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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학신동", 과학자의 꿈을 이루다-복단대학 생명과학학원 전철학 교수

2019-09-17 13:07:00     责编:최월단     来源:央广网

   *연변조선족자치주 중학생수학경시대회 1등으로 연변일중에 추천

   *세계올림피아드수학경색 전국선발대회 30등으로 북경대학에 추천

   *한국과학기술원 카이스트에서 석사, 박사 과정 이수

   *세계 최초로 다섯번째 혐기성 암모니아 산화 미생물 발견

   *33세에 복단대학 생명과학원 부교수로, 38세에 정교수로 발탁

  *2013년, “교육부 신세기 우수인재 지지계획”입선

취재를 받고 있는 전철학 교수

   상해에서 “70,80년대생 과학연구일군” 시리즈 취재를 진행하는 동안 우리는 상해 복단대학 생명과학학원에서 교수로 재임중인 전철학 교수와 만났다. 하루전 국가자연과학기금 항목 평가 회의하고 상해로 돌아오자 바람으로 전철학 교수는 기자들을 따뜻하게 맞이했다. 전철학 교수의 사무실에서 우리는 어릴적 “수학신동”에서 점차 과학자의 꿈을 이룬 그의 성장 과정에 귀를 기울였다. 

   1973년, 전철학 교수는 룡정시 개산툰진 광종대대에서 1남2녀중 막내로 태여났다. 

   중학교 수학교원이였던 아버지의 영향 때문인지는 모르나 전철학 교수는 어릴 적부터 수학에 남다른 애착을 가졌었다고 말했다. 갓 소학교에 입학한 그는 당시 중학생이였던 누나의 수학교재를 손에 들고 수렬조합과 같이 기초가 없어도 리해할 수 있는 문제를 푸는 데 심취해 있었다. 

   하지만 그도 여느 어린이들과 다를바 없이 두 누나의 뒤꽁무니를 따라다니며 애꿎은 장난을 즐기던 개구쟁이였다. 그러던 3학년 때 아버지를 따라 화룡 동성으로 이사를 가면서 그의 생활에는 큰 변화가 발생하기 시작했다.

   “당시 저와 아버지가 먼저 동성으로 떠나게 되였습니다. 그때부터 자립능력도 강해지기 시작했고 놀아줄 사람이 없다보니 수학문제 풀이에만 집중했던 것 같습니다.”

   그때 처음 수학경시대회에 참가하면서 전철학 교수의 학구열은 전례없이 높아졌다. 그는 주변에 있는 문제집이란 문제집은 모두 찾아내여 풀군 했다. 선생님의 참고서를 빌려 보는 것도 다반사였다. 5학년 때는 수학선생님으로부터 중국어로 번역된 일본 수학도서를 빌려 보게 되였다. 하지만 책이 너무 두터웠던지라 누나가 나서 손으로 모든 내용을 베껴주었던 덕에 전철학 교수는 자료를 남길 수 있었다. 그는 매일 그 문제들과 씨름하는 재미에 푹 빠져있었다. 

 

전국미생물학회 교수사업위원회 회원으로 전국 미생물학 교수회의에서 기조 발언

    중학교 2학년 때, 연변조선족자치주 중학생 수학요청경시대회에서 그는 1등상을 수상했다. 하지만 그 이듬해에 열린 전국 중학생수학련합대회 선발대회에서 그는 선발자격은 가졌지만 등수가 크게 떨어졌다. 처음으로 닥쳐온 시련이였다. 

   구지욕에 불타 있었지만 자료가 부족했던 그는 학교의 공개 수업 시간에 우연하게 알게 된 화룡현 교육국 선생님한테 편지를 쓰기로 작심했다. 수학자료를 보내줄 수 없는지 문의하는 한 중학생의 절절한 부탁은 교육국 관계자의 심금을 울렸다. 그 분의 도움으로 전철학 교수는 전국 중학생수학련합대회를 한주일 앞두고 화룡5중에서 그 학교 학생들과 함께 훈련을 진행할 수 있게 되였다. 이곳에는 자료가 너무 많았다. 그는 한주간 학교 당직실에서 주숙하면서 코피가 터질 정도로 열심히 문제풀이에 전념했다. 

   그의 노력은 헛되지 않았다. 대회에서 전주 1등의 성적으로 연변1중에 추천되는 행운을 맞이하게 되였다. 

   수학경시대회를 거쳐 연변1중에 추천된 학생들은 여름방학 기간 고중3년의 수학 과정을 모두 마치고 수학경시대회를 위한 준비에 박차를 가했다. 그해 9월, 전국 고중생 수학경시대회에서 전철학 교수는 길림성 2등상의 영예를 안았다. 

   하지만 그의 행보는 늘 순탄치만은 않았다.

   고중2학년 때 참가한 전국 고중생 수학경시대회에서 그는 예상대로 좋은 성적을 따내지 못했다. 성적은 오히려 그 전해보다도 낮았다. 이 길을 견지해야 할지도 고민했었지만 그는 결국 한번 더 노력해보기로 결심했다. 

    다음해 열린 전국 고중생 수학경시대회에서 전철학 교수는 길림성 1등, 전국 19등의 성적을 따냈다. 이 대회를 바탕으로 그는 북경에 가서 세계올림피아드 훈련선발대회에 참가하는 자격을 얻게 되였다. 선발대회에서 15등까지 입선된 선수들은 중국을 대표해 세계올림피아드 수학경색 준비훈련에 참가할 수 있었다. 전철학 교수는 비록 30등의 성적으로 여기는 입선되지는 못했지만 그해 연변1중에서 유일하게 북경대학 화학과 전공에 추천되는 행운을 지니게 되였다. 

   왜서 자신이 가장 소질이 있는 수학을 전공으로 선택하지 않았는가 하는 기자의 질문에 전철학 교수는 당시 전공에 대한 료해가 부족했던 탓에 우연하게 수리화에서 제일 약했던 화학전공을 선택하게 되였다고 말했다.

   “당시에는 인터넷도 없고 해서 대학에 가서도 수학은 그냥 문제를 푸는 학과일 거라고 잘못 인식했었습니다. 후에 알게 된 사실이지만 수학에는 많은 분야가 망라되여 있더라구요. 어린 마음에 새로운 연구내용이 많다고 생각된 화학전공을 선택하게 되였던 것 같습니다.”

 

   대학에 와보니 모든 게 낯설었다. 특히 언어가 문제였다. 고중까지 줄곧 조선어로 공부를 했었기에 개념, 정의를 접하는 데서 어려움이 적지 않았다. 

   담임 선생님의 추천으로 반에서 학습위원을 맡게 된 전철학 교수는 기중시험에서 전반 30명중 16등에 이름을 올렸다. 기말시험에서 더 좋은 성적을 따내기 위해 나름 열심히 공부했었지만 결과는 25등이였다. 고중까지만 하여도 줄곧 학년에서 앞자리를 차지하였던 그한테 이는 너무나 큰 충격이 아닐 수 없었다. 심지어 공부에 대한 회의감까지 들었다. 그는 선배들을 찾아 조언을 구하는 과정에 선배들로부터 많은 격려를 받으면서 공부를 포기하지 않고 견지하기로 작심했다. 

   “각 지역의 엘리트 학생들이 모인 만큼 성적제고는 생각처럼 쉽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공부를 견지한 것이 아닐가 생각됩니다.”

   전반 성적은 중하위권에 머물렀지만 수학만큼은 전 학년 140명 학생들중 늘 3위권 안에 머물렀다. 이는 그에게 큰 힘을 실어주었다. 

   사실 전철학 교수는 우여곡절 끝에 대학교를 순조롭게 마칠 수 있었다. 성적 때문이 아니라 생활고 때문이였다. 대학교 2학년 때 아버지가 돌아가시면서 워낙 넉넉치 못했던 가정형편은 더욱 어려워졌다. 학업을 견지해야 하는지 고민하고 있을 무렵 북경대학 국제관계학원에서 근무하던 박혜숙 선생님의 소개로 북경대학에서 류학중이던 한 한국 류학생이 장학금을 지급하겠다고 선뜻 나선 것이였다. 참으로 고마운 분이였다. 

   대학교를 졸업할 때쯤 그는 그 류학생 분과 처음 만나 인사를 전했다고 한다. 그 인연은 지금까지도 이어지고 있다고 전철학 교수는 말했다.

 

제자들과 함께

   “저는 학생들한테 늘 그런 말을 하군 합니다. 가정형편이 어려워 다른 분의 지원을 받는 데 대해 부끄럽게 생각할 필요가 없다구요. 열심히 노력해서 능력이 될 때 다른 사람을 도와주는 것이 보답의 길이라고 느껴집니다.”

   1997년, 북경대학을 졸업한 전철학 교수는 한국 류학의 길에 올랐다. 대학 3학년 때 지인의 소개로 알게 된 한국의 한 교수와의 연이 이어져 한국행을 결정하게 되였다. 전공분야는 환경미생물이였다. 본과 시절의 전공은 아니였지만 그는 대학교 4학년 때부터 주동적으로 생물과학과 환경공학에 관한 내용을 접하게 되였다. 

   “대학 4학년 때 청화대학 환경학과의 조선족학생을 통해 그 분야 교수님을 찾아뵌 적 있었습니다. 그후 1년간 청화대학에서 직접 실험에 참여하였고 결국 졸업론문도 청화대학에서 마무리하게 되였습니다. 그 학생하고는 나중에 함께 한국으로 류학을 가게 되였고 결혼까지 골인하게 되였습니다.”

 

   그렇게 전철학 교수는 한국과학기술원에서 7년 남짓한 시간동안 석박사 과정을 이수했다. 주요한 연구 분야는 미생물을 리용한 중금속 독성 폐수의 처리였다. 그 과정에서 여러가지 환경에 어떤 미생물들이 존재하는지를 분석하는 분자생물학적 방법들을 접하게 되였고 또 이런 방법들의 문제점도 알게 되였다. 이 시기의 연구는 후날 그가 해당 분야에서 인정을 받는 연구인원으로 부상할 수 있었던 밑거름으로 되였다. 

   한국에서의 류학생활을 마치고 복단대학으로 오게 된 계기도 우연에서 비롯되였다.

   당시 한국에서 열린 한중일 생물정보학 컨소시엄을 방청하러 간 그는 복단대학의 조국병(赵国屏)원사를 만나 자신의 연구 분야를 소개하게 되였다. 조국병 교수는, 메타지노믹스는 좋은 연구 분야라고 표하고 그러나 지금까지 거둔 성과로 교수는 어려우니 강사로라도 복단대학으로 올 생각이 없냐고 권유했다. 전철학 교수는 흔쾌히 동의했다. 

2019년 박사 졸업생, 석사 졸업생들과 함께

   2005년8월, 전철학 교수는 류학생활을 마치고 중국으로 돌아왔다. 상해에 처음 왔을 때는 강사 신분이였기에 조건이 매우 차했다. 기숙사에는 에어컨이 없어 여름에는 습기를 동반한 더위에 시달려야 했고 겨울에는 난방이 없는 원인 때문에 추위를 이겨내야 했다. 변변한 사무실도 없었다. 그는 미생물을 배양하는 실험실 한켠에 책상을 놓고 연구를 시작했다. 작은 용기부터 하나씩 장만하면서 실험과 연구에 정진했다. 아무것도 없는 상황에서 성과를 내야 한다는 조급함 때문에 스트레스도 적지 않게 받았다. 

   노력하는 자에게 성공은 늦게 찾아 올 수는 있어도 절대 외면하지는 않는 법이다. 

    복단대학에서 근무한지 2년 남짓한 시간이 지난 후에 그가 발표한, 혐기성 암모니아 산화미생물에 관한 론문은 당시 환경미생물 분야의 탑저널로 손꼽히던 <환경미생물 저널>에 실리게 되였다. 그전까지 알려지지 않은 다섯번째 혐기성 암모니아 산화 미생물을 발견하게 된 것이다. 지금까지도 발견된 혐기성 암모니아 산화미생물은 이 다섯가지가 전부이다. 이 론문은 다른 사람들의 론문에 300회이상 인용되였으며 교재에까지 반영되여 빛을 발하고 있다.

   이러한 성과들을 계기로 전철학 교수는 강사로 된지 얼마 지나지 않아 부교수 직함을 따냈고 다시 5년이 지난 2011년에는 정교수로 발탁되였다. 더 이상 사무실을 옮겨 다니지 않아도 되였고 자신만의 실험실도 갖추게 되였다. 

실험실 일각

   현재 그는 미생물 생태학 분야에서 미생물의 다양성 분석에 초점을 맞추고 새로운 방법들을 개발하여 예전의 연구에서 잃어 버렸던 새로운 미생물들을 찾아내는 연구를 펼치고 있다. 이 과정에서 암모니아를 질산으로까지 완전히 산화하는 완전질화균(全程硝化菌)을 농축해 내 중국자연과학기금위 중대연구계획의 지원을 받아 이 균의 분리와 특성연구에 총력을 기울이고 있다. 지금까지 전철학 교수는 SCI 론문을 60편 이상 발표했다. 이외에도 그는 연구 분야에서 많은 특허를 보유하고 있다. 

   최근에는 죤슨 앤 죤슨(强生)회사와 손잡고 피부미생물 관련 연구를 진행하여 잇따라 성과를 거두고 있다. 나이와 엄마가 어린이 피부미생물에 주는 영향을 고찰한 연구결과는 피부병연구분야에서 톱저널인 <Journal of Investigative Dermatology>에 올해 8월에 온라인으로 발표되였으며 올해 이 저널의 유일한 저널뉴스로 선정되여 <Elsevier> 출판사에서 직접 뉴스로 보도하였다.

실험실 설비를 소개하고 있는 전철학 교수

   비록 수학과 화학분야 연구를 진행하고 있지는 않지만 많은 미생물이 혼합된 환경 샘플 중의 거대한 유전자 염기서열들을 분석하는 메타게놈(宏基因组) 연구에서 그의 수학 재능을 발휘할 수 있고 미생물에 의한 물질변화연구에서 예전의 화학전공기초가 엄청 도움이 된다면서 전철학 교수는 현재의 여러 분야 지식이 결합된 융합 연구에서는 예전에 배웠던 지식과 사고방식들이 하나도 헛되지 않다고 이야기하였다.  

   “연구는 단조로울 수 밖에 없습니다. 매일 같은 실험을 반복해야 하니깐요. 하지만 탐정이 하나하나의 단서를 꿰매여 사건을 해결하 듯 결과를 밝혀내는 과정에 집중한다면 그 희열이나 성취감은 론문이 발표될 때보다도 더 크다고 생각됩니다.”

   하여 전철학 교수는 늘 학생들에게 “우물 안의 개구리”가 되지 말아야 한다고 교육하고 있다. 그는 기계적인 지식전달보다는 학생들로 하여금 과학적인 세계관, 사고방식을 키우도록 이끌어줌으로써 시야를 더 넓고 더 멀리 내다보도록 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가족사진

   어릴적 수많은 수학경시대회에서 상을 수상했던 그였지만 자신은 결코 총명한 학생이 아니라 거부기처럼 속도는 느리지만 꾸준히 노력하는 학생이였다고 전철학 교수는 말했다.  

   “저의 꿈은 제가 하는 분야에서 사람들의 인정을 받는 것입니다. 아직 부족한 점이 많지만 꾸준히 노력한다면 10년, 20년후에 그 꿈을 이룰 수 있지 않을가 생각합니다.”

   쉼없이 꾸준히 달려온 지난 날을 뒤로 한채 전철학 교수의 인생 제2막이 더욱 화려한 변주곡을 울려주길 기대한다. 

글 중앙인민방송국 박민걸

사진 중앙인민방송국 연변편집부 최상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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