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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팽이 약속 나는 어떻게 연변사람이 되였는가

2022-10-03 10:09:00     责编:최월단     来源:중앙인민방송국

글 문정 · 방송 구서림

  

    연변은 내가 태여난 곳이 아니다. 하지만 이 고장에서 40년 가까이 살았으니 시나브로 명실상부한 연변사람이 되여버렸다.

    나는 연변에서 천리나 떨어져 있는 매하구시(梅河口市) 에서 태여났다.

    돌이켜 보니 내가 연변사람이 된데는 몇몇 연변사람들과의 좋은 인연 덕분에 연변에 대한 인상이 내 마음 속에서 아름다운 꽃으로 피여났기 때문인 것 같았다.

    내가 초중 일학년 때 나보다 열네살 년상인 큰 형님이 연변 마누라(지금의 연길시 의란진 구룡촌 사람)를 맞아들였는데 색다른 연변 말투에 나는 그만 홀딱 반해버렸다. 국(汤)을 장물, 물만두(饺子)를 밴새, 돼지고기를 도투괘기, 성냥을 비시깨, 소(牛)를 쇠라고 부르는 것이 너무나도 재미있었다. 이런 사투리 보다 더 나의  마음을 사로잡은것은 달콤하고 인정미가 넘치는 례절바른 연변 말투였다. 우리 고향 사람들은 자신보다 퍽 많이 년상이고 존중해야 할 대상과 대화 할때는 «예», «이랬어요,저랬어요»하는 식으로 례절을 갖추지만 자신과 동년배는 물론이고 자기보다 대여섯살 이상인 사람,심지어 부모님과도 그냥 허물없이 반말을 하는데 습관이 되였는데 연변사람들은 그렇지 않았다.

    나이가 많이 이상인분에 향해서는 무조건 표준 존칭어로 «...습니다, 습니까»를 쓰고 나이가 조금 우거나 비슷한 사이면 조금 낮추어 «야ㅡ아~아~»하는 식으로 말하고 손아래 사람이나 아주 허물없는 사이면 완전히 낮추어 말하는데 말끝에서 인정미가 찰찰 흘러넘쳤다. 우리는 그저 «예, 예» 아니면 «야,자» 두가지 계칭으로 말하는데 연변말에는 «야ㅡ아~아 ~»하는 정답고 재미있는 계칭이 하나 더 있었다. 우리는 형제 사이에 존칭어를 쓰지 않는데 연변사람들은 «야ㅡ아~아~»하는 재미있는 호칭으로 상하를 분명하게 구분시켜 주어서 듣기 좋았다.

    내가 초중 3학년 졸업학년에 들어서던 해인 1981년에 마침 연변한어사범학교(지금의 연변대학사범분원)이 새로 세워져 학생모집이 나왔는데 우리 매하구시에 8명의 시험자격생 정원이 내려왔다. 우리 학교는 규모가 작은 농촌 중학교라 한명 밖에 차례지지 않고 그중에서 2:1비례로 4명이 진학할 수 있게 되였는데 학교 지도부에서는 학급에서 반장이고 학습 성적이 첫자리인 나에게 그 기회를 주었다.

    하지만 지금까지의 학습성적을 보면 앞으로 얼마든지 중점대학에 진학할 수 있으니 대담하게 포기하라고 주위 사람들이 극력 반대해 나섰다. 그러나 큰형수님을 통해 연변에 대한 호감도가 너무 강했던 탓에 연변한어사범학교에 지원서를 제출하는 나를 그 어느 누구도 막지 못했다. 이리하여 시험을 거쳐 어렵지 않게 연변한어사범학교에 진학하여 연변 각지에서 모여온 학우들과 교제하며 우정도 쌓고 연변에 대한 사랑의 감정을 더욱 돈독히 키워나갔다.

    그러다가 2학년 때 위병으로 연변병원에 12일간 입원하게 되었다. 가까운 일가친척 하나 없었지만 동창들의 각별한 보살핌을 받았는데 연변 동창생들의 나에 대한 다함없는 사랑의 손길이 40년이 지난 오늘까지도 식지 않고 따스하게 느껴지고 있다.

    룡정에 집이 있는 종순이라는 친구는 아버지를 통해 향신용합작사에서 2000원이라는 거액의 대부금을 맡아 나의 치료비용으로 쓰게 했고 집이 북대에 있는 성철이는 끼니마다 자전거를 타고 도시락 밥을 날라 주었으며 훈춘에 집이 있는 웅길이는 아껴모은 돈 30원을 선뜻 내놓았다.

    그때가 집에서 나에게 생활비용으로 다달이 5~10원씩 부쳐오던 때였으니 30원과 2000원의 가치는 엄청나게 큰것이였다. 바다보다 더 깊은 동창들의 은혜를 나는 죽어도 잊지 못할 것 같다.

    그리고 연변에서 살며 전에 보지도 듣지도 못했던 맛갈진 음식들 ㅡㅡ청국장, 총각무우, 하마(기름개구리), 매운탕, 메밀국수, 도토리묵, 고추순대, 콩장...등 이름만 들어도 구수한 맛이 물씬 풍기는 먹거리들도 나를 호강시켰다. 뿐만 아니라 비록 룡정의 삼합, 동성, 지신, 개산툰, 화룡의 팔가자, 와룡, 서성, 안도의 석문, 돈화의 마호, 액목등 일부 지방 밖에 다녀오지 못했지만 가는 곳마다 산천경개가 수려하였고 호객적인 우리 민족의 진한 향기를 만끽할 수가 있었다.

    졸업후 매하구에 배치받아 사업을 하게 되였지만 나와 «연변»의 인연은 끊어지지 않았다. 연변의 동창들에게서 연변으로 전근하면 어떠냐고 묻는 편지가 자주 왔다. 거리가 너무 멀어 자주 만나지 못하니 정이 멀어진다는 내용이였다.

    그리하여 1993년에 사업 전근을 신청했는데 순조롭게 비준되여 돈화시에 와 사업하다 다시 훈춘시에 전근해 정착해 살고 있다. 훈춘에 와 살면서도 여러가지 나를 감동시키는 에피소드가 있었다.

    한번은 전동삼륜차를 몰고 하다문 하산이라는 시골을 다녀오다 도중에서 차가 고장이 나서 가도 오도 못하고 궁지에 빠졌는데 생면부지의 조선족 아저씨가 승용차를 몰고 지나가다가 팔소매를 걷어붙이고 나서서 무려 40여분동안 수고하여 수리해준 일도 있다. 정말 눈물겹도록 후덥고 고마운 분이였다. 

    또 한번은 택시에다 현금 2800원과 여러가지 증명서류 그리고 스마트폰이 들어있는 가방을 두고 내린 적이 있는데 고마운 택시 운전사가 나의 핸드폰 통화기록을 통해 나의 친구와 련락을 취해 나에게 가방을 돌려주었다.

    뢰봉아저씨의 이야기를 어렸을 때 많이 들어보았지만 그저 사람들이 만든 이야기겠지 하고 여겼었는데 이렇게 금전을 조금도 탐내지 않는 고상한 인격의 소유자ㅡㅡ«살아있는 뢰봉»을 내눈으로 처음 만나보고 나는 크게 감격했다.

    (이 택시차의 번호는 吉H.T 7455였다.)

    연변은 실로 산천이 수려하고 음식 문화가 풍부하고 인품이 좋아 살기좋은 고장임에 틀림이 없다. 더우기 고속철도, 고속도로, 하늘길이 열림에 따라 연변은 더욱 비약적으로 발전하고 있다.

    연변땅에 와서 살아가며 내가 가장 감명깊게 느낀 것은 공부는 글과 책 속에서만 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내가 만난 수없이 많은 분들에게서 나는 시나브로 인생을 배워가고 있으니 말이다.

    «연변사람은 다 좋다» 이렇게 말하면 새빨간 거짓말이 되겠지만 연변에서 수십년간 살아오며 나는 조선민족의 지혜와 얼을 보았고 연변사람은 십중팔구가 례절 밝으며 정의감 넘치고 남을 돕기를 즐기고 건전한 문화 오락을 즐기는 후더운 분들임을 목격해왔다.

    연변사람들에 대한 인상을 모두어 보면 연변사람 거개가 문명하고 생각과 삶의 질이 높다는 것이다.

    바로 이런 분들의 매력이 자석처럼 내 마음을 끌어당겨 «연변사람이 아닌» 내가 «연변사람»으로 탈바꿈해 40년 가까이 살아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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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팽이 약속 나는 어떻게 연변사람이 되였는가

연변은 실로 산천이 수려하고 음식 문화가 풍부하고 인품이 좋아 살기좋은 고장임에 틀림이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