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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팽이 약속 시어머님 사랑

2021-09-20 15:29:00     责编:김룡     来源:央广网

 

글  김순옥· 방송 구서림

    해마다 추석이 되면 나는 시부모님 산소를 간다. 우리 시부모님은 화룡시 동성진 흥성촌을 병풍처럼 빙 둘러준 양지바른 뒤산에 모셨다.  

    산소에서 저멀리 앞을 내다보면 60리 평강벌이 한 눈에 안겨오고 그 복판에는 해란강이 유유히 굽이치며 흐른다. 산소에서 남쪽으로 내려다 보면 대만처럼 논밭 복판에 자리잡은 우리 마을이 아름다운 풍경화처럼 눈앞에 펼쳐진다. 옹기종기 가지런히 줄지어 자리잡은 빨간 기와집이 무르익어가는 벼밭을 배경으로 아담하게 자리잡고 있다. 산 언덕 밑에는 연길ㅡ화룡으로 통하는 큰 도로가 있어 교통도 아주 편리하다.

    고향에 조상님 산소를 모신 것이 최고로 잘한 것 같아 마음이 뿌듯하다. 산으로 올라가는 수레길 옆에는 자그마한 바위가 있는데 해마다 추석이면 바위 앞에서 잠깐 담배쉼을 하고 산으로 올라간다. 추석이라 아침 저녁으로 싸늘한 초가을 날씨에 길가의 풀들은 맥없이 시들어가고 산 언덕 나무들도 가을을 재촉하며 이쁘게 물들고 있다.

    산소 언덕 길가에는 앙증맞은 가을 들국화 몇송이가 말라가는 풀밭에서 찬서리에도 꺾이지 않고 방긋 웃으며 아름답게 꽃을 피우고 있다. 비록 꽃송이는 크지 않지만 모진 세월을 이겨내고 곱게 핀 들국화가 꽃송이를 흔들며 나에게 오라고 손짓하는 듯 하다. 나는 도시에서 보지 못했던 들국화 향기에 취해 발걸음을 멈추었다. 좁디좁은 하얀색 꽃살은 노란 꽃술을 입에 물고 파란 꽃대와 잎은 가을 들국화꽃을 더욱 아름답게 생기있게 장식해주었다. 

    바람에 한들한들 춤추는 들국화는 시어머니 영혼이 나를 부르는 것만 같았다. 나는 들국화 옆에 살포시 앉아 눈가에 맺힌 이슬을 훔치며 돌아가신 시어머니 사랑의 온기를 찾아 함께 지냈던 날들을 떠올린다. 

    나는 1981년 4월 26일 친척분 소개로 지금의 남편을 만나 결혼하였다. 결혼후 시어머니와 한 마을에서 3년이란 짧은 세월을 살면서 시어머님의 사랑을 듬뿍 받았다. 처녀시절 엄마한테서 엄격한 교육을 받고 자라 시집간 나는 시부모님을 존경하고 시집 처사를 잘하라고 당부하던 엄마의 말씀을 명기하고 힘든 일이 있어도 입을 꾹 다물고 시어머니와 잘 지내기에 노력하였다. 

    인품이 좋고 마음씨 착한 시어머니는 매사에서 우리를 돌봐주었다. 비록 분가했지만 내가 먼 밭으로 일하러 가면 항상 우리밥까지 차려놓고는 나더러 손만 씻고 빨리 와 저녁을 먹으라 하셨다. 

    쌀이 귀한 세월이였지만 시어머님은 항상 니껏내껏이 없이 자식들한테 베풀었다. 가난한 세월에 어머님은 채소를 팔아서 우리에게 약간의 세간도 사주시군 하였다. 어머님은 항상 우에 아들들을 분가시키면서 집에서 좋다는 이불은 전부 나누어 주었기에 셋째인 너네는 이불도 기운 것 밖에 주지 못하여 미안해 하였다. 

    몸이 약한 내가 출산할 때에도 시어머님은 순조롭게 출산을 못할 것 같아 걱정이 태산이였다. 내가 힘들게 고생고생하여 4일만에 아들을 순산하고 시어머니 얼굴을 보았을 때 어머님은 입이 다 헤지고 코 밑까지 헐었다. 나는 그때에야 어머님이 마음 고생을 얼마나 했기에 입과 코가 다 헐었을가 하는 생각에 가슴이  뭉클하였다. 지금 내가 시어머니가 되고 보니 그때 어머님 마음을 알 것 같았다. 남의 귀한 자식이 우리 집에 시집와서 애 낳다가 큰일이라도 생기면 어쩔가, 노심초사하며 가슴을 조이고 시중해준 시어머님의 생각으로 가슴이 미여진다. 

    아들이 5개월 될 즈음에 감기로 앓던 시어머님은 기침으로 고생하였다. 아무리 마을 진료소에서 치료해도 어머님 감기는 호전되지 않았다.  

    어느 하루 어머님은 룡정 병원에 입원한 고모님 병문안을 가셨다. 어머님은 고모님의 간곡한 권고를 거역할 수 없기에 간단한 검사를 받기로 하였다. 의사 선생님의 건의대로 페 엑스레이를 찍고 혈액 검사도 하였다. 

    어머님과 고모가 초조한 마음으로 검사 결과를 기다렸다. 퇴근 시간이 다가올 무렵에 검사 결과가 나왔다. 검사 결과를 보시던 의사 선생님께서는 깜짝 놀라셨다. 의사 선생님은 아무말도 할 수가 없었다. 한참을 잠자코 있던 의사 선생님께서는 어머님더러 래일 가족분들과 함께 오라고 당부하셨다. 그날 저녁 우리는 어머님 병이 심상치 않음을 알아차렸다. 제발 암만은 아니기를 간절히 바라며 근심이 태산이였다. 

    이튿날 어머님은 큰 아주버님과 함께 의사 선생님을 찾아 병원에 갔다.  의사 선생님은 우리 아주버님을 만나 낮은 목소리로 어머님이 페암 말기라고 알려주었다. 이 불행한 소식을 들은 나는 억장이 무너지고 하늘땅이 뒤번지는 것 같았다. 그때 어머니 년세가 63세이며 막내 아들은 20살이였다. 어머니 젊은 년세도 아깝지만 우리 가정에도 어머님의 손길이 간절히 필요했으며 어머님이 없다면 시아버님은 어떻게 지낼 것이며.....어머님 없이 살아갈 인생을 생각하니 눈물이 샘처럼 솟았다.

    고생고생하며 오늘까지 살아온 어머님이 편안한 날 하루도 못 보내고 이렇게 무너지는 것이 안쓰러워 가슴이 찢어지는 것만 같았다. 40년전 암이란 단어를 사람들이 익숙히 알지도 못할 때 페암 말기 진단을 받았으니 시어머님을 구할 길이 없었다. 시어머님은 두달간 입원치료를 하시고는 별로 큰 효과를 보지 못하고 퇴원해 집에 돌아와 암에 좋다는 민간치료법으로 하루하루 버티였다.

    어머님의 병세는 때로는 호전되였다가도 더 심해지고 이렇게 반복이 오고 가면서 반년이란 시간이 흘러 우리 아들 첫돐 생일이 다가왔다. 

    어머님은 모진 아픔을 참아가면서도 콩나물과 녹두나물은 당신이 꼭 키워주시겠다고 자진해 나섰다. 나는 어머님이 힘드신데 다른 할머니들에게 부탁하겠으니 근심하지 말라고 당부하였다. 그러나 워낙 부지런하고 일 잘하는 어머님은 도저히 나의 말을 들으려고 하지 않았다. 어머님은 “할미가 콩나물도 안 키워주면 내가 할일이 뭐가 있는데"하며 억지를 부리는 바람에 나는 어쩔수 없었다. 어머님은 아픔을 참아가면서 끝내 어머님 손으로 손수 콩나물과 녹두나물을 키우셨다.

    1983년 모철이 다가오니 어머님 병은 극도로 심해졌다. 나는 매일 서툰 솜씨로 어머님한테 근육 주사도 놓아드리고 때론 목욕도 시켜드렸다. 어머님은 항상 왜소한 체구에 허약한 나를 근심하였다. 어머님은 나의 손을 꼭 잡고 부탁의 말씀을 하셨다. "셋째 며느리는 다시는 아이를 낳지 마오. 이번에 경선이를 낳으면서 죽을 고비를 넘겼는데 또 애기를 낳다가 사고나면 큰일이 아니오? 그저 세식구 알콩달콩 재밌게 잘 살면 되오.” 나는 어머님을 붙잡고 나를 친딸처럼 관심하는 어머님의 사랑에 목이 메여 엉엉 울었다.

    어머님은 생사를 넘나드는 모진 아픔도 참아가면서 일년 농사중 제일 중요한 모내기를 걱정하셨다. 어머님은 "내가 죽고파도 모내기가 끝나야 죽지 모내기 도중에 죽으면 너희들이 장례 치르느라 모두 들어앉아 있으면 모내기를 언제 끝내겠는가" 하면서 억지로 죽 물을 넘기셨다. 시어머님은 진통제도 없이 그 모진 아픔을 참아가며 하루하루 연명하셨다. 며칠후 안깐힘을 다하여 숨을 쉬던 어머님은 모내기가  끝났다는 소식을 듣고서야 숨을 거두셨다. 

    어머님은 64세 짧은 인생을 마감하였으며 돌아가실 때에도 자식들 걱정에 눈을 감지 못하였다. 평생을 자식 위해 고생한 시어머님은 이렇게 우리 곁을 영원히 떠났다. 

    어머님께서 돌아가신지 40년 세월이 흘렀건만 인자하고 사심이 없으며 항상 웃으시며 우리를 도와주던 자애로운 모습은 영원히 내 기억 속에 남아 있다. 눈이 소복히 내리는 날이거나 비가 잔잔히 내리는 날이면 코신 바람으로 색다른 음식을 만들어 들고 오던 시어머님의 발걸음 소리가 아직도 귀전에서 들리는 것만 같다.

    매년 어머님 산소 앞에서 절을 올릴 때마다 나는 가난한 세월에 효도 한번 제대로 하지 못하고 시어머니한테 꽃바지 하나 사 드리지 못한 자신을 책망하며 후회의 눈물을 흘린다. 나는 오늘도 어머님 산소에 무성하게 자란 풀들을 곱게곱게 깎고 정성을 다해 잘 다듬었다. 나는  마음속으로 어머님 "아픔과 고통이 없는 하늘나라에서 훨훨 날아다니며 마음껏 즐기세요 "라고 말하면서 두손 모아 기도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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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팽이 약속 시어머님 사랑

해마다 추석이 되면 나는 시부모님 산소를 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