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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년 전의 그날 밤, 우리는 영국인과 무엇을 다투었을가?

2022-07-01 17:09:28     责编:박운     来源:央广网
 

1997년 7월 1일 0시 0분 0초

중화인민공화국 국가가 울려퍼졌다

오성붉은기가 서서히 게양되면서 

향항은 조국의 품으로 돌아왔다

이 시각을 위해

우리는 너무나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2초, 23초, 12초

매 한개 수자의 배후에는

하나하나의 사연들이 숨겨져 있다

25년 전 향항 정권 인계식에서

분초를 다투던 배후에

우리는 대체 영국인과

무엇을 다투었던 것일가?

 

 

2초, 추호의 양보도 없다

우리가 다툰 것은

150여년의 영욕이였다

 

1997년 6월 30일 저녁

향항의회전람센터는

환한 조명에 휩싸였다

사람들은 이 곳에서

오성붉은기가 게양되는 순간을

학수고대하고 있었다

이에 앞서 중국측 인계식 준비소조는

2초를 쟁취하기 위해

영국측과 16차 담판했다

 

 

당시 향항 정권 인계식

국기게양식 총지휘를 맡았던

정지강은 이렇게 회억했다

“당시 영국은 국가를

6월 30일 마지막 1초까지

연주할 것을 요구했습니다.

중국은 2초 내지 3초를

앞당길 것을 요구했습니다.

왜냐하면 중국측 악대 지휘수는 연주 전

2초 내지 3초간의

준비시간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영국은 이에 동의하지 않았다

중국측 인원은 이 몇초간은

150여년간의 영욕과

관계된다고 인정하면서

이 문제에서 절대 양보하지 않았다

“반드시 0시 0분 0초에

국가를 연주하고

국기를 게양해야 합니다”

 

23초, 12초 다툰 것은

일초도 차이나지 않는 태도였다

 

향항 정권 인계식에서

영국측 인원의 발언은 23초 초과했다

중국측은 즉각 비상예비안을 가동하여

기타 고리에서의 속도를 다그쳐

시간을 벌었다

 

 

의식에서 영국 왕립군악대가 

12초 앞당겨 국가를 연주한 원인으로

중국 국가는

제때에 연주할 수 없게 되였다

당시 중국측 기수를 담임한 주도는

한발작도 움직이지 않았다

왜냐하면 국가가 1초 차이나면

국기는 12.3센치메터 격차가

생기기 때문이였다

 

 

“당시 렌즈가 나를 향해 있었기에

나는 머리를 돌릴 수도 없이

그 자리에 서있어야 했습니다.

이는 내 인생에서

가장 길고 가장 긴장한 12초였습니다.”

국가가 연주됨에 따라

주도는 12초간 응집한 힘을 모아

임무를 원만하게 수행했다

 

 

1997년 7월 1일 0시 0분 0초

오성붉은기는 계획에 따라

게양대 최상단까지 올라갔다

국가의 마지막 음표도 동시에 끝났다

이 시각 기나긴 시련을 겪은 향항은

끝내 조국의 품으로 돌아왔고

중화민족의 백년 치욕을 깨끗하게 씻었다

7월 1일 1시부터

향항 주둔 부대는 서로 다른 방향에서

향항에 진주했다

8시 40분 이전에 순차적으로

14개 군영이 주둔을 마쳤다

이로써 향항 주둔 부대는

향항 방위과업을 감당했다

 

1초의 오차도 없게 하기 위해

5000여차례 반복적으로 훈련

 

1초의 오차도 없게

인계식 임무를 완성하기 위해

주도와 전우들은 수개월간

5000여차례 반복적으로 훈련했다

입장으로부터 계단을 올라

국기를 게양하기까지

모든 동작은 ‘근육 기억’을 형성했다

국기 게양대 높이는 8.28메터이고

국기 상승 공간은 5.68메티이다

8차례 줄을 당겨야 했다

......

이 수자들은

지금까지도 기억에 생생하다

 

 

당시 영국측 의장대와

함께 훈련할 때 영국은

자신의 절주에 맞추길 바랐었지만

중국은 반드시 중국군인의

절주에 맞춰야 한다고 견지했다

당시 3군 의장대 대대장을

담임한 정지강은 이렇게 말했다

“150여년 후 우리가

영국의 동작을 모방한다면

존엄을 잃는 것이나

다를 바 있겠습니까?”

1997년 향항 정권 인계식 현장에서

중국군인은 중국식 행진법으로

회장에 진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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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년 전의 그날 밤, 우리는 영국인과 무엇을 다투었을가?

1997년 7월 1일 0시 0분 0초 중화인민공화국 국가가 울려퍼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