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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날 동네 놀이 지금은 세계급 무형문화재로... 조선족농악무의 어제와 오늘

2020-06-29 18:44:44     责编:박운     来源:央广网

 

    어릴적엔 텔레비죤이나 마을잔치에서 간혹 볼 수 있었던 농악무... 귀를 째는 듯한 꽹과리 소리와 기다란 상모를 경쾌하게 돌리는 신기한 모습에 다들 흥에 겨워 덩실덩실 춤추던 모습이 눈앞에 생생하다.

 

 

    옛날에는 명절때 조선족 마을에서나 벌이는 동네 놀이라고 생각했던 중국 조선족 농악무는 2006년 6월 중국 제1기 국가급 무형문화유산목록에 등재되였고 2009년에는 또 유네스코 인류무형문화유산대표목록에 등재되였으며 기네스 세계기록도 창조하는 놀라운 성적도 따냈다. 

 

[중국 조선족 농악무란?]

 

    농악무는 조선족들이 축제기간 밭이나 마을에 모여 지신에게 제사를 지내며 자연에 대한 경의를 표하고 풍작을 기원하는 춤의 일종이다. 축제 때는 촌마다 농악대를 파견하여 공연에 참가한다. 

 

 

    농악대의 코기러기는 ‘농자천하지대본(农者天下之大本)’이라고 쓰인 깃발을 흔들며 걷고 뒤에는 꽹과리, 징, 장고, 소고, 북, 태평소 등 악기를 든 농악대가 춤을 추며 마을이나 밭을 돌며 공연한다. 농악무의 마지막에는 항상 상모춤이 등장하는데 기다란 채색띠를 돌리는 멋진 모습은 전체 농악무의 하이라이트로 되고 있다. 

 

[조선족 농악무의 유래] 

 

    조선족 농악무는 잘아시다싶이 160여년전인 1860년대 자연재해를 피해 조선반도에서 동북지역으로 이주한 우리의 선조들에 의해 전해졌다고 할 수 있다. 19세기 중엽부터 수많은 조선반도 이주민들이 중국 동북지역으로 진입하며 조선족 문화는 이 지역에서 꽃을 피우기 시작했다. 

 

20년대 농악놀이

 

    연변대학 최호욱 교수가 1980년대에 진행한 조사연구에 따르면 일찍 1927년 가을 조선 강원도 춘천군 신동면 사암리에서 왕청현 대흥구진 계관향 영벽라자촌(影壁砬子)으로 이주한 10여가구의 농민들이 고향에 대한 그리움을 달래고저 농사를 마치고 함께 모여 막걸리를 마시며 사물놀이 악기나 농기구, 식기 등을 두드리며 노래하고 춤을 추었다. 이는 중국 조선족 농악무에 대한 첫 력사기록이자 중국조선족의 첫 농악대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1930년대 일본제국주의가 연변지역에 침입하며 조선인들에 대한 감시와 관리가 점차 엄해졌다. 마을의 큰 경축행사는 물론 농사일을 마친후 일상 모임도 금지당했다. 일제의 압박이 심하고 또 기후 조건이 차하고 수자원도 부족해 벼재배가 어렵게 되자 조선 농민들은 하마탕, 서외자, 백초구, 중안, 금전 등 지역으로 이주하며 영벽라자의 상모춤은 사라지게 되였다. 

 

    1928년 왕청현 영벽라자지역에서 농악무가 처음 나타난후 1920~30년대 투도(현재 화룡시), 신툰(현재 안도현) 등 지역에서도 농악무가 나타나기 시작했고 1945년좌우 연길현(현재 룡정시) 팔도촌의 조선족 농민들이 자체로 농악대를 조직했다는 기록도 있다. 이외에 길림, 흑룡강, 료녕, 내몽골 등 지역의 조선족 집거구에서도 이시기 농악대를 설립하여 농악놀이로 조선족 농민들의 향수를 달랬다는 기록을 찾아볼 수 있다. 

 

1950년대 왕청현 서외자 농민

전국인민대표대회 제1차회의 개최 경축

 

1960년대 걸립무

 

1962년 9월3일 주덕해동지와 인민군중이 함께

연변조선족자치주 성립 10주년 경축

 

1962년6월 주은래 총리가

연변가무단 공연 끝난후 접견

 

영벽라자

 

하마탕촌

 

백초구진

 

    1949년 중화인민공화국이 창건되며 조선족의 농악무는 큰 변화를 가져왔다. 특히 1980년대의 개혁개방후 농악무는 새로운 발전기를 맞이했는바 각 조선족 집거지의 전문예술단체와 각 민간예술단체들에서 농악무를 주요공연 종목으로 삼기도 했다. 특히 1987년 8월 백초구진에서는 “제1기 1000인 상모춤공연”을 조직해 국가문화부와 길림성문화청의 높은 긍정과 찬양을 받았고 1988년6월 연변조선족자치주문화국으로부터 백초구진은 “상모춤의 고향”이라는 칭호까지 받게 되였다. 

 

[농악무 조선족문화콘텐츠로]

  

    조선반도에서 동북3성으로 이주해온 조선인들이 향수를 달래고 풍작을 기원하기 위해 만들었던 농악무는 지금 중국조선족문화의 중요한 징표로 되여 조선족이라는 이름을 널리 알리는 명함장으로 되였다.

 

    중국조선족농악무가 2006년 제1기 국가급무형문화유산에 등재되고 2009년에는 유네스코 인류무형문화유산대표목록에 등재되면서 농악무를 과거 가무단 공연에서나 볼 수 있는 예술종목이라고 생각했던 사람들의 인식이 점차 변화를 가져오고 있다. 

 

 

    요즘 왕청현에서는 농악무에 대한 보호와 계승을 정부차원으로 끌어올려 조선족농악무보호센터를 설립하고 유치원, 학교에 아동, 청소년 농악무 훈련기지를 만들었으며 기업, 사업단위, 주요 향진과 촌, 부대, 사회구역에 농악무 훈련기지를 건립해 농악무 계승과 보급을 대폭 추진하고 있다. 

  

    특히 요즘 왕청에 가면 또 반드시 구경해야 할 새로운 장소가 있는데 바로 2019년에 건설한 조선족농악무전시청이다. 이곳은 상모춤의 력사와 문화재들을 관람객들에게 전시할뿐만아니라 또 상모춤 체험도 가능하게 했다. 

 

    이렇게 농악무는 조선족을 대표하는 명함장뿐만아니라 또 현지의 문화와 경제 발전을 추진하는 문화콘텐츠로 부상하고 있다. 

 

 

[전승인 김명춘: 아마추어에서 기네스 세계기록 보유자로 되기까지]

 

이름: 김명춘(金明春)

출생날자: 1958년12월23일

출생지: 길림성 연변조선족자치주 왕청현 백초구진 길상촌

현재: 중국조선족농악무 대표 전승인

 

    농악무의 전승인이라고 하면 간단하게 말해 바로 중국조선족농악무라는 이 무형문화재를 전세대의 예술인으로부터 전승받아 후대에게 전해주며 또 이 무형문화재를 기타 민족과 나라에 널리 전파하는 작업을 하는 사람이라고 말할 수 있다. 

 

1976년 백초구중학 선전대

 

1978년 “풍작의 기쁨” 공연

 

    김명춘은 어릴 적부터 노래와 춤에 재능을 보이며 마을 선전대에서 활약했다. 그가 농악무에 처음 관심을 가지게 된것은 1977년의 겨울이라고 한다. 당시 왕청현 백초구진문화소는 신흥문예선전대를 요청해 마을을 돌며 농악무 공연을 펼쳤다. 19살난 김명춘은 그때 처음 경쾌한 음악과 함께 선보인 상모춤의 매력에 푹 빠져들었다. 그후 그는 항상 무대에서 화려한 상모춤을 추는 자신의 모습을 상상했다고 한다. 

 

1982년 “세월이 좋을시구” 

 

1978년 전현문예합공연 

 

    그는 고향에서 농사일을 하는 한편 백초구진 상모춤훈련반과 길상촌농악무공연대를 따라다니며 무대공연을 배웠다. 조건이 렬악했던 당시 그는 알루미늄 그릇을 두드려 직접 상모를 만들고 쇠줄을 얻기 힘들어 자전거 바퀴살로 상모의 물채를 만드는 등 상모춤에 대해 남다른 열정을 보였다.

 

1982년 농악무 “명절의 밤”

 

    1979년 왕청현문예합동공연에 처음 참가한 그는 아마추어 배우로 되였고 1982년 연변조선족자치주 창립 30주년 경축대회에서 오성빈, 김만종 등과 함께 “명절의 밤(节日之夜)”이라는 작품을 선보여 길림성아마추어문예합동공연 1등상을 받기도 했다. 

 

1988년 중국 제1기 광장무시합

(곤명에서 진행)

 

1989년 국경 40주년 천안문광장 야회

 

1989년 국경 40주년 천안문광장 야회

 

1922년 연변조선족자치주 성립 40주년

경축대회 왕청체육장 연출

 

    1986년2월 김명춘이 주연 배우로 선 3인 농악무 “환락”은 연변조선족자치주문예합동공연의 우수상을 받았고 동북3성 조선족문예합동공연의 특등상, 전국민간음악무용대회 2등상을 받았다. 이 작품에서 김명춘은 소상모, 중상모, 대상모의 공연을 독자적으로 완성하여 큰 절찬을 받았다. 이 작품은 또 1987년 중앙텔레비죤 양력설야회 무대에도 올랐고 “농민일보”는 그를 ‘상모춤대왕’이라고 높이 평가했다.

 

2005년 중국민족문화박람회 

 

    조선족농악무가 중국 나아가 세계적인 영향력을 가지고 조선족의 위상을 떨치는데 김명춘 전승인의 노력을 절대 홀시 할 수 없다.  

  

    국가문화부는 2005년부터 무형문화유산에 대한 조사와 심사사업을 시작했다. 이 사업은 왕청현문화국의 높은 중시를 받았고 김명춘은 조선농악무 프로젝트신청 동영상 촬영에서 공연과 표기법 강의작업, 서면자료 작성도 책임지게 되였다. 그의 끊임없는 노력으로 2006년 조선족농악무는 제1기 국가급무형문화유산명록에 공식 등재되였다.

 

2008년2월28일 국가급 무형문화유산

중국조선족농악무 전승인으로 임명

 

    2008년 추석 당시 북경올림픽 문예공연 및 무형문화유산 홍보행사차로 북경에 왔던 김명춘은 문화부로부터 유네스코 인류무형문화유산 신청 기회가 있다는 통지를 접하고 급히 연변으로 돌아와 자치주와 현의 관련 지도자, 전문가들과 함께 신청자료를 준비하기 시작했다. 김명춘, 서봉학, 송미라 등 3인은 유네스코 무형문화유산 신청 동영상 촬영 전문가팀을 묶고 당시 가을걷이를 하지 않은 하마탕의 한 논밭을 빌려 촬영을 완성했다. 

 

    다양한 자료들을 알심들여 수집하고 정리한 덕에 중국조선족농악무는 2009년9월 유네스코 “인류무형문화유산목록”에 성공적으로 등재되였다. 

 

    중국조선족농악무는 중국의 유일한 무용류 세계무형문화재로 되였으며 조선족이라는 이름은 세계무형문화의 최고 전당에서 빛을 발하게 되였다. 

 

2012년 8월5일

왕청  1000인 상모춤 현장

 

2012년 8월5일

왕청 1000인 상모춤 전경

 

2012년 8월5일

왕청 1000인 상모춤 기네스 세계기록 오르다

 

2013년 2월14일

기네스 중국의 밤 프로현장

 

    2012년 8월 5일 김명춘, 허숙 등 예술가가 조직, 지도하고 직접 참가한 왕청현 1000인 상모춤이 기네스북에 오르며 세상을 놀래웠다. 김명춘 전승인은 또 2013년 2월 《CCTV1기네스 중국의 밤》프로그램에 출연해 32메터의 2갈래 긴상모를 돌리며 30초내 련속 41차의 줄넘기에 성공하며 기네스 세계기록을 세웠고 또 2014년 7월 기네스 본부의 요청에 응해 이딸리아 밀라노에서 30초내에 2갈래 긴상모를 돌려 44차의 줄넘기에 성공하며 과거 기록을 쇄신했다. 

 

[우리 민족문화가 정말 매력 있구나 하는 걸 느꼈습니다]

 

    김명춘 전승인은 외국 돈벌이를 떠나는 주변 사람들을 보며 마음이 움직인 적도 있었지만 다행히 가족의 지지와 상모를 사랑하는 관중들의 지지가 있어 지금까지 견지할 수 있었다고 한다. 

  

    2005년 국가급무형문화유산 신청 동영상을 촬영하기 위해 30여명 공연자조차 찾기 어려웠던 그 시기와 비교하면 지금은 정부와 사회 각계의 지지로 농악무는 전례없는 발전 기회를 맞이했다. 김명춘은 요즘 어린이부터 로년층까지 상모춤을 사랑하는 사람들이 크게 늘고 전문 공연장소와 훈련장소까지 많이 설치되면서 매일 새로운 학생들을 맞이하고 있다고 말했다.

 

 

    현재 김명춘과 그의 8명의 제자들은 조선족농악무의 전승을 위해 매일같이 바쁜 일상을 보내고 있다. 김명춘 전승인은 또 학생들을 가르치는 동시에 국내 여러 지역의 대형문화행사에 참가하고 또 미국, 로씨야, 이딸리아, 향항, 대만 등 지에서도 조선족의 위상을 떨치고 있다. 

 

    김명춘 전승인은 공연때마다 남녀로소 불문, 외국인들까지 환호하는 장면을 보면서 우리 민족문화가 이렇게 값진 문화라는 사실을 깊이 체감하며 전승인으로서 우리 민족의 농악문화의 계승과 발전을 위해 더 큰 노력을 경주할 것이라고 말한다. 

 

 

자료제공: 왕청현무형문화유산 보호센터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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