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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다시 그려보는 그 이름, 정률성

2020-08-01 17:12:05     责编:박운     来源:央广网

    8월 1일 건군절이다. 건군절, 국경절 우리나라의 중대 기념일마다 빠지지 않는 음악, 듣기만 해도 힘이 솟고 박진감 넘치는 곡조, 바로 중국인민해방군행진곡이다. 

 

 

    1937년 중화 대지가 일본 침략자의 철제에 짓밟혔다. 산하가 부서지고 백성들은 도탄에 허덕였다. 중화민족은 최대의 위험에 빠졌다. 적군의 무차별한 진공에 맞서기 위해 중국공농홍군주력부대는 국민혁명군 제8로군으로 재편성되여 저항전을 펼치면서 감격의 서사시를 써내려갔다. 그 후로 2년이 흐른 한겨울의 연안 보탑산을 진동시킨 우렁찬 노래소리ㅡ

 

 

    순박한 노래말에 간결하면서도 박진감 있는 곡조와 격정 넘치는 선률로 이뤄진 이 노래는 우리나라의 명시인인 공목 시인과 천재 작곡가로 불리는 정률성이 함께 지은 “팔로군행진곡”이다. 이 곡은 중국공산당이 령도하는 항일 무장력량의 희생을 두려워하지 않는 영용함과 불굴의 정신력, 호기로운 기세를 재현했다. 

   

    1939년 인민의 음악가로 불리는 선성해 동지의 “황하대합창” 영향에 힘입어 정률성과 공목은 “팔로군대합창”이라는 모음곡을 창작했다. “팔로군행진곡”은 모음곡중 여덟번째 곡이다. 정률성과 공목은 인민군대의 무한한 열성과 기개를 가사에 담아 행진곡을 완성했다. 작곡을 맡은 정률성은 악보 첫 페이지 웃쪽에 큼지막한 여덟글자를 적었다. “팔로군 영웅들에게” 

  

    “앞으로 앞으로 앞으로! 우리의 대오는 태양을 향해......”, 당시의 “팔로군행진곡”이 중국인민해방군 군가로 불려지고 있다. 중국인민해방군은 이 노래를 부르며 일본 침략자들과 맞서 싸웠고 이 노래를 부르며 천안문 광장에서 모주석의 검열을 받았다. 

 

정률성(1914-1976)

 

    오랜시간 무수한 곳에서 자연스럽게 불려진 군가, 무수한 사람들에게 힘을 실어준 군가, 그런 군가의 영향력에 비해 군가를 창작한 작곡가 정률성에 대한 관심은 상대적으로 저조했다. 중국인민해방군 건군 93주년을 맞은 오늘, 불굴의 음악가 정률성을 회억하며 “군가에 깃든 옛이야기”를 후세에 전하는 것이 기성세대의 사명일 것이다. 

 

정률성의 딸 정소제 녀사

정률성 탄신 100주년 기념 음악회에서

  

    60대를 훌쩍 넘긴 정률성의 딸 정소제가 색바랜 음반 한장을 꺼내보였다. 딸 정소제 녀사는 음반을 조심스레 돌렸다. “군가”의 기세넘치는 곡조가 흘러나온다. 

 

    정소제 녀사는 부친 세대 군가 창작자들의 이야기와 전우들이 남기고간 기억들을 들려주었다. 그의 손에는 거칠게 빼곡히 채워진 복사본 서류가 들려져있었다. 얼핏 봐도 확연히 다른 두가지 필체였다. 

  

    정소제 녀사는 공정문공단 단장이며 공군정치부 문화부장이였던 황하 아저씨를 위문갔을 때의 기억으로 이야기를 시작했다. 86세의 황하 동지는 뇌졸중으로 대화가 어려운 상황이였고 글쪽지로 대화를 주고받았다. 복사본은 당시 황하 동지와 나눈 쪽지 내용이였다. 오랜시간의 투병에도 황하 동지는 당시 상황을 또렷이 기억하고 있었다. 집에 돌아와 대화쪽지를 반복해 훑어보며 일었던 감격의 파장은 정소제 녀사에게 지금까지 그대로 남아있다. 

 

정률성과 부인 정설송 녀사 

 

     “부친은 나의 가장 친한 친구란다. 정률성과 그의 부인 정설송 녀사가 많이 보고싶구나. 정설송 녀사께 전해다오, 많이 기뻐하실거야. 너의 부친은 두나라 군가를 창작한 음악가로서 음악계에서는 아주 드문 인민의 음악가지...”

   

    정소제 녀사는 황하 동지와의 대화내용을 보여주며 아버지 세대 음악가들의 군가 창작 과정을 들려주었다. 

 

정률성의 딸 정소제 녀사

아버지 정률성이 생전 생활했던 토굴에서

현재의 집주인 할머니와 기념촬영

 

연안의 토굴에서 

대야를 두드리며 창작한 군가 

 

    정률성은 1914년 7월 7일 조선반도 남부의 전라남도 광주 양림정(현재의 한국 광주광역시 양림동)에서 태여났다. 태여날 당시 이름은 정부은이였다. 그가 태여나기 4년전인 1910년 조선은 일본 군국주의 식민지로 전락해 있었다. 애국주의자였던 정률성의 부친 정해업은 아들이 항일 구국투쟁 참가를 기껍게 여겨 아들에게 항상 힘을 실어주었다. 정률성의 세 형들도 모두 조선과 중국의 민족해방운동에 참가했었고 그중 맏형과 둘째형은 중국 공산당원으로 혁명투쟁에서 희생되였다. 정률성은 19세에 세 형을 따라 중국으로 이주해 남경의 “조선혁명간부학교”에서 공부했다. 남경에 도착한 후 그는 조선혁명 간부학교에 다니면서 로씨야인 스승에게서 음악을 배웠다. 당시 그의 음악 잠재력을 알아본 김원봉이 ‘음악으로 성공하라’는 뜻으로 ‘률성(律成) 이란 이름을 지어줬다고 한다.

 

1933년의 정률성

 

    졸업후에는 전화국에 배치받아 일본인의 정보를 수집하는 작업을 담당했었다. 정률성의 신분을 보호하기 위해 조직에서는 그를 상해에서 음악공부에 열중하도록 자금면의 지원을 주었고 그때부터 그의 음악재능은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했다. 

 

연안에서 

    

    “7.7사변”이후 정률성은 몇명 유지청년들과 함께 연안에 몸을 의탁했고 그때 시인 공목(본명 장송여)을 만나 한 토굴에서 지내게 되였다. 1939년 10월 음악에 천부적 재능을 가진 정률성은 “황하대합창”에서 령감을 얻었고 령감에 힘입어 함께 지내던 시인 공목과 손잡고 “팔로군대합창”을 창작했다. 

 

군가를 작사한 공목 시인

 

    희뿌연 화염을 헤가르며 울려퍼진 드높은 노래소리, 그 박자에 따라 군기가 힘차게 나붓겼다. 당시의 문예종사자들은 전사들과 함께 혈투에 몸을 던지며 생사의 갈림길에서 고난의 상황을 이겨내기 위해 곡을 쓰고 노래말을 입혔다. 

 

정률성과 조선혁명군정학교 학도들

   

    생전 정률성은 자녀들에게 자신의 성과를 이야기해준 적이 없다. 딸 정소제 녀사가 아는 건 주위 전우들에게서 들은 옛이야기뿐이다. 작사가 공목 선생은 생전 정률성의 행진곡 창작 과정을 이렇게 회억한다. 

   

    “피아노는 고사하고 손풍금도 없었습니다. 머리를 끄덕이고 입으로 멜로디를 흥얼대며 손으로 박자를 치는 게 전부였습니다. 아, 어떤 날은 굴에 놓여있던 흰나무 책상 주변을 제자리걸음으로 돌며 박자를 맞출 때도 있었죠......”

   

    토굴에서 대야를 두드리거나 다리를 북삼아 박자를 맞추며 완성한 것이 “중국인민해방군 군가”라고 회억하는 옛전우도 있다. 

 

 

    환경은 이루 말할나위 없이 람루했고 더우기 소부대들이 분산되여 작전을 펼치던 시기였던지라 당시 정률성의 심중에는 인민군대의 사기를 진작시키려는 의지가 강렬했다. 이렇게 중국인민해방군 군가는 작곡 도구 하나없이 오로지 대국을 위한 흉금과 승리의 굳은 신념만으로 만들어졌다. 이것이 정률성의 옛전우들이 이 곡의 창작과정을 돌이켜 생각하며 “神”이라는 한글자로 표현하는 리유이다.

 

조선군가의 창작자 역시 정률성

 

    항일전쟁에서 승리를 거둔 후 정률성과 그의 부인 정설송 녀사는 조선으로 돌아갔다. 그의 정치적 신분도 중국공산당 당원에서 조선로동당 당원으로 바뀌였다. 귀국후 정률성은 지시에 따라 조선보안대 (조선인민군의 전신) 구락부 부장 (중국 문화부 부장급) 을 담임했다. 이 기간에도 그는 조선인민군협주단 창단 준비사업에 진력했다. 

   

    정률성의 충만된 창작 열정은 조선군민을 위한 많은 곡들을 탄생시켰다. “조선인민군행진곡”, “조선해방행진곡”, “동해어부”, “두만강” 대합창 등 10여편의 작품 모두 이 시기에 탄생한 곡들이다. “중국인민해방군행진곡”처럼 “조선인민군행진곡”은 조선의 군가이다. 옛전우 황하 동지가 정률성을 “두나라 군가의 창작자”라고 이름지은 까닭이다. 

 

폐허가 된 당시 서울의 상업구 종로에서

 

    부인 정설송 녀사는 당시 평양에서 화교련합총회 위원장, 평양 주재 신화통신 지사 사장을 맡고 있었다. 부부는 각자의 자리에서 나라를 위해 고군부투했다. 

   

    중-조 량국이 공식 수교하면서 중국정부는 조선 평양에 중국 대사관을 앉혔다. 두나라사이 합의에 따라 정률성과 부인 정설송 녀사는 국적을 선택해야 했다. 부부중 일방이 상대방의 국적을 따라야 했던 것이다. 그 해 9월 정설송 녀사는 상급 인사조정 지시에 따라 중국으로 돌아왔다. 그 뒤로 얼마 지나지 않아 주은래 총리가 정률성 동지의 중국 귀화를 허락해 달라는 친필 서한을 김일성 동지에게 보냈다. 주총리의 서한과 김일성주석의 비준문서를 받아든 정률성 동지는 전란으로 멍들고 있는 고향을 쉬이 떠날 수 없어 한참을 망설였다. 

   

     “동지들이 전란에 허덕이고 있습니다. 그런 동지들을 두고 조선을 떠나자니......”

   

    그런 정률성을 보며 당시 조선 외무성 귀화서류 접수를 담당했던 한 책임자는 이렇게 그를 타일렀다. 

   

     “주총리께서 친필 서한을 보내 요청한 사안입니다. 기회를 놓치지 마세요. 마음이 불편하겠지만 중국에 가서도 불편함을 메꿀 수 있는 기회는 얼마든지 있습니다. 중국 음악가의 신분으로 조선을 다시 방문해 조선의 항일전선 사업을 도우면 되잖습니까? 이것도 좋은 기회일 듯 싶은데요?”

 

1948년 김일성 동지가 

정률성에게 수여한 상장 

   

    전하는 말에 의하면 주총리의 서한을 받은 김일성 동지도 정률성에게 이런 말을 건넸다고 한다. 

   

     “정률성의 중국 귀화라... 좋죠. 중국공산당이 조선을 위해 그리도 많은 간부들을 양성해 냈는데 지금 중국에 정률성 동지가 필요하다면 기꺼이 귀화를 허락하겠습니다.” 

   

    이렇게 되여 이후 정률성은 주은래 총리의 비준을 거친 뒤 중국에 입적했고 부부는 중국공산당 당적을 회복했다. 

 

유한한 생명을 무한히 이어가는 군가의 선률

 

    정률성 동지는 현재 팔보산 혁명공동묘지에 고이 잠들어 있다. 딸 정소제 녀사가 감동사연 하나를 들려주었다. 

  

     “인쇄공장에서 일하던 류채원이라는 분이 계십니다. 아버지의 낚시 친구였죠. 낚시를 하며 친분을 쌓은 두분은 못할말 없는 친구사이였습니다. 아버지가 돌아가신 뒤 류선생은 아버지의 묘지에 찾아와서 ‘너무 좋았습니다. 친구도 군가도!’라며 비통해 했습니다. 해마다 청명절이면 류선생은 아버지의 묘지를 찾아 벌초를 합니다. 벌초를 한지도 어언 20년이 흘렀습니다.”

 

북경 팔보산혁명공동묘지

정률성과 정설송 녀사묘지

  

    이제는 모든 군인들의 가슴에 깊숙히 새겨진 군가, 군가는 일종의 정신력이자 신앙이다. 1988년 7월 25일 중앙의 비준을 거쳐 중화인민공화국 중앙군사위원회는 등소평의 명령 서명이후 “중국인민해방군행진곡”을 “중국인민해방군 군가”로 지정하기로 결정했다. 

  

    정률성 생애기념관 앞에는 왕진 동지가 정률성에게 남긴 한단락 글귀가 새겨져있다. 

 

     “저와 정률성 동지는 연안에서 알게 됐습니다. 당시 조선혁명 동지 몇명이 쏘련에서 연안으로 배치받아 “359”려단에 가입했습니다. 그때 모택동 동지가 저에게 ‘재능있는 젊은 작곡가 정률성이라고 있다던데 아느냐?’고 물었습니다. 제가 안다고 대답하자 모택동 동지는 새로 온 조선동지들을 정률성과 만나게 해주라고 당부했습니다. 당부에 좇아 저는 정률성 동지와의 만남을 요청했고 그 자리에서 주총사령관과 함께 식사도 했었습니다. 전쟁년대를 통틀어 팔로군, 신4군을 비롯해 광범위한 인민 모두가 정률성 동지가 지은 행진곡을 부르며 힘을 냈고 그가 창작한 “연안송”은 무수한 혁명자들에게 혁명의 의지를 굳히게 해주었고 공산주의 사업에 대한 신념을 확고히 다져주었습니다. 정률성 동지는 감화력 높은 음악작품으로 중국인민의 혁명사업에 불멸의 업적을 남겼습니다”

 

정률성 탄생지

 

    

    중국인민해방군 건군 93주년을 맞은 오늘, 또 한번 생각해본다. 세월이 지나고 리념적 색채가 옅어진 지금, 정률성 동지의 생을 반추하며 기념하는 가장 바람직한 자세는 그의 작품을 되새겨 부르면서 선률에 깃든 정신을 기리고 그 가치를 깨닫는 게 아닐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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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다시 그려보는 그 이름, 정률성

8월 1일 건군절이다. 건군절, 국경절 우리나라의 중대 기념일마다 빠지지 않는 음악, 듣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