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아시기 의례
래원:중앙인민방송국      2016-02-25 13:52:00

조선족의 영아시기 의례로는 3일치성, 삼칠일치성, 백일잔치, 돌잔치 등이 있다. 이가운데서 3일치성과 삼칠일치성은 20세기 60년대에 들어와서 점차 없어지고 백일잔치는 지금까지도 일부 지방의 소수 사람들속에서 행해지고 있으며 돌잔치는 조선족가운데서 보편적으로 행해지고있다.

1. 3일치성

3일치성은 산모가 해산하여 3일이 되는 날에 생육을 주관하는 삼신할머니거나 성인(聖人)에게 기도를 드리는 의례를 말한다. 3일치성형식에는 대체로 아래와 같은 두가지가 있다.

1) 평소에 시어머니가 자기와 동갑이 되는 사람 혹은 자기의 남편(즉 시아버지)과 동갑이 되는 사람의 집을 찾아다니며 무명실이나 솜을 조금씩 얻어다가 천을 짠다. 천의 너비는 약 20센치메터, 길이는 약 1메터 정도 되게 짠다. 천에 먹으로 성인을 받드는 글귀를 써서 싸리나 버들로 엮은 자그마한 다래끼안에 넣어 안방 벽에 못을 치고 걸어놓거나 선반우에 올려놓는다.

며느리가 해산하여 3일이 되면 시어머니가 그 다래끼안에 넣은 천을 꺼내여 상우에 올려놓고 그우에 미역국 세그릇, 밥 세그릇을 올려놓고 시어머니나 시아버지가 그앞에 꿇어앉아서 우리 애기 잘 자라게 해달라고 빌고는 절을 세번 한다. 치성을 마치면 그 천을 다시 다래끼안에 넣어둔다. 이것을 “세인(성인)”에게 치성을 드린다고 한다.

2) 산모가 해산하여 3일이 되는 날에 종이로 길죽하게 만든 전대(주머니)에 쌀을 넣어서 시렁우에 걸어놓는다. 그아래에 상을 놓고 그우에 정화수로 지은 밥과 미역국을 각기 세그릇씩 올려놓는다. 그리고는 산모의 친정어머니나 시어머니가 그앞에 꿇어앉아 우리 애기가 무사히 잘 자라게 해달라고 빈다.

2. 삼칠일치성

어린애가 태여나서 이레가 되는 날을 첫칠일, 열나흘째 되는 날을 이칠일, 스무하루째 되는 날을 삼칠일이라 하며 이때마다 어린애의 건강을 위하여 생육을 주관하는 삼신할매에게 기도를 드리는것을 삼칠일치성이라 한다. 치성을 드리는 방식은 아래와 같다.

이레째 되는 날 아침에 정화수 한그릇, 밥 한그릇, 미역국 한그릇을 상우에 올려놓고 영아의 할머니 혹은 할아버지 혹은 사이가 가까운 동네집 할머니가 그앞에 꿇어앉아 “삼신할머님 오늘은 첫칠일이 되는 날인데 메밥을 놓고 삼신할머님께 비옵니다. 우리애기 초성에(초순) 달자라듯이(혹은 외굵듯이), 병은 그믐에(의) 달삭듯이 해주옵소서.” 하고 기도를 드린다. 이칠일과 삼칠일 되는 날에도 모두 이런 식으로 기도를 드린다.

첫칠일이 지나면 할아버지가 옷을 깨끗이 입고 손자(혹은 손녀)를 보러 들어가고 삼칠일이 끝나면 할머니 친구들을 청하여 음식을 대접한다. 이때 초청을 받고 오는 사람들은 태실을 갖고 와서 선사한다. 주인은 그것을 받아 사슬모양으로 한데 이어 방안에 가로 걸어 놓는다. 이것은 영아의 수명이 길어짐을 상징한다.

중국 조선족 가운데서 삼칠일치성풍속은 주로 경상도사람들가운데서 행해졌으며 1990년대 중반까지도 류하현 륙도구진 고유촌 같은 조선족마을에서 이런 풍속을 볼수 있었다.

3. 백일잔치

어린애가 태여난지 100날이 되는 날에 축하행사를 가지는것을 백일잔치 혹은 백날잔치라고 한다.

애기가 출생하여 백일이 되는 날에 백설기, 수수팥떡, 조찰떡, 송편 같은 음식을 마련한다. 백설기는 결백한 마음을 의미하고 수수팥떡은 부정과 재액을 막아냄을 의미하며 송편은 속이 차라는것을 상징한다. 이날 축하하러 오는 친척들은 태실이나 돈을 갖고 온다. 그것을 어린애의 목에 걸어준다.

백설기는 100사람이 먹으면 좋다 하여 많은 사람들에게 나눠준다. 백설기를 손바닥만큼씩 썰어 싸리꼬챙이로 만든 저가락 한쌍에 떡쪼각을 하나씩 꽂아서 함지에 담는다. 외할머니가 그것을 마을밖 큰길가에 이고 나가 오가는 사람들에게 한개씩 선사한다. 그리고는 친척들이 한자리에 모여앉아 미역국을 끓여 놓고 떡을 먹는다.

압록강연안과 훈강연안에 살고있는 평안도사람들은 백일잔치날에 흔히 백설기를 만드는데 그것은 애기의 수명이 백세가 될것을 상징한다고 한다. 태실을 어린애의 목에 걸어줄 때 종이돈을 태실에 끼워놓는다. 이날 어린애에게 백일상도 차려준다. 상우에 백설기와 친척들이 가져온 “부조돈”을 놓고 어린애를 어머니나 할머니가 부축하여 상을 짚고 서게 하고는 기념사진을 찍는다.

연변일대의 상황을 살펴보면 어린애가 태여난지 100날이 되면 어린애에게 새옷을 해입히고 기념사진을 찍어준다. 남자애인 경우에는 아들이라는것을 자랑하기 위하여 사진을 찍을 때 일부러 자지를 드러내놓고 찍는다.

손님들이 태실을 가져와서 어린애 목에 걸어주는 풍속과 백설기를 여러 사람들에게 나눠주는 풍속은 동북이 해방되기 전과 마찬가지로 실시되였지만 백설기, 수수팥떡, 밴새, 찰떡 같은 여러가지 상징성이 있는 떡을 장만하는 풍속은 점차 사라지고 여러가지 맛좋은 음식을 만들어놓고 친척들이 한자리에 모여 함께 먹는것이 새로운 풍속으로 되였다. 1980년대에 이르러 연변일대에서는 백일잔치를 베푸는 현상을 찾아보기 힘들게 되였다.

4. 돌잔치

어린애가 출생하여 처음 맞이하는 생일을 돌이라고 한다. 한자로는 “初度日”,“晬(쉬)”,“晬日”,“期晬”,“周日”,“周年” 등으로 표기한다. 아이가 태여나서 첫돌을 맞이하는 날에 부모가 축하의례를 행하는것을 돌잔치라고 한다. 백일잔치를 베푸는것과 마찬가지로 돌잔치도 어린애가 일년을 무사히 지내고 한개 “고비”를 넘기였다 하여 베푸는것이다.

돌잔치를 베풀고 돌잡이의 례를 진행하는것은 중국 고대시기에 산생된 풍속이다. 북제(550년—577년)시기 사람인 안지추(顏之推)가 쓴 ≪안씨가훈(顏氏家訓)≫에 돌잔치에 관한 내용이 기재되여있으며 송나라(宋朝)시기에는 더욱 많은 문헌들에 상세히 기재되여있었다. 송조시기에 어린애에게 돌을 잡히는것을 “시아(試兒)”, “점주(拈周)”, “시쉬(試晬)” 등으로 말하다가 후세에 와서 “조주(抓周)”라고 하였던것이다.

여기에서 “시아”, “점주”, “시쉬” 등은 모두 어린애의 첫돌생일날에 어린애의 장래의 흥미와 전도를 시험해본다는 뜻이며 “조주”는 바로 지금 조선족들이 말하는 “돌잡이”인것이다. 그리고 그 시기에 돌상에 활(남자애인 경우), 가위(녀자애인 경우) 같은것을 놓았는데 그런 풍속은 조선족이 지난날에 돌상을 차리던 풍속과 꼭 같은것이다. 이러한 상황을 놓고 볼 때 조선족들이 어린애의 첫돌에 돌잡이를 하는 풍속은 원시적인 징조신앙(征兆信仰)에서 산생된 한족들의 풍속을 따라배운것이 분명하다.

조선민족의 력사에서 어느때부터 돌을 축하하기 시작하였는가 하는것은 아직 똑똑한 기록을 찾지 못하였다. ≪삼국유사≫ 권2 “경덕왕(742년—765년)과 충담스님과 표훈스님”편에 “기쉬(期晬)”, “금낭(錦囊)” 같은 돌생일과 관련된 어휘가 출현된것을 보아 ≪삼국유사≫의 저자인 일연(一然)이 생활하던 고려시기(918년—1392년)에 왕실이나 상층계층에서는 돌을 축하하는 현상이 있었을 가능성도 있다고 생각한다.

조선왕조시기에 이르러 정조(正祖) 15년(辛亥年, 1791년) 6월 18일에 원자(元子)의 초도일(初度日)이 되여 경축하였다는 사실이 ≪국조보감(國朝寶鑒)≫에 똑똑히 기재되여있다. 여기에서 “초도일”이란 바로 돌생일을 말하는것이다. 이런 기록을 보아 조선민족이 돌을 축하하는 풍속이 가장 짧게 쳐도 200여년의 력사를 갖고있다는것을 알수 있다.

조선족의 전통적인 돌축하의례에는 삼신치성, 돌복차림, 돌잡히기, 돌떡분식 등 내용과 절차가 포괄되여있다. 이러한 내용과 절차는 시대에 따라 부동하며 지방에 따라 다소 차이가 있다.

삼신치성은 돌생일 전날 아침에 드린다. 밥, 미역국, 정화수를 각기 한그릇씩 상우에 차려놓는다. 이것을 “삼신상(三神床)”이라 한다. 삼신상곁에 백설기를 한그릇 담아놓는다. 그리고는 어린애의 외할머니 혹은 친할머니가 상앞에 꿇어앉아 삼신할머니에게 어린애가 잘 자라게 하여주셔서 감사하다는 인사를 올린다.

생일날이 되면 먼저 어린애에게 돌복차림을 시킨다. 잘사는 집에서는 돌복차림을 굉장히 화려하게 한다. 남자애의 돌복은 흔히 색동저고리, 남색조끼, 분홍바지를 입히고 복건을 씌우고 타래버선(꽃버선)을 신기며 녀자애는 흔히 색동저고리에 분홍치마를 입히고 남바위를 씌우고 타래버선을 신긴다. 남녀를 막론하고 모두 허리에 돌주머니, 은장도, 은도끼, 동전 같은 장신구를 달아맨 돌띠를 띠워주는데 돌주머니엔 “壽”, “福” 같은 한자를 새긴다. 생활이 일반적인 가정에서는 이상과 같은 성장(盛裝)은 하여주지 못하고 명주천으로 만든 색동저고리에 채색 명주치마나 바지를 입히고 생활이 가난한 가정에서는 근근히 새옷을 한벌 해입힌다.

돌잔치에서 중심고리로 되는것은 돌잡이다. 병풍을 세우거나 벽에 홰대보를 치고 그앞에 돌상을 차린다. 돌상에는 밥 세그릇, 미역국 세그릇을 놓고 팥, 쌀, 붓, 종이, 실, 돈 같은것을 놓는다. 1950년대 이전에는 무엇보다도 먹는것과 무병하게 잘 자라는것이 가장 큰 관심사로 되였으므로 쌀, 실 같은것을 돌쟁이(돌잡이를 하는 어린애)가 가장 쥐기 편리한 첫줄의 중간위치에 놓는다.

길림성 장백조선족자치현에서 생활하는 조선족들은 돌상우에 입쌀 세그릇, 랭면 세그릇, 팥소를 넣은 송편 세그릇을 놓으며 기타 물건으로는 ≪천자문(千字文)≫ 한권과 필묵, 주산, 돈, 실(흰실과 붉은실), 활(남자애인 경우), 가위(녀자애인 경우) 따위를 놓는다. 돌상을 차린 다음 돌상앞에 목천이나 베천 한필을 포개서 놓거나 어린애의 포대기를 포개놓는다.

그리고는 돌쟁이의 할머니나 아버지가 돌쟁이를 안아서 돌상앞에 세워놓고 상우에 차린 물건을 마음대로 쥐게 한다. 세번 쥐게 한 다음 돌쟁이가 쥐는 물건에 따라 그의 흥취와 장래를 점친다. 만약 쌀을 먼저 쥐였으면 앞으로 배를 곯지 않겠다 하고 실을 먼저 쥐였으면 명이 길겠다 하고 책을 먼저 쥐였으면 공부를 잘하겠다고 한다.

생활이 어려운 시기에도 조선민족은 아이들의 교육에 대하여 크게 중시하였으므로 책을 먼저 쥐면 부모들은 매우 기뻐하였다. 돌잡이의 례가 끝나면 돌잔치에 마련한 음식을 이웃집과 친척들에게 보낸다. 돌잔치 떡을 받은 집에서는 쌀 혹은 기타 물건으로 답례한다.

연변일대에서는 돌상에 입쌀, 찰떡, 팥을 각기 한그릇씩 놓고 책, 연필, 주산 같은 기타 물건을 놓는다. 어떤 사람들은 돌잔치를 치를 때 천명되는 사람들에게서 일인당 쇠돈을 한매씩 얻어다가 그 돈으로 어린애의 돌복과 음식을 마련하면 좋다 하여 한두달씩 기차를 타고 다니며 려객들에게 돈을 빌어 모아 돌잔치를 베푸는 경우도 있다. 그리고 돌잔치를 위하여 마련한 백설기는 100명의 사람들에게 나눠주면 좋다 하여 백일잔치를 베풀 때와 마찬가지로 백설기를 자그마하게 베여서 마을밖 큰길가에 이고 나가 오가는 사람들에게 나눠준다.

료녕성 훈강(渾江)일대에 거주하는 평안도사람들은 돌상을 차릴 때 음식과 물건을 밥상우에 차리는것이 아니라 가루를 치는 채우에 무쇠가마뚜껑을 번져서 놓고 그우에 음식과 물건을 놓거나 가마뚜껑이 작으면 그우에 키를 더 놓고 음식과 물건을 놓는다. 무쇠가마뚜껑을 상으로 대용하는것은 어린애가 무쇠같이 튼튼해지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그런다고 한다. 돌잡히기를 마치고 돌잔치음식을 마을사람들에게 선사하면 그것을 받은 집들에서는 쌀 한그릇이나 강냉이 몇이삭을 주는것으로 답례한다.

1966년부터 1976년까지의 “문화대혁명”시기에는 돌잔치를 베푸는것이 말썽거리가 되여 남들에게 알리지 않고 가까운 친척끼리만 모여서 간소하게 치렀다. 1972년에 연길시 어느 한 조씨네 가정에서 딸애의 돌생일을 쇠였는데 돌복은 빨간색 솜실로 내복을 한벌 떠입혔을뿐이고 친척들이 가져온 부조돈은 도합 3원밖에 안되였다. 돈을 절약하느라고 기념사진도 돌쟁이가 단독으로 찍지 못하고 친척들이 돌쟁이와 함께 한장을 찍었다.

20세기 80년대에 들어오면서 돌생일을 축하하는 방식은 커다란 변화를 가져왔다. 그중 주요한것은 아래와 같은 몇가지 방면에서 체현된다.

1) 돌잔치는 돌잡이만 하고 삼신치성은 하지 않는다.

2) 도시에서는 돌생일축하의례를 집에서 행하지 않고 례식장에 가서 진행한다.

3) 돌복은 백화점에 가서 기성복을 사입힌다. 1990년대부터 돌쟁이에게 금반지를 끼워주는 현상이 새로 나타났다.

4) 돌상에 활이나 가위같은 물건 대신 놀이감총, 전자계산기, 돈 같은것을 놓는다. 기독교나 천주교를 믿는 가정에서는 돌상우에 성경책을 놓는다.

5) 서양식을 모방하여 생일케이크에 초불을 한대 켜놓고 돌쟁이 대신 곁에 앉은 사람이 불어서 끈다.

6) 돌잔치에 참가하는 사람들은 옷이나 실을 선사하는것이 아니라 모두 현금을 선사한다. 부조돈은 1960~1970년대에는 한사람이 몇십전, 1980년대에는 몇원, 1990년대말에 와서는 100원으로 늘어났다. 어떤 사람들은 부조돈에서 888원 88전을 저금소에 가서 저금하는데 이것은 한족의 풍속을 따라배운것이다.

7) 지난날에는 돌을 경축할 때 친척들과 가까운 이웃들만 참여하였지만 지금은 친척외에 어린애 부모의 친구들까지 참가하다보니 참여자들이 수백명에 달한다.

8) 지금 례식장에서 진행하는 돌잡이의례형식은 대체로 아래와 같다.

례식장 정면에 “×××어린이 돌생일축전”이라고 쓴 프랑카드를 걸어놓고 그아래에 돌상을 차린다. 축하의례는 사회자의 집행하에서 진행되는데 그 절차는 아래와 같다.

(1) 축하의례 시작을 선포한다. 이때 돌쟁이와 그의 부모에 대하여 간단히 소개한다.

(2) 돌잡이를 진행한다. 생일축하노래를 방송하며 사진을 찍는다.

(3) 사회자가 돌쟁이가 물건을 쥐는 정황에 근거하여 그의 특장과 앞날에 대하여 손님들에게 선포한다. 그러면 손님들은 열렬한 박수로 축하한다.

(4) 친척들이 돌쟁이를 안고 기념사진을 찍는다.

(5) 손님들에게 음식을 대접하며 오락판을 벌린다.

(6) 돌생일축전의 전반 과정을 록화기로 록화하여 기념한다.

2007년에 연길시에서 돌생일을 경축하는데 수요되는 비용은 가정당 평균 6,000원좌우가 되였다.

돌축하의례에서 진행되는 돌잡이를 통하여 어린애의 장래를 예측한다는 관념에 대하여 현대인들은 믿지 않는다. 지금의 돌축하행사는 전통적인 육아의례풍속을 전승하는 일종 오락적인 축하활동에 불과한것이다. 다른 한편 한살밖에 안되는 어린애는 세상일에 대하여 아직 아무것도 모르므로 돌잔치를 아무리 굉장하게 차려주어도 그에게는 무의미한것이다. 때문에 일부 학자들은 돌잔치를 될수록 간소하게 치를것을 주장한다.

보충설명:

* 전통적인 돌상차림

력사문헌에 돌상을 한자로 “晬盤”이라고 표기하였다. 쉬(睟)는 돌생일이라는 뜻이고 반(盤)은 자그마한 상이란 뜻이다.

전통적인 돌상에는 주로 여러가지 떡을 차렸다. 백설기, 붉은 팥고물을 묻힌 수수경단, 찹쌀떡, 송편, 무지개떡, 인절미 등인데 이 가운데서도 백설기와 수수경단은 꼭 차리는것으로 되여있다. 돌생일에 차리는 떡과 기타 물건은 모두 일정한 문화적함의가 내포되여있는것이다.

백설기는 아기의 신성함과 정결하기를 기원하는 뜻뿐만아니라 장수한다는 뜻도 지니고있다. 수수경단은 붉은 떡이라고 하여 귀신이 붉은색을 싫어한다는 속신(俗信)에 의해 생긴 습속으로서 무병함을 상징하는것이다. 인절미, 찰떡은 찰기운이 있는 음식이므로 끈기있고 마음이 단단하라는 뜻을 내포하고있다. 송편은 속이 꽉 참(령리함)을 상징한다. 이밖에 여러가지 일정한 상징성을 띤 물건을 놓는다.

돌상 차리는 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