육아풍속: 생육에서의 전통적관념의 변화
래원:중앙인민방송국      2016-01-19 10:19:00

인류의 발전사를 크게 두개 단계로 나눈다면 모계사회와 부계사회로 나누게 된다. 모계사회에서는 녀자들이 주도적역할을 하였으므로 생육에서도 남자애보다 녀자애를 더욱 중히 여겼다. 그러다가 부계사회로 발전되면서 상황은 완전히 달라졌다. 남자들이 사회에서 주도적역할을 놀게 되였으며 생육에서도 녀자애보다 남자애를 더욱 중히 여기게 되였다.

다른 한편 모계사회에서나 부계사회에서나 생육방면에서 모두 자식을 많이 낳는것을 좋은 일로 여기였다. 그리하여 남자들이 사회적으로 지배권을 장악한 부계사회에 들어선 민족들중에는 생육방면에서 일반적으로 “다자다복(多子多福)”관념과 “남존녀비(男尊女卑)”관념이 존재하였다.

영국이나 프랑스 같은 나라에서는 17~18세기에 자산계급혁명중에서 남녀평등사상이 대두되면서 생육에서 녀자애를 천시하고 남자애를 중시하는 관념이 점차 개변되였으며 또한 18세기 후반기부터 기계대공업을 발전시키면서 과학기술의 신속한 발전으로 하여 자식을 많이 낳아 인구를 크게 증식시키는 관념도 점차 개변되였다.

하지만 중국이나 조선 같은 동방국가에서는 20세기 중엽까지도 인구가 많은 것을 한개 큰 자랑거리로 여켰으며 녀자애를 천시하고 남자애를 중시하는 현상이 보편적으로 존재하였다. 이러한 관념들은 중국 조선족가운데서도 일종 전통적관념으로서 오래동안 완고하게 존재하였다.

1. 다자다복관념

중국 조선족의 다자다복관념에 대하여 아래에 주요한 몇가지 실례를 든다.

1) 20세기 60년대까지 자식이 많고 무병한 사람을 다복한 사람이라고 하였다.

2) 아들 낳고 딸 낳은 녀자라야 남의 집 결혼잔치에 대반을 설수 있고 첫날 이부자리를 꾸며줄수 있다.

3) 제사상에 고사리를 놓지 않는다. 그것은 고사리가 처음엔 아지를 뻗지 않고 외대로 자라기때문에 조상에게 그것을 대접하면 후대가 번성할수 없다고 한다.

4) 지난날에 자식이 많고 무병한 사람이라야 부락제사, 기우제사, 림공당제사(林公堂祭祀) 같은 집단적인 제사활동에 참가할수 있었다.

20세기 60년대까지 중국 조선족녀성들은 상술한 다자다복관념의 영향으로 하여(물론 그 시기엔 생육을 절제할수 있는 과학적인 방법이 없었던 원인도 있었겠지만) 일반적으로 자식을 대여섯명씩 낳았으며 한 녀성이 자식을 10여명 낳은것도 그리 희한한 일이 아니였다.

다자다복관념이 산생하고 그것이 사람들의 머리속에 오래동안 뿌리깊게 존재하게 된 주요한 원인은 아래와 같은 몇가지 방면에 있다.

1) 고대에는 생활 환경과 조건이 극히 렬악하여 사람들의 사망률이 매우 높았으므로 출생률이 낮으면 인류가 자멸하게 되는것이다.

2) 과학기술이 락후한 력사시기에는 주로 사람의 힘으로 생산로동을 하였으므로 출생률이 높아야 많은 로동력을 보장할수 있었다.

3) 인류사회가 계급사회에 들어선후 그 어느 나라나 민족을 막론하고 모두 빈번한 전쟁의 시련속에서 살아왔다. 전쟁에 수요되는 군인을 충족시키자면 출생률이 높아야 했다.

상술한 몇가지 요소는 고대에 사람들의 다자다복관념이 산생하게 된 주요한 원인으로 되는것이다. 그외에 다자다복관념이 조선민족에게 오래동안 큰 영향을 주게 된 가장 주요한 원인은 유학사상관념에 있는것이다. ≪맹자 · 리루상(孟子 · 離婁 上)≫에 말하기를 “불효에 세가지가 있는데 후대가 없는것이 가장 큰 불효이다.”라고 하였다.

≪다대례기(大戴禮記)≫에 따르면 남편이 안해를 버릴수 있는 조건에 일곱가지가 있는데 아래와 같다.

1) 시부모에 대해 불공손한 녀자.

2) 자식을 낳지 못하는 녀자.

3) 행실이 음탕한 녀자.

4) 질투심이 강한 녀자.

5) 치료하기 어려운 질병이 있는 녀자.

6) 말이 다사한 녀자.

7) 도적질을 하는 녀자.

우에서 인용한 남자가 녀자를 버릴수 있는 일곱가지 조건을 중국사람들은 “칠출(七出)” 혹은 “칠기(七棄)”라 하고 조선사람들은 “칠거지악(七去之惡)”이라 하였다. 삼불효에서 무자식이 첫째라는 관념과 “칠거지악”관념은 중국의 유가학설에 의하여 산생된것이지만 동방의 여러 민족가운데서 그 어느 민족보다도 유가학설을 높이 숭상하여왔던 조선민족에게 그것은 더욱 큰 영향을 주었던것이다.

2. 남존녀비관념

남존녀비관념은 인류사회가 모계사회로부터 부계사회로 들어오면서 산생된것으로서 육아풍속에서는 남자애를 중시하고 녀자애를 천시하는 현상으로 표현되였다. 이에 관하여 ≪삼국유사(권2, 경덕왕)≫에 아래와 같은 전형적인 실례가 있다.

하루는 신라의 경덕왕이 표훈스님(表訓大師)에게 말하기를 “내가 복이 없어 자식을 얻지 못하니 원컨대 스님이 하느님께 청하여 아들을 점지하도록 하라.”라고 분부하였다. 표훈스님이 왕의 소원을 하느님께 아뢰니 하느님이 말하기를 “딸은 하사할수 있으나 아들을 하사하면 나라에 불리할것이다.”라고 답복하는것이였다.

표훈스님

이 하느님의 뜻을 경덕왕에게 아뢰니 경덕왕은 비록 나라가 망하더라도 기어이 아들을 갖고싶다고 하였다. 그리하여 얼마후에 만월왕후(滿月王后)가 태기가 생기더니 태자를 낳게 되여 왕은 더없이 기뻐하였다. 그런데 태자가 여덟살이 되자 왕은 그만 갑작스레 세상뜨고 태자가 왕위에 앉게 되였다. 그가 혜공대왕(惠恭大王)인데 녀자가 남자로 태여나서 그랬던지 애기때부터 등극할 때까지 줄곧 녀자애들의 놀음을 놀기 좋아하였다고 한다.

조선족의 육아풍속을 조사하여 보면 자식을 많이 낳으려는 관념보다 아들을 낳으려는 관념이 더욱 보편적이고도 뿌리깊게 존재하였다. 20세기 60~70년대에 이르러서도 여전히 자식을 5~6명씩 낳는 가정을 보면 첫아이부터 네댓번째 아이까지 모두 녀자애인것이다. 녀자들이 아들을 낳지 못하면 남편과 시부모에게 천대를 받을뿐만아니라 친구들속에서도 위신이 떨어지는것이다. 뿐만아니라 두세번째에도 딸애를 낳으면 갓난애기를 죽여버리거나 밤중에 길목에 놓아 누가 주어가게 하는 참혹한 현상도 간혹 발생하였다.

조선족들이 아들을 중히 여기는 관념은 육아풍속과 혼인풍속에서 많이 나타나는데 그중 가장 전형적인것으로는 아래와 같은 몇가지가 있다.

1) 한쌍의 부부가 련이어 딸만 몇을 낳게 되면 마지막 딸애의 이름을 “필녀(畢女)” 혹은 “필남(必男)”이라고 짓는다. “필녀”는 녀자애를 낳는것을 이제는 끝낸다는 뜻이고 “필남”은 다음에는 꼭 남자애를 낳는다는 뜻이다.

2) 결혼잔치때 남자집에서 녀자집에 보내는 대장함의 네귀에 끝이 뾰족하고 길죽하게 생긴 빨간고추(조선고추)를 넣는다. 이것은 남성생식기의 상징으로 첫아이는 아들을 낳으라는 뜻이다.

3) 혼인풍속에서 “현구고례(見舅姑禮)”를 행할 때 시어머니가 며느리품에 밤을 몇알 던져주며 아들 몇을 낳으라고 한다. 이것은 본래 중국 한족들의 풍속인데 대추(大枣)와 밤(栗子)을 합하여 발음하면 아들을 일찍 낳는다는 “早立子”의 발음과 같은데로부터 유래된것이다. 옛날 한족들의 혼인풍속에 “살장자(撒帳子)”라는 절차가 있는데 신랑, 신부를 휘장을 친 방안에 앉혀놓고 대추와 밤을 던져준다. 그것은 바로 아들을 일찍 낳기를 축원하는 뜻이다.

생육과 혼인 풍속에서 보여지는 딸보다 아들을 중히 여기는 관념이 산생하게 된 근원은 아래와 같은 몇가지 방면으로부터 볼수 있다.

1) 부계사회에서 남자를 핵심으로 한 가정이 형성되면서 오직 남자만이 한개 가문의 혈통을 이어나갈수 있고 녀자는 일단 시집만 보내면 “출가지외인”이라 하여 남의 집 식구로 취급하였다. 이런 혈통계승관념은 육아풍속에서 남자애를 중시하고 녀자애를 천시하는 근본적원인으로 된다.

2) 사람의 힘으로 농사일을 하던 력사시기에 한개 가정에 남성로력이 없이는 농사일을 하기 어렵다. 특히 중국 조선족이 조선반도에서 중국에 갓 이주하여왔을 때에는 황무지를 개간하거나 지주집에서 머슴살이를 하거나 소작살이를 하였는데 그 시기에는 남성로력이 없이는 살아가기가 어려웠다.

3) 유가학설에 의한 종법제도에 의하면 장자가 부모의 재산을 계승하며 부모를 부양하는 임무를 감당하도록 되여있다. 만약 장자가 없으면 다른 아들이 모시도록 되여있다. 조선민족의 부모봉양풍속도 이러함으로 늘그막에 의탁할 곳이 있자면 아들이 있어야 하였다.

4) 지난날 조선민족은 조상숭배와 혈통계승 관념에 의하여 부모와 조상들에 대한 제사를 매우 중요시하였다. 부모가 세상뜨면 장자가 상주가 되고 장자가 없으면 장손이 승중(承重)하여 상주가 되고 장자, 장손이 모두 없으면 기타 아들이 상주로 된다. 그리고 제사법에 있어서도 장자가 부모를 비롯한 4대조상의 신주(神主)를 모시고 제사를 지내며 장자가 없으면 장손이 모시고 장자, 장손이 다 없으면 다른 아들들이 신주를 모시고 제사를 지내도록 되여있다. 그러므로 부모와 조상의 제사를 지내는데도 아들이 필요하였다.

생육에서의 다자다복관념과 남존녀비관념은 20세기 50년대 말에 이르러 점차 새로운 변화를 가져오게 되였다.

1956년에 우리 나라에서는 계획출산제도를 제정하여 여러가지 피임방법과 출산계획, 류산방법 등으로 국민들의 무계획적인 생육현상에 대하여 과학적인 조치를 취하기 시작하였다. 1971년에 나라에서는 또 한쌍의 부부가 자식을 한둘만 낳게 하는 제도를 세워 사람들의 생육을 더 제한하기 시작하였다. 이러한 조치들은 세계인구의 근 4분의 1을 차지하는 중국같은 나라에 있어서는 매우 필요한것이다.

이러한 조치를 실시하는 과정에 사람들은 점차 다자다복관념과 남존녀비관념을 버리고 아이를 적게 낳아 잘 키우는 “소생우육(少生優育)”관념과 남자애와 녀자애를 동등시하는 남녀평등관념을 수립하게 되였다. 이리하여 20세기 80년대에 들어와서는 중국 조선족의 생육풍속이 지난날의 “수량형(數量型)”으로부터 “자질형(資質型)”으로 전환하는 새로운 력사적단계에 들어서게 되였다.

나라에서 계획출산제도를 내놓은이래 전국 56개 민족가운데서 조선족은 이 제도를 가장 철저하게 준수하는 민족으로 되여있다. 이런 상황은 아래와 같은 몇가지 통계에서 알수 있다.

“1982년부터 1990년까지의 8년 사이에 전국 소수민족 총인구는 년평균 3.88% 증가되였고 한족인구는 년평균 1.29% 증가되였는데 조선족인구는 년평균 1.05%밖에 증가되지 않아 전국의 모든 민족가운데서 인구장성률이 제일 낮은 민족으로 되였다.”

“연변 관계 부문의 통계에 의하면 조선족녀성들가운데서 생육능력이 있는 녀성으로서 계획출산조치를 취한 비률이 1985년도에 이미 95.19%에 달하였다”.

중앙텔레비죤방송국 “동방시공(东方时空)”프로에서 1996년 2월 25일에 “흑룡강성 극동현 춘광조선족촌(克东县春光朝鲜族村)에서 1988년부터 1995년까지 련속 8년간 계획을 초과하여 아이를 낳은 사람이 없고 아이를 하나만 낳아 기르는 비률이 80%에 도달”한 사실을 보도할 때 그 원인을 다음과 같이 밝혔다.

1) 지난날에 아이를 많이 낳은 원인은 아들을 낳기 위해 그랬었지만 지금은 그런 관념이 타파되였다.

2) 아이를 많이 낳으면 그만큼 경제부담이 커지므로 많이 낳으려 하지 않는다.

3) 지금은 누구나 돈을 벌려고 애쓰므로 자식이 많으면 타지방이나 외국에 나가 돈벌이를 하는데 방해가 되여 아이를 하나밖에 낳으려하지 않는다.

상술한 몇가지는 춘광촌의 조선족들이 1990년대에 들어와서 아이를 적게 낳는 주요한 원인일뿐만아니라 조선족들이 보편적으로 아이를 적게 낳는 주요한 원인이기도 하다.

최근년간 조선족녀성들이 보편적으로 아이를 하나밖에 낳지 않기에 조선족인구는 마이나스장성을 초래하게 되였다. 이 문제는 매우 심각한 사회문제로서 우리 나라 관계 부문의 지도자들과 사회과학분야의 조선족학자들은 이에 대하여 커다란 중시를 돌리고있으며 이에 대한 해결책 탐구에 많은 노력을 기울이고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