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국시기 조선족의 주택상황
래원:중앙인민방송국      2016-02-25 15:00:00

1910년 8월 29일에 체결된 ≪한일조약≫에 의해 조선은 완전히 일제에 병탄되였다. 하여 민국초기에는 동북3성의 지방정부에서 조선류랑민들을 나라 잃은 사람들이라고 불쌍히 여겨 동정하는 태도를 보였다. 하지만 그후에 와서는 일본침략자들이 자기네 국민인 조선사람을 보호한다는 구실을 대고 동북에 침투하자 중국정부가 조선류랑민들을 보는 시각은 점차 달라졌다. 조선사람을 우환거리로 생각하고 조선사람들의 거주권과 토지소작권을 박탈하는 구축정책을 실시하였다. 이런 정책은 1927년 8~9월에 봉천성(지금의 료녕성)에서부터 형성되여 동북3성에 퍼지게 되였는데 봉천성과 길림성이 가장 참혹하고 흑룡강성이 그 버금으로 갔으며 연변일대는 ≪간도협약≫의 규정이 있으므로 상대적으로 박해가 경하였다. 이리하여 민국시기 연변일대에 거주하는 조선족들의 주택은 기타 지방에 비해 좀 나은 편이였다.

1) 문헌기록

(1) ≪滿洲及西比利亞地方に於ける朝鮮人事情≫ 朝鮮總督府京城印刷所 大正十二年(1923)八月一日發行.

① 길림성의 장백현, 림강현 일대

장백현, 림강현(臨江縣) 일대는 주로 함경남도의 산골처럼 귀틀집을 사용하였는데 길고 둥근 큰 원목을 옆으로 쌓아올렸고 네귀는 도끼로 깎아 맞물리게 조합하였으며 벽은 안팎 량면에 진흙을 발라 보온하게 하였다. 지붕은 널판(두께 4.5푼) 또는 짚으로 덮었으며 천정은 펴는것이 없었다. 온돌에 노전을 펴는것은 그 지방 조선인중에서 상등생활을 하는자에게만 속하였다.

② 길림성의 집안과 봉천성의 관전현 일대

집안, 관전 등 각 현 지방은 대안인 평안북도내의 농부와 큰 차이가 없이 빈궁한자가 많아 이른바 토굴집에서 살았는데 못이나 철재를 사용함이 없이 친척, 친우들에 의거하여 지은것이여서 매우 허술하였다. 대개 3, 4년 혹은 5, 6년밖에 견디지 못하였다.

③ 북만주지방

(도시) 가옥은 흔히 중국인의것을 차입했는데 중국식, 로씨야식이 많았고 자기가 소유한 가옥은 희소하였으며 역시 중국식과 로씨야식이 많았다.

(농민들의 일면파일대) 집은 중국식이 많았고 초라한 조선식집은 희소하였다.

④ 두만강대안 북간도지방

거의 온돌식 조선가옥이였다. 주택은 상부내(商埠內)에서는 상당히 문호양식(門戶樣式)을 잘 갖춰 조선 시가지에서의 거주상태와 별로 다를바 없었다. 그러나 시골주택은 일반적으로 왜소하고 저렬하였다. 거칠게 다듬은 원목을 기둥으로 하였고 벽은 수수짚으로 엮었으며 그우에 진흙과 굵은 모래를 섞어 발랐다. 이엉은 수수짚을 편 우에다 얕게 흙을 올리고 그우에 새를 얹었다.

집안은 대개 3개로 구분을 하였는데 하나는 축사 겸 창고와 부엌간이였고 나머지 두칸은 방으로 하고 온돌을 놓았다. 집주변에는 수수짚으로 울타리를 세웠다. 그런데 그 부근은 오물을 퇴적하여 역한 냄새가 코를 찔렀다. 그리고 주요 재산인 소, 돼지와 함께 거처하였다. 그 생활상은 중국인보다 렬악하여 때로는 중국인의 멸시를 받기도 하였다. 그러나 이주한지 오랜 조선인가운데서 다소 재산을 모은자거나 금방 이주해온자라도 다소의 재산을 가진 조선인은 건축재료를 통나무 대신 각재를 썼으며 흙벽 대신 생벽돌(해빛에 말리운것.)을 썼다.

⑤ 흥개호일대(지금의 흑룡강성경내에 있음)

이 지방에서도 조선인이 거주하는 가옥은 조선식으로 온돌을 놓았다. 유리창문이 전혀 없고 창문에는 창호지를 붙였으며 집밖으로 통하는 출입문은 취사간 남쪽에 하나만 설치하는것이 통례였다. 집안은 모두 흙으로 바르고 깔개로는 좁고 얇은 나무오리대로 결은 구름나무 노전을 폈다. 집안의 구조는 취사간과 침실 한칸으로 되여있었다. 건축비는 대개 20원쯤(당시 화페) 하였다고 한다.

(2) ≪白頭山行記≫ 윤화수 저, 1926년에 출판.

이 책은 병인년(1926년)에 윤화수 등 다섯사람이 룡정에서 출발하여 장백산을 답사하던 과정에 연도에서 보고 듣고 느낀것을 기록한 책이다.

그때 두도구에서 영생천(永生泉)목욕탕을 경영하고있던 백우학이란 사람의 주택에는 대청마루방이 설치되여있었으며 벽에는 벽시계까지 걸려있었다.

윤화수 등 일행이 주민이 7~8호밖에 안되는 사동(寺洞)이란 마을에 이르러 한 농가에서 밤을 지내게 되였는데 그때의 광경을 다음과 같이 기술하였다.

여기에는 자미스러운 이야기가 있다. 農牛와 한방에서 자고 한가마에서 먹게 되였다. 소가 伸欠할 때에 그 코물과 침은 우리 자는 넙(입)과 이마에 떠러지지 아니하면 우리의 밥짓는 가마에 드러가게 생겼다.

(3) ≪吉林省東部地方の狀況≫ 朝鮮總督府編 昭和三年(1928)

(간도지방의) 住家는 한世帶를 一家로 構造돼 있고 생활양식은 조선내지와 비슷하다. 敦化、額穆、寧安 등 각 현을 놓고보면 수세대의 수십인이 되는 사람들은 부엌별로 동거하고있다. 이주한 시간이 아직 오래지 못함으로 집을 질 資力이 없고 집이 적고 또한 집세가 높아 곤난을 받는다…호별로 생활하는데 同鄉者 혹은 인연이 있는 자들로 相寄하여 동거하며 한호가 단독으로 생활하는 집은 희소하고 집이 왜소하고 초라한 점은 일본의 灰小屋과 다름없다.

(4) ≪훈춘현지≫ 1927년

농촌의 주택은 초가집이 많았는데 간혹 기와집도 있었다. 집둘레에는 나무가지로 엮은 울타리를 세웠다. 8간짜리집도 있었는데 웃방(손님방), 아래방(주인의 방), 안방(녀자의 방), 고방(살림기구를 두는 곳), 부엌간, 우사간, 창고 등으로 구분되여있었다. 일반적으로 6간짜리가 많았다. 식구가 많거나 생활수준이 중급이상에 속하는 가정에서는 본채외에 사랑채를 따로 짓고 주인의 거실과 손님접대실로 사용하였다. 사랑채는 3간으로 되였는데 한칸방의 너비와 길이는 7~8자(尺) 정도 되였다. 주택의 매 칸마다 모두 출입문이 설치되여있는데 아래방과 웃방에는 남자만 출입하고 안방과 고방에는 녀자만 출입한다. 방에는 모두 온돌을 놓았으며 방과 방사이는 널판자나 흙벽으로 막았다. 소나 말은 주택안에 설치한 우사간에서 사양하였고 돼지는 집밖의 돼지굴에서 사양하였다.

2) 조사실례

(1) 연변

① 심정방: 남자 1914년생, 룡정시 동성용진 룡산촌 룡암툰에서 태여나 지금까지 이 마을에서 살고있음.

김계숙: 1912년생, 심정방의 안해, 1931년에 결혼.

심정방의 주택은 20년대에 지은 초가집인데 주택의 평면도는 아래와 같다.

심정방 주택 평면도

① 출입문 ② 부엌간 ③ 부뚜막. 솥은 조선족식 무쇠솥. 솥뚜껑은 나무뚜껑 ④ 땅가마 ⑤ 정지간, 아래방, 아들며느리와 그의 자식들의 거처 ⑥ 홰대보 ⑦ 덕대(찬장): 벽에 쐐기를 2개 밖고 널판자를 얹었다. 그우에 함지, 물함박, 토기장 같은것을 얹어놓았다. ⑧ 외양간(지금은 소가 없다.) ⑨ 방아간(지금은 방아간을 앞마당 한옆에 설치하였다) ⑩ 웃방: 시아버지와 시어머니의 거처 ⑪ 고방: 시누이들의 거처 ⑫ 농짝: 고방의 남쪽벽에 쐐기를 2개 박고 농짝을 4개 얹어놨다. 그중 2개는 시어머니것이고 2개는 며느리(김계숙)것이다. 모두 시집 올 때 가지고 온것이다. ⑬ 연통 ⑭ 널판자로 간단히 막은 벽 ⑮ 흙벽

② 김태연: 남성, 1924년생, 화룡시 남평진 남평촌에 거주. 1999년에 조사.

아래에 소개하는 주택은 민국초기에 건축한것으로서 본래는 김태연이 거주하였는데 지금은 그의 조카가 살고있다.

김태연의 량통형 8간짜리 초가집 평면도

① 출입문 ② 부엌간 ③ 부뚜막 ④ 작두간 ⑤ 우사간 ⑥ 방아간 ⑦ 아래방 ⑧ 중간방 ⑨ 한웃방 ⑩ 중간고방 ⑪ 한웃고방 ⑫ 되창(들창) ⑬ 퇴마루 ⑭ 연통

(ㄱ) 작두간: 작두를 넣어두는 시설.

(ㄴ) 등디: 흙으로 만든 화로. 무쇠로 만든것은 화로라 한다. 등디나 화로는 작두간우에 놓는다. 때문에 부엌간에서 온돌로 올라가는 온돌의 가장자리를 등디목이라 한다.

(ㄷ) 코굴: 일종 조명시설인데 등디우에 설치하여 재가 등디나 화로에 떨어지게 한다.

(2) 길림성

① 송종진: 남성, 1928년생, 길림시 룡담구 강북향 류수촌에 거주. 1992년에 조사.

송종진의 주택 내부구조와 시설

① 출입문 ② 동켠방 ③ 서켠방 ④ 부엌간 ⑤ 부뚜막 ⑥ 앞방 ⑦ 뒤방 ⑧ 봉당 ⑨ 단스(옷장) ⑩ 테블과 궤 ⑪ 창문 ⑫ 연통

이것은 완전히 만족식(한족식도 이러함.)으로 꾸린 주택이다. 민국시기에 조선족들이 처음으로 이 마을에 이주하여왔을 때 이런 식으로 꾸린 한족집을 세맡으면 한쪽 칸을 임차하는 경우도 있고 한개 실내에서 한쪽 구들만 임차하는 경우도 있었다. 남쪽구들을 임차하면 “앞방살이”를 한다고 하고 북쪽구들을 임차하였으면 “뒤방살이”를 한다고 하였다. 앞방살이나 뒤방살이를 하는 경우엔 밤에 잘 때 남북 구들사이에 휘장을 쳤다.

② 리종복: 남성, 1908년생, 영길현 강밀봉진 서광촌에 거주. 1992년에 조사.

리종복은 1919년에 조선에서 액목현(지금의 교하현) 신참(新站)에 이사왔다. 한족지주의 “얼팡둥(二房东, 마름)”으로 있던 한 조선인이 소유하고있던 조선족식 초가집을 임차하여 살았다. 그 집은 정지와 웃방이 있는 두칸짜리 집이였는데 정지간에는 리종복네 식구들이 살고 웃방에는 홀아비 한사람이 살았다. 그때 지주의 땅을 소작하면 주택도 마련해주었는데 모두 한족식집이였다.

(3) 료녕성

① 김문성: 남성, 1919년생, 관전현 석호구향 만보진에 거주. 1993년에 조사.

김문성은 민국시기에 처음엔 틀목집(귀틀집)에서 살았다. 이엉은 강냉이짚, 벼짚 같은것으로 덮었다. 지주가 나무를 마음대로 찍지 못하게 하여 동기와(너새—나무기와)는 얹지 못하였다.

② 김명수: 남성, 1909년생, 봉성시 교구에 거주. 1993년에 조사.

김명수는 1919년에 조선에서 환인현 화전자(华甸子)의 고대자(高台子)마을에서 살았다. 그곳에서 한족집을 세맡고 살았는데 돈이나 곡식으로 세값을 치렀다.

후에 봉성현 대보진(大堡鎮) 대보촌에 이사가서는 조선집을 짓고 살았다. 전통적인 조선족가옥을 “조선집” 혹은 “삿갓집”, “갓을 누른 집”이라고 하였다. 그때의 조선집은 세칸으로 되여있었는데 부엌이 서쪽에 있기도 하고 중간에 있기도 하였다. 방에는 모두 통구들을 놓았다. 집 앞쪽에는 섬돌이 있었다. 부뚜막에는 솥을 2개 걸었고 온돌에는 갈삿(갈노전)을 폈다.

(4) 흑룡강성

민국시기에 조선족들이 자체로 지은 주택은 조선집이 많았고 지주가 마련해주는 집은 모두 한족식 집이였다. 조선집을 지어도 량통형식은 극히 희소하고 절대 대부분은 외통식의 집이였다. 이런 현상은 흑룡강성뿐만아니라 연변을 제외한 기타 지방이 모두 비슷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