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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겨진 밥상

2022-07-01 17:07:01     责编:박운     来源:央广网
 

글 궁금이 · 방송 리국호

 

 

   

    매일 아침마다 그날의 날자를 먼저 적고 글을 시작한다. 오늘도 관성으로 6자를 찍었다가 다시 7로 고쳤다. 상반기가 다 지나갔다는 얘기다. 올해는 유난히도 줄을 많이 섰다. 성악가 못지 않게 입도 많이 벌려봤다. 본의 아니게 입안을 들쑤시고 들어오는 면봉도 많이 허락했다. 비싸게 주고 산 혹은 비싼 세를 낸 집의 리용률도 전례없이 높여줬다. 이제 외식도 자유롭게 하면서 바깥 세상을 많이 탐색할 수 있는 하반기가 되였으면 좋겠다.

 

    시골에 프로를 찍으러 내려간 사회자가 정자에 놓여 있는 밥상을 발견한다. 덮어놓은 천을 들어보니 뜨다 만 밥과 말아드신 것 같은 물공기가 놓여 있다. 그 옆에 단촐하게 나마 김치가 있어서 허전한 밥상 공간을 애써 채워준다.

  

    “밥을 채 못 드시고 일하러 가셨나 보다. 우리 시골 어르신들은 이렇게 밥을 편한게 드실 시간도 없이 일했죠. ”

    밥상의 주인공은 나중에도 정자에 나타나지 않았다. 그 장면을 보면서 순간 엄마의 식사가 떠올랐다. 엄마가 계셨던 고향의 양로원은 음식이 아주 잘 나오는 편이였다. 식판에다 배식을 하는데 야채도 있고 고기도 있고 국도 딸려나온다. 출장 기회에나 엄마를 찾아뵙는 나로서는 자식이라기보다는 거의 손님에 가까운 존재였다. 그것도 언제 찾아뵙는다는 사전 알림도 없이 불쑥불쑥 나타났다. 놀라기도 하고 더욱이는 반가워하셨지만 내가 조금만 앉아 있다가 간다는 데도 익숙해지셨다. 

  

    오전에 일을 보고 양로원에 가면 점심이 맞띄우는 때가 있다. 아들이 왔는데 양로원이라 뭐 해줄 게 없는 엄마는 식판에 나온 밥을 같이 먹자고 한다. 나는 좀 있다가 또 가야 되니 엄마가 천천히 드시라고 한다. 그래도 좁은 침대에서 자꾸 벽쪽으로 몸을 움직이며 나더러 앉으라고 한다. 왜 그때는 하다못해 먹는 척이라도 하지 않았던지 모르겠다. 손님처럼 찾아뵙긴 해도 그런 시간이 다음에도 그 다음날에도 계속 있을 줄로만 알았다. 

  

    후날 나는 이런 후회를 한다. 배달이 이렇게 발달한 세월에 엄마를 뵈러 가는 길에 색다른 음식을 배달해 드리고 엄마 식판의 밥을 내가 먹었더면 얼마나 좋아하셨을가. 당신이 직접 한 밥은 아니지만 그렇게라도 옹근 식판으로 아들에게 점심 한끼 먹인 셈으로 되였을 텐데. 구내식당에서 먹어봐 알지만 아무리 좋은 식당 음식이더라도 몇달이고 장시간을 먹으면 새나는 법인데 엄마라고 양로원의 밥이 례외는 아니였을 것이다. 내가 왜 배달을 생각하지 못했던지도 안타깝고 그 생각을 이제야 한다는 것도 한심하다. 매일 시켜드리는 것도 아니고 일년에 고작 몇번인데 그걸 내가 해드리지 못했다. 

  

    평생 엄마로부터 얻어먹은 밥이 얼만데 나는 엄마의 식단을 양로원에 맡겼다. 그냥 양로원의 비용만 지불하면 되는 출납 같은 자식이였다. 이웃이 사촌보다 낫다고 오히려 한 시내에 계시는 외사촌형님 내외와 사회에서 만난 동생 그리고 동창들이 나보다 더 나았다. 그들은 마늘장아찌도 만들어다 드리고 엄마가 알아보지 못함에도 아무개 친구라고 자아소개까지 해가면서 찾아뵈였다. 말이 쉽지 다들 잊으면 안 되는 인연들인데 그 빚도 내가 제대로 갚고 있는지 모르겠다. 

  

    지금도 숟가락이 밥그릇에 부딪치는 소리가 날 때면 엄마 생각이 난다. 엄마는 신문에서 읽었는지 당뇨에 좋다면서 매일 아침마다 도마도에 닭알을 볶아 드셨다. 닭알 부스러기를 한점이라도 남길세라 반복적으로 끌어서 드시다보니 아침마다 숟가락이 그릇에 부딪치는 소리가 들렸다. 

  

    “이제 내 여기서 치료하는 것도 없다. 언제면 집에 가니?”

    양로원이 병원인 줄로만 알았던 엄마가 드문드문 물어오는 질문이였다. 병원이 아니라는 걸 진작 아셨으면서도 그냥 속아줬는지도 모른다. 지금 우리가 보름만 격리해도 울상을 하는 그런 생활을 엄마는 바이러스 먼저 시작했다. 나중에는 치매기가 심해지면서 요 앞에 나가면 버스를 타고 집에 간다고 했다. 복도에서 다른 로인들과 같이 계시다가도 내가 나타나면 우리집에 가자면서 당신의 숙소로 손을 끌었다. 타향도 정이 들면 고향이란 말은 있어도 양로원도 정이 들면 내집이라는 엄마는 없을 것이다. 정이 들 리도 없겠지만.

 

    거울을 사달라고 해서는 매일 아침마다 머리를 곱게 빗고 앉아계시던 엄마는 어느날 아침을 드시다가 조용히 가셨다. 채 하지 못한 마지막 식사였다. 비보를 접하고 고향으로 가는 비행기안에서 기껏 생각했다는 게 엄마의 수저를 간직하고 싶었다. 그런데 정작 도착하고 나니 마지막 가시는 길에 수저까지 없이 보내드린다는 것도 한심한 생각이였다. 

  

    그날 점심의 식판은 엄마가 다시 마주하지 못했다. 아들을 먹이고 싶어도 혹은 같이 드시고 싶어도 그럴 날이 다시 오지 않는다. 엄마는 이날 차가운 식판 하나에 좁은 침대 하나만 남겨놓은 채 양로원을 나와 또다시 어디로 가시는 줄도 모르는 길을 떠났다.

 

    그날 아침에도 식판에 숟가락이 부딪치는 소리가 났는지 모르겠다.

 

 

궁금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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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겨진 밥상

매일 아침마다 그날의 날자를 먼저 적고 글을 시작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