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 조선족 복식의 변천
래원:중앙인민방송국      2016-02-01 14:38:00

중국 조선족의 복식생활은 20세기 40년대까지 조선반도와 대체적으로 비슷하였다. 하지만 필경 나라가 다르고 사회환경이 다르기때문에 복식생활의 력사가 완전히 같은것은 아니다.

조선왕조시기에 제정한 복식에 관한 일련의 규제는 중국 조선족에게는 통하지 않아 제약력이 없었다. 중국 조선족은 량반, 상놈의 차별이 없이 누구나 돈이 많으면 량반옷차림을 할수 있었다.

조선반도에서는 1894년(갑오년)에 복식개혁을 하면서 도포와 창옷을 금지하고 두루마기를 입도록 하였으나 중국 조선족은 20세기 30년대까지 향교(鄉校)행사나 마을제사 같은 중요한 의례시에 도포를 착용하였으며 창옷은 신랑의 혼례복으로 40년대까지 착용하였다.

조선반도에서는 1895년(을미년)에 단발령을 내려 남성들은 모두 상투를 자르도록 하였다. 하지만 중국 조선족은 1917년에 이르러서야 로씨야 사회주의10월혁명의 영향으로 단발풍조를 일으키기 시작하였다.

중국 조선족은 복식방면에서 조선왕조 복식제도의 제약을 받지 않았으나 중국 지방정부의 동화정책으로 하여 시련을 겪었다.

광서 16년(경인년, 1890년)에 청나라조정에서는 치발역복(剔發易服)정책을 실시하여 조선류랑민들로 하여금 만족식으로 머리를 깎고 만족옷을 입도록 강요하였다. 이에 불복하는자에 대해서는 중국에서 거주하지 못하도록 하였다. 그리하여 일부 사람들은 할수없이 만족옷을 입고 만족식으로 머리를 깎았으며 농촌에서는 대표를 내세워 치발역복을 하게 하고 그 사람의 이름으로 경작지를 소작맡았다. 1920년대의 연변 조선족들은 그번 악몽의 시련을 경자년(庚子, 1900년) 군란의 소동과 경신년(庚申, 1920년) 일본군토벌의 병화와 함께 “삼경의 대시련”이라 불렀다.

민국시기 봉계군벌정부는 1927년 1월부터 조선족에 대해 구축정책을 실시하였는데 그해에 발포한 ≪길림성 및 동삼성특별구 장관명령(吉林省及東三省特別區長官之命令)≫은 다음과 같이 규정하였다. “특별구내에서는 조선사람들이 흰옷을 입는것을 금지하며 중국옷 혹은 양복을 입어야 한다.(제3조항)”, “이런 규정을 어기는자는 즉각 축출한다”. 청나라조정과 민국정부는 조선족의 전통복식에 대해 상술한 금지정책을 실시하였으나 대다수 조선족들은 계속 본민족의 전통복식을 착용하였다.

조선족 복식생활의 변천에 대하여 시대적으로 살펴보면 아래와 같다.

청나라말기에 압록강 북안일대의 조선족들가운데서 평민들은 모두 흰옷을 입었으며 아이들은 모두 붉은색 혹은 록색의 칼라옷을 입었다. 또 남녀를 막론하고 모두 흰수건으로 머리를 동이거나 쌌다. 말총으로 만든 갓(흑립)을 쓴 사람들도 있었는데 그런 사람은 지식인, 한의, 풍헌(風憲), 마을대표들이였다.

1907년 3월의 조사에 따르면 그 당시 연변의 조선족들가운데서 10분의 2의 사람들은 로씨야의 씨비리로부터 이주해왔는데 그들은 근대문화의 영향을 받아 로씨야사람들을 모방하여 머리를 깎거나 하이칼라를 하였다. 옷은 “서양식 절반에 조선식 절반”인 옷이거나 조선옷을 입었다. 2분의 1이 되는 사람들은 봉건지주의 소작농으로서 “상투를 쪽지고 이족옷을 입고” “머리태를 땋고 흰옷을 입었”는데 청나라사람과 같았다. 땅이 없어 소작농으로 있으면서 청나라조정의 각종 세금을 납부하였던 10분의 3밖에 안되는 사람들은 여전히 “흰옷에 검은갓”을 쓰고 다녔다.

민국시기에 이르러 특히 1920년대에 들어서면서 조선족의 복식에는 전에 비해 새로운 변화가 생겼다.

사람들의 옷차림은 평상복, 나들이옷, 로동복으로 구분되였으며 도시녀성들가운데는 “신식문명옷”이라는 시체옷이 출현하였다. 흰색 반팔의 저고리에 검은색 짧은 치마를 입고 양말에 구두를 신는것을 신식문명옷이라 하였다. 남자들가운데는 양복을 입는 사람이 많아졌는데 안동(지금의 단동)지방 같은 곳에는 양복을 입는 사람이 조선보다도 많았다. 조선옷을 입은 사람들에 대해 일본사람들이 “불량선인(위험한 조선인)”으로 보았기때문에 독립운동을 하는 사람들은 아예 중국옷차림을 하였다. 안동일대에는 여름철에 일본옷을 입고 게다를 신는 조선사람이 많았다.

쏘련과 린접한 흥개호일대의 조선족들은 대부분이 한복을 입었는데 일부 사람들은 “루바스까”라는 로씨야옷을 입었다.

연변일대 농촌에서는 흰옷을 입고 검은 갓을 쓴 사람이 많아 이곳에 오면 마치 조선내지에 온듯한 감을 느끼게 하였다.

20세기 20년대에 남자들의 관모에는 탕건, 검은 갓, 유건, 휘양, 도리우찌, 맥고모, 파나마모, 중절모, 센또보시, 털모자 등 여러가지가 있었고 녀자들의 관모에는 남바위, 조바위, 두식(頭飾)에는 화관과 족두리가 있었다.

남자들의 머리꾸밈새에서 50세 이상 되는 로인들가운데는 상투틀 쪽진 사람이 많았고 50세 이하의 중청년들은 하이칼라를 하거나 깎은 머리, 혹은 삭발머리를 하였다.

녀자들의 머리꾸밈새를 보면 농촌녀자들은 일반적으로 얹은 머리를 하고 도시의 녀자들은 낭자머리를 하였으며 결혼시에는 큰머리를 트는 사람이 적지 않았다.

1930년대 이전에 녀자들의 옷차림에서 특이한것은 기혼녀자들은 특별히 짧은 저고리를 입고 유방을 로출하고 다니는것인데 그것은 자기의 생육능력이 강함을 과시하기 위해서라고 한다.

1920년대의 신발로는 미투리와 초신이 가장 많았고 목화(목이 긴 솜신), 구두, 고무신, 헝겊신, 북신, 부둑신, 조올신, 나막신, 도로기 등이 있었다.

이 시기의 옷감은 베, 무명, 모시 등이 위주였고 비단과 모직품도 있었으며 외국에서 수입한 고급목천도 있었다.

옷의 색갈은 남녀를 막론하고 흰색이 가장 많았다. 녀자들가운데는 30세가 넘으면 화려한 칼라옷을 입지 않는 습속이 있어 녀자들도 중년에 들어서면 흰옷을 입었다.

1930년대 이후 조선족녀자들가운데서 일본녀자들이 입는 몸뻬가 류행되였다. 회사에 다니는 사람들은 회사복을 입었고 학생들은 교복을 입었다.

1950년대 이후 두루마기는 점차 사라지고 그대신 스프링이 류행되였고 남자들가운데는 중산복을 입는 사람이 점차 많아졌으며 녀자들이 바지를 입는 현상이 점점 많이 나타났다.

젊은이들가운데는 팔로군모자, 레닌모자가 류행되였고 겨울철엔 개가죽모자, 양가죽모자, 여우털모자 등 방한모자가 류행되였다. 중학생들은 모자에 “中”이라고 쓴 모휘(帽徽)를 달았고 고중생들은 “高”라고 쓴 모휘를 달았다. 녀학생가운데는 해군복과 “세비로”라는 양복이 류행되였다.

1949년부터 심양에서 고무신이 생산되였는데 1950년에 심양의 고무신공장이 연변에 옮겨와 대량적으로 고무신을 생산하면서 조선족은 남녀를 막론하고 여름철에 보편적으로 고무신을 신게 되였다.

1960년대에 연길시에 비단공장이 설립되여 조선족녀성들은 그 어느 시기보다도 아름다운 비단옷을 많이 입게 되였다.

10년 동란시기에 남녀를 막론하고 중국인민해방군복을 모방한 국방색 중산복을 입었다. 이 시기를 거치면서 한복을 입는 사람이 현저하게 적어졌다.

10년 동란시기가 끝난후 양복이 다시 류행되고 나팔바지가 한때 류행되였으며 봄가을철엔 라사천으로 만든 코트가 류행되였다.

1980년대이후 개혁개방정책이 실시되고 사람들의 사상관념이 전례없이 개방되면서 조선족의 복식문화는 세계적인 복식문화의 흐름속에 융합되기 시작하였다. 사람들은 단순히 전통복식을 고수하려 하지 않고 다채롭고 아름다우며 몸에 편한 옷을 입으려 하였으며 특히 녀자들은 자신의 체격과 기호에 알맞는 여러가지 시체옷을 선택하여 입었다. 젊은 녀자들은 여름철에 넙적다리, 배꼽, 어깨 등 부위를 로출하고 다녔는데 이는 지난날에는 전혀 볼수 없었던 새로운 시체멋으로 되였다. 1990년대에 이르러 한국으로부터 개량한복이 전래되였는바 연변일대에서는 꽤나 많은 사람들이 착용하고있다.

지금 조선족들이 한복을 입고 인생의례행사나 경축활동에 참가하는것은 일반 현상으로 되였다. 1980년대 이후 한복을 수요하는 사람들이 날로 늘어났는바 연길시에는 최월옥복장공장을 대표로 하는 전문적으로 한복을 만드는 옷공장이 나타났다. 2008년 6월 조선족 전통복식은 국가급무형문화재에 등록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