평안도식주택이라고 한다.

집은 길이 44자, 너비 11자이고 모두 네칸인데 매칸의 길이가 11자이다. 서쪽켠 두칸의 앞에 널판자로 만든 섬돌이 설치되여있었는데 길이 22자, 너비 2.4자, 높이 1.6자 되였다. 부뚜막에는 솥 4개를 걸었다. 지붕은 배집형이고 이엉은 벼짚을 올렸다. 벽은 토벽이다.

(3) 료녕성

김문성: 남성, 1919년생, 관전현 석호구향 만보촌에 거주. 1993년에 조사.

일제시기에 만보촌에서 지주의 소작농으로 있은 사람은 지주집의 사랑채에서 살았는데 그것을 “헤프살이”라고 하였다. 실내구조는 한쪽면 구들 혹은 남북구들이였다.

(4) 흑룡강성

박순희: 녀성, 1914년생, 탕원현 탕왕조선족향 금성촌에 거주. 1989년에 조사.

박순희는 30세때(1944년) 그의 가족들과 함께 빈현에서 배를 타고 송화강을 따라 탕원현경내로 들어왔다. 임자 없는 황무지를 개간하고저 왔던것이다. 처음엔 무연한 대밭에서 초막을 짓고 살다가 후에 토막집을 짓고 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