섣달의 풍속
래원:중앙인민방송국      2016-01-06 15:11:00

음력 12월을 섣달이라고 한다. 섣달은 일년 치고 새로운 한해를 바라보는 마지막달이여서 고대에는 농사에서의 풍작과 생활에서의 행복을 기원하는 제천행사가 나라적으로 성대히 거행되였다.

≪구당서‧렬전‧백제≫에 의하면 백제의 "세시풍속은 복일 행사와 랍일 행사가 있는데 중국과 같다.(歲時伏臘同於中國。)"고 하였다.

중국에서는 옛날에 음력 12월에 랍제(臘祭)를 지내므로 12월달을 랍월(臘月)이라고 했다. 한자에서 "臘"자는 "蠟"자와 통용되여 쓰이며 고문에서 "蠟"자는 또한 "獵"자와 통용되여 쓰이기도 한다. 하여 "臘祭"는 바로 "蠟祭"로서 음식을 구하거나 짐승을 사냥하여 농신을 위주로 한 여러 신과 조상에게 제사를 지내는것을 말한다. 중국의 요순(堯舜)시기부터 있었던 랍제는 액을 물리치고 풍년과 행복을 기원하는 제신행사로서 12월 8일을 제사날로 삼았다. 이날이 되면 많은 사람들이 한데 모여 북장단에 맞추어 춤추고 노래부르고 줄다리기도 하고 탈을 쓰고 귀신쫓는 놀이도 하는데 이를 광환절(狂歡節)이라고 한다. ≪구당서≫에 백제의 랍일행사가 중국과 같다고 하였으니 백제에도 중국의 랍제와 비슷한 제신행사가 있었음을 알수 있다.

고대에 조선민족의 조상들이 제신행사에서 마당밟기를 하였는데 마당밟기에 대해 ≪단군고기(16세 단군 위나)≫에서는 다음과 같이 기술하였다.

마당밟기는 닷새동안 연회를 베풀고 불을 밝혀 밤을 지새며 경을 외우고 마당밟기를 하는데 한쪽은 홰불을 나란히 하고 또 한쪽은 둥글게 모여서 춤을 추며 애한의 노래를 함께 불렀다. 애한이란 곧 옛날 신에게 올리는 노래의 종류를 말함이다.

조선민족 조상들의 랍일행사가 바로 이러한 제신행사와 류사한 행사라고 생각된다.

민간에 조왕신(灶王神)을 모시는 풍속이 있다. 부뚜막에 자리잡고있다는 조왕신은 매년 음력 12월 25일이면 하늘에 올라가 옥황상제앞에 모여 각 가정에서 일년 내내 있었던 일들을 일일이 옥황상제에게 보고하고 그믐날에 제 집으로 돌아온다고 한다. 하여 사람들은 조왕신이 옥황상제에게 보고할 때 자기 집의 일을 좋게 보고해달라고 음력 12월 25일 아침에 조왕신에게 기도를 드린다. 이것은 본래 중국의 풍속이였는데 조선반도에서도 오래동안 행해졌으므로 중국 조선족가운데서도 일부 가정에서는 20세기 40년대까지 이 행사가 지속되였다. "이것은 평소에 좋은 일을 많이 하고 더우기 신앞에서는 항상 참한 맘을 가지자는 경건한 마음가짐을 위해서 이루어진 도교적인 관습에서 온것이다".

12월 30일을 섣달 그믐이라 부르고 한문으로는 제석(除夕),제야(除夜) 등으로 표기한다. 이날을 까치설날이라고도 하는데 그것은 이날에 아이들에게 까치옷(색동저고리)을 입히기때문이다.

섣달그믐날은 한해의 마지막을 넘기는 때인만큼 옛날부터 여러가지 습관과 행사가 이루어졌었다.

(1) 1년동안의 빚을 청산한다. 남에게 빚을 받을것이 있으면 이날에 찾아다니며 다 받아내고 빚을 진 사람들은 역시 이날을 넘기지 않고 빚을 갚아준다. 만일 이날에 빚을 받지 못하면 새해 보름까지는 빚독촉을 하지 않는 습관이 있어 빚을 받을수 없게 되여버리기도 한다.

(2) 묵은 세배를 한다. 이날 저녁에 사당(祠堂)에 절을 하고 가까운 사이의 어른들에게는 설날에 세배하듯이 세배하는것을 묵은 세배라고 한다. 일년이 다 지나간다는 인사를 드리는것이다.

(3) 집안팎을 청소한다. 녀자들은 집안의 먼지를 털어내고 남자들은 마당을 쓸고 외양간을 친다. 묵은 해의 액운과 잡귀를 모두 쓸어버리고 깨끗한 새해를 맞아들임을 상징하는것이다.

(4) 설그림을 사서 집안벽에 붙인다. 설그림으로는 십장생(十長生)그림을 붙이는데 장생불사를 상징하는 열가지 물상(物象)으로서 해, 산, 물, 돌, 구름, 소나무, 불로초, 거북, 학, 사슴, 등이 포괄된다.

중국의 한족들은 섣달 그믐무렵이 되면 대문이나 출입문에 초복면재(招福免災)의 뜻으로 춘련(春聯)과 문신(門神) 그림을 붙이는 습관이 있다. 우리 민족에게도 먼 옛날부터 이와 류사한 습속이 있었다.

신라 제25대 임금인 진지대왕(眞智大王)은 행실이 매우 음탕한 임금이였다. 그때 사량부(沙梁部)에 자색이 뛰여난 녀자가 하나 있었는데 이름은 도화랑(桃花娘)이라 하였다. 하루는 진지대왕이 그녀를 왕궁에 불러들여 그와 상관하려 하였는데 그녀는 남편이 있으므로 허락할수 없다고 하였다. 그러자 왕이 그녀에게 묻기를 "너의 남편이 없으면 허락할수 있느냐."고 물었다. 그녀는 그러면 허락하겠다고 대답했다. 진지대왕은 정사를 제대로 다스리지 못해 그해에 페위당하고 죽어버렸으며 도화랑의 남편도 그 이듬해에 죽었다. 어느날 밤 왕의 령혼이 도화랑의 침실로 들어와 그녀와 동침하더니 그녀가 임신하게 되여 아들을 낳았는데 이름을 비형(劓荊)이라 하였다. 비형은 나라 임금이 죽어서 귀신이 되여 만든 아들이므로 저승의 온갖 잡귀신들은 모두 그를 귀신의 두목으로 간주하고 그에게 절대 복종하였다. 그리하여 사람들은 아래와 같은 글귀를 써서 문에 붙이여 귀신을 쫓았는데 그것이 나라의 풍속으로 되였다.

갸륵한 임금의 령혼이 낳은 아들

비형왕이 있던 방이 여기로다

날고뛰며 쏘대는 뭇귀신들아

이곳에는 머물지 못할지라

聖帝魂生子,

鼻荊郎室亭。

飛馳諸鬼眾,

此處莫停留。

신라 제49대 임금인 헌강왕(憲康王)때 급간(級幹) 벼슬자리에 처용(處容)이란 대신이 있었는데 그는 본시 동해룡왕의 아들이였다. 그에게 용모가 출중한 안해가 있었는데 어찌나 이쁘게 생겼던지 귀신들도 욕심날 지경이였다. 어느날 밤 처용이 집안에 들어가니 그의 안해가 웬 사람과 한이불속에 누워있는것이였다. 그 광경을 본 처용은 춤을 너펄너펄 추며 다음과 같이 노래를 지어불렀다.

동경 밝은 달에

밤 이슥히 놀고 다니다가

들어와 자리를 보니

다리가 넷이고나

둘은 내해였고

둘은 뉘해인고

본디 내해다마는

빼앗는걸 어찌리

처용이 방금 문밖으로 나가려는데 귀신이 처용의 앞에 정체를 나타내며 무릎을 꿇고 말하기를 "내가 당신의 안해를 탐내여 상관하였소. 그런데도 당신은 노하지 않으니 감격스럽고 장하게 생각한 나머지 이제부터는 맹세코 당신의 얼굴만 그려 붙여둔것을 보아도 그 문안에 들어가지 않겠소."라고 하였다.

후에 민간에서는 처용의 화상을 그려 문에 붙이여 액막이를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