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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독] 20전짜리 지페속 조선족 소녀 - 그녀는 누구? 그녀의 근황은?

2020-01-13 17:31:00     责编:최월단     来源:央广网

20전이라고 하면 무엇부터 떠오를가?

70년대 20전이라면... 사이다 한병?

80년대 20전이라면... 얼음과자 한대?

90년대 20전이라면... 사탕 한알?

요즘 20전이라면... 그 잔돈을 언제 봤더라???

20전이라고 하면 각 세대마다 다양한 추억이 담겨져 있겠지만 80년대생인 나한테는 땡볕에서 땀을 뻘뻘 흘리며 놀다가 20전을 들고 상점으로 부리나케 뛰여가던 그 목마름이 오롯이 떠오른다. 

경제발전의 원인도 있겠지만 모바일 결제시대에 들어서며 20전짜리 지페는 사람들의 오래된 기억이 되여버렸다. 그러나 이 지페에는 조선족의 긍지와 력사가 담겨 있다. 

조선족 소녀의 모습이 담긴 20전짜리 지페

1980년대부터 발행된 제4판 인민페에는 소수민족들의 모습이 많이 등장한다. 특히 20전짜리에는 조선족 소녀와 투쟈족 소녀가 나란히 찍혀 있어 조선족들에게 특별한 의의가 있는 지페이다. 

“우리의 몸 값은 20전밖에 되지 않는가”라고 우스개를 하는 사람도 있지만 사실 개혁개방후 중국경제의 도약식 발전을 보여주는 제4판 지페의 표지모델로 우리 민족이 등장한 것은 아주 자랑스러운 일이다. 

그렇다면 20전에 찍힌 조선족 소녀는 누구인지? 어떤 이야기가 있는지? 지금 어떻게 살고 있는지?  등 많은 의문을 가지고 이 소녀를 직접 찾아 나섰다.

    이름: 소춘희(苏春熙)

   민족: 조선족

   고향: 길림성 장춘시

   생년월: 1963년 3월

20전짜리 지페의 표지인물 소춘희에 대한 기사는 인터넷에서도 쉽게 찾아 볼수 있었지만 그를 직접 만나 취재를 하면서 기사에서 읽지 못했던 많은 일들을 알게 됐다. 

길림성 장춘시의 한 제대군인 가정에서 태여난 소춘희는 1살때 부모님을 따라 연변조선족자치주에 오게 됐다고 한다. 문화대혁명이라는 특수시기에 그는 부모님을 따라 잠깐 화룡현의 부흥공사에 머물렀던 적이 있다.  10살 어린 나이때부터 소춘희는 병약한 어머니를 도와 동생들을 돌보고 가정일을 도맡아 하며 갖은 고생을 다하다가 아버지의 노력으로 다시 연길에서 초중을 다니게 되였다. 하지만 급작스러운 변고로 아버지를 잃게 되였고 홀어머니의 슬하에서 어려운 성장기를 보내게 되였다. 

16세 어린 소녀 북경민족문화궁 해설원으로

1979년, 새 중국 창건 30주년을 경축해 북경민족문화궁에서 국가민족사무위원회의 민족사업 30주년 전시회가 열렸다. 이 중요한 행사를 위해 국가민족사무위원회는 중국 55개 소수민족 해설원을 선발하게 되였고 16살난 소춘희는 행운스럽게 조선족 해설원(모두 3명)으로 발탁되였다. 

 

   주변 친구로부터 이 소식을 알게 된 소춘희는 수도 북경에 가고 싶은 간절한 마음에 선발에 참가했지만 큰 희망은 품지 않았다. 하지만 뜻밖에 어릴적부터 조선족학교와 한족학교를 다녀 조선어와 한어를 류창하게 구사할수 있고 또 청순한 외모를 가진 그는 수많은 경쟁자들을 물리치고 북경민족문화궁의 해설원으로 선발되였다. 

 

1979년 9월 북경에 도착한 그는 다른 소수민족 해설원들과 함께 교육을 받고 정식으로 북경민족문화궁의 해설원으로 일하게 되였다. 당시 유명했던 조선영화 “꽃파는 처녀”의 주인공 ‘꽃분이’를 닮았다는 말을 들으며 관객들의 사랑을 받았던 그는 어느하루 아주 특별한 임무를 받게 되였다. 

기자가 아닌 은행 직의 촬영 모델로

민족사업 30년 전시회 기간, 소수민족 해설원들은 북경 사회에서 큰 파장을 일으켰다. 각 신문사와 화보사의 기자들은 여러 소수민족 해설원들을 촬영하기 위해 줄지어섰고 또 민간의 촬영애호가들도 끊임없이 몰려들었다. 

1980년의 어느 봄날, 평소와 같이 촬영임무를 받은 소춘희는 다른 소수민족 해설원들과 함께 현장에 도착했다. 하지만 이날 촬영을 요청한 단위는 신문사나 화보사가 아닌 중국인민은행이였다. 

평소처럼 촬영을 마친후 그들은 이날 찍은 사진들이 중국인민은행에서 새로 설계하고 있는 인민페 표지에 등장할 가능성이 높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20전 지페 표지인물로 놀랍게 등장! 처음엔 남편도 믿지 않아... 

1981년 9월, 2년이라는 차출근무 기한이 완료되여 그는 해설원으로 일하며 정들었던 북경을 떠나 연변으로 다시 돌아갔다. 연변으로 돌아온 소춘희는 공청단 연변조선족자치주위원회에 배치받았다. 

새로운 일터에서 청춘을 불태우며 열심히 살던 그는 자신이 제4판 인민페 20전짜리 지페 표지인물로 등장한 사실은 꿈에도 몰랐다. 그것도 그의 어머니와 함께 시장에서 거스름돈을 받다가 우연히 발견했다고 한다. 

사실 제4판 인민페의 설계는 1967년부터 제기됐지만 여러가지 원인으로 1980년대에 이르러 설계를 마치고 1987년 4월 27일에 공식 발행되였다. 다시 말해 첫 제4판 인민페 지면에 찍힌 년도는 1980년이지만 실제 발행은 1987년 좌우라고 한다. 특히 조선족 소녀의 형상이 찍힌 20전 지페의 공식 발행시간은 1988년이였다. 

어머니의 우연한 발견으로 20전 지페에 찍힌 10년전 자신의 모습을 보며 소춘희는 격동을 금치 못했다. 하지만 성격이 내성적이였던 그는 주변사람들에게 이 사실을 크게 알리지 않아 그와 친했던 친구와 동료들도 그가 인민페 표지인물이라는 사실을 몰랐었다고 한다. 심지어 남편에게 자신이 20전 지페의 표지인물이라고 말했더니 남편 역시 그냥 롱담으로 여기며 믿지 않았다고 한다. 

그후 20전 지폐의 또다른 표지인물이였던 투쟈족 황기평(黄其萍)이 신문에 소춘희를 찾는다는 소식을 등재하며 그는 대중들의 시야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지페 표지인물이라는 신분으로 실리 챙긴 적 없어 

연변에서 몇년간 사업하며 경력을 쌓은 그는 1985년 중국민족박물관 건설을 위해 사업인원을 모집한다는 소식을 접하고 북경으로 향하는 기차에 몸을 실었다. 하지만 당시 편제가 부족한 탓으로 그는 정직원의 신분을 얻지 못해 출로를 고민하던 중 북경에서 대학공부를 하려는 결심을 내리게 되였다. 

1987년 그는 중앙민족대학의 간부교육학원에 입학해 대학공부를 시작했고 그후 우연한 기회에 1989년부터 한국에서 2년간 회사생활을 하다가 다시 귀국해 대학원 입시를 위해 1991년부터 북경대학 영어학과에서 외국어 공부를 시작했다. 북경대학에서 외국어 공부를 하던중 그는 우연하게 지금의 남편(회족)을 만나게 되였고 결혼후에는 북경대학과 손잡고 외국어학원을 운영하기도 했다.(건강 원인으로 몇년전 운영 중지)

그후 여러 언론사들의 보도를 통해 인민페 표지인물로 유명해졌지만 그는 이를 통해 실리를 챙기려하지 않았다. 그는 조선족의 형상을 대표해 인민페에 올랐다는 사실 자체만으로도 큰 영광으로 생각했기에 이를 통해 뭔가 얻으려는 생각을 한적이 한번도 없었다고 한다. 가끔 외부에서 그의 이미지를 리용해 뭔가를 해보자는 요청도 받았지만 번마다 완곡하게 거절했다. 

20전짜리 지페는 서서히 력사의 뒤켠으로 사라지고 있지만 

민족의 영광스로운 력사는 그대로 남아

제5판 인민페가 류통되면서 제4판 인민페는 2019년 4월30일에 시장에서 공식 퇴장했다. (20전 지페는 2018년 5월1일 류통 중지)

“요즘 20전짜리 지페를 다시 보면 어떤 느낌인가”는 물음에 소춘희는 예전에는 몰랐지만 요즘따라 애석함을 많이 느낀다며 소감을 말했다. 그는 제4판 인민페는 한 민족의 영예와 력사를 닮고 있고 또 소수민족에 대한 국가의 관심과 배려를 닮고 있기에 비록 시장에서 퇴출했더라도 항상 소중하게 간직할 것이며 향후에도 계속 국가의 번영과 민족의 발전을 위해 의의 있는 일들을 하고 싶다고 말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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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독] 20전짜리 지페속 조선족 소녀 - 그녀는 누구? 그녀의 근황은?

20전이라고 하면 각 세대마다 다양한 추억이 담겨져 있겠지만 80년대생인 나한테는 땡볕에서 땀을 뻘뻘 흘리며 놀다가 20전을 들고 상점으로 부리나케 뛰여가던 그 목마름이 오롯이 떠오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