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멸의 발자취(70)—동욕진 상무촌의 사적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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来源:| 更新时间:2015-11-17

1941년 조선혁명가들은 태항산 항일근거지에서 화북조선청년련합회를 조직하고 국민당 통치구로부터 북상한 조선의용대 주력을 중심으로 화북조선청년련합회 지도하의 조선의용대 화북지대를 편성하여 적후 항일투쟁을 진행하였다. 조선혁명가들은 팔로군의 작전을 도와주었고 무장선전활동을 전개했으며 또한 자체의 영향력과 힘을 키워나갔다.

오늘의 산서성 좌권현 동욕진 상무촌에서 창립대회를 소집한 조선청년련합회는 각지에 청년련합회 지회를 설립하였다. 그리하여 1941년 7월 8일, 조선청년련합회 연안지회(延安支會)가 설립되였다. 회장은 음악가 정률성이 맡았는데 연안지회 회원은 20여명이였다. 이날 지회 설립대회에 참가한 무정은 독립되고 자유로우며 민주주의적인 조선공화국을 건립할것을 호소하고 조선민족의 반일통일전선 구축을 호소하였다. 그리고 연안에 조선혁명 간부들을 양성할수 있는 조선간부학교 건립 결의안을 채택하였다. 그후 조선청년련합회 진찰기 분회도 나타났다.

1941년 6월, 국민당 구역의 조선의용대 주력이 태항산 항일근거지에 도착함으로써 팔로군 근거지에 모인 조선혁명자는 147명에 달했다. 그리하여 이들을 조선청년련합회에 받아들여 의용대로 재편성함이 필요하였다. 당시 조선청년련합회 회장인 무정은 연안에 있었기때문에 조선청년련합회 진찰기 분회 회장을 맡았던 진광화와 부회장 윤세주가 대원들에 대한 사상지도사업을 맡았다. 그리고 박효삼을 대장으로 한 조선의용대 화북지대가 《7.7》사변기념일인 7월 7일에 결성되였다. 화북지대 지대장은 박효삼, 부지대장은 리익성이였고 김학무가 정치지도원을 맡았다. 화북지대 본부는 동욕진 상무촌에 설치되였다.

 

(권립교수) “1941년 7월에 조선의용대 주력이 태항산근거지에 오자 련합회에서는 조선의용대를 조선의용대 화북지대로 편성하고 본부를 산서성 료현 즉 좌권현에 두었습니다. 지대방에 박효삼, 부지대장에 리익성, 정치위원에 진광화였습니다”

 

화북지대 본부 류수대(留守隊) 대장은 려운길(呂運吉)이였고 대원들로는 최창익, 왕지연, 장진광, 최손(崔孫), 마춘식(馬春植), 리치민(李治民), 양민산, 리달, 리대성, 리철준(李哲俊), 호일화(胡一華), 주연, 박성호(朴成浩), 장지복(張志福)등이였다. 기타 대원 다섯명이 더 있는데 신원이 밝혀지지 않고있다. 그리고 류수대 녀성대원으로는 한명숙(韓明淑), 문정원(文正元), 장수연(張秀延), 권혁이 있었다.

 

상무촌의 홍복사 옛 사원

 

홍복사 사원비석

로신예술학원 옛터(상무촌 마을)

 

조선의용대 화북지대 제1대는 대장 리익성, 정치지도원 진한중의 령솔하에 안양부근에서 활동하였다. 제1대 제1분대 분대장은 하진동(河振東), 제2분대 분대장은 리지강(李志剛)이였고 대원은 최지남(崔指南)을 비롯한 18명이였다. 제2대는 대장 김세광, 정치지도원 풍중부(馮仲夫)의 령솔하에 찬황부근으로 진출하였다. 제2대 제1분대 분대장은 조렬광이였고 제2분대 분대장은 손일봉이였으며 대원은 김강(金剛) 등 19명이였다. 제3대는 대장 왕자인, 지도원 박무였고 순덕(順德)에서 활동하였다. 제3대 제1분대 분대장은 한경(韓慶)이고 제2분대 분대장은 관건이였으며 대원은 장평산(張平山)을 비롯해 11명이였다.

조선청년련합회와 조선의용대 화북지대는 일제가 강점한 적후에도 간부들을 파견하여 지하활동을 전개하게 하였다. 강홍구(姜弘九), 리경산(李景山)을 상해에, 김해암(金海巖)을 한구에 파견하였으며 김위(金煒), 김창만, 조련(趙連), 심청택(沈淸澤), 진동붕(陳東朋), 김무, 림평을 북평에 파견하였다. 그리고 최계원(崔啓源), 봉오식(奉五植), 리철(李哲), 김파륜(金巴倫)을 석문(石門)에 파견하였고 주화(朱華)를 청도에 파견하였다. 뿐만아니라 국민당군 20사에 호유백을 파견하고 국민정부 림시수부 중경에 주진룡(朱震龍)을 보냈다.

재편성을 거친 화북지대는 조선청년련합회 진찰기 분회의 지도밑에 무장선전, 간부양성, 적후조직 활동을 활발히 전개하였다. 화북지대 각대는 구역을 나누어 하북 평한철도 구역으로 진출해 무장선전을 진행하였다. 그들은 좌담회, 련환회, 군중집회를 가지고 중국민중에게 항일사상을 전수하면서 필승의 신념을 심어주었다. 그리고 위험을 무릅쓰고 일제 보루나 초소에 접근하여 함화하기도하였으며 일본군 병사들에게 편지를 써서 제국주의자의 희생물로 되지 말것을 권고하였다. 또 도처에 선전표어를 붙이고 삐라를 살포했으며 도로, 철도를 파괴하고 전선(電線)을 절단하는 등 파괴활동을 진행하였다. 1941년부터 1942년 사이 화북지대는 유명한 선옹채전투, 호가장전투, 형대전투, 5월 반소탕 혈전을 겪었다. 그리고 북경, 천진, 상해, 청도, 무한, 중경 각지에 파견된 대원들도 각지 조선청년들을 규합시키면서 조직세를 확대시켜 나갔다.

 

(권립교수) “조선의용대 화북지대는 적후 근거지에 온 첫 일년간 주로 세가지 일을 했습니다. 하나는 적후 무장공작대를 조직하여 북경, 상해, 무한, 청도 등 전국각지에 파견하여 정보를 수집하고 우리민족 상황을 료해하며 의용대 입대사항을 처리하고 적후선전사업을 했습니다. 둘째는 조선의용대 간부학교를 세우고 각지에서 찾아오는 조선청년들을 받아들였습니다. 교장에 무정이고 부교장에 진광화였습니다. 세번째는 화북지대를 세 개분대로 나누어 우리 당의 령도하에 태항군구 산하에서 전투에 참가했습니다. 화북지대는 첫 일년간 팔로군에 배합하여 40여차의 대일작전에 참가했습니다.”

 

1941년 8월 15일, 조선청년련합회는 조선의용대 신입대원들을 교양하기 위해 동욕진 상무촌에서 간부훈련반을 개설하였다. 이 시기 적후로부터 온 30여명 조선청년들이 조선의용대에 가입하였고 국민당 구역으로부터 조선의용대 주력이 화북에 진입하였다. 그리하여 147명 조선청년들이 태항산항일근거지에 모이게 되였다.

조선청년련합회는 이들을 교육하기 위해 간부훈련반을 개설하였다. 조선의용대 화북지대 지대장 박효삼이 교장을 맡고 최창익이 정치위원을 맡았다. 그리고 최창익, 김학무, 한빈, 윤세주, 진광화, 박무 등이 교원으로 있었다.

훈련반 훈련내용은 정치와 군사 그리고 과외활동이였다. 정치는 조선문제와 정치상식과를 설치하여 공부하였다. 윤세주가 조선문제를 강의하면서 조선의 사회경제에 대한 분석으로부터 혁명동력과 혁명의 전도문제를 언급해 설명하였다. 최창익이 맡은 정치상식과는 연안의 항일군정대학 교재를 사용하였다. 주로 사회발전사, 국제문제, 정당문제가 언급되였다. 시사강의는 김학무가 맡았는데 매주 시사를 분석하고 연구하였다. 훈련반에서는 또 군사과목을 설치하였다. 주로 전선에서 활동할수 있는 기본상식과 초보적인 군사지식을 배워주었다.

상무촌에서 개설된 간부훈련반은 중국 관내 조선혁명자들이 자체로 개설한 군사, 정치학교였다. 훈련반은 그후 조선독립동맹이 창립됨에 따라 화북조선청년학교로 확대되였다. 뿐만아니라 연안의 조선혁명군정학교, 조선혁명군정학교 산동분교(山東分校)가 설립 되였다. 하북성 섭현 남장에서 답사하였던 조선혁명군정학교가 바로 이 간부훈련반의 계속이다. 화북지대가 조선의용군 화북지대로 확대된후 본부는 하북성 남장으로 이동하였고 그곳에서 더 큰 규모의 조선혁명군정학교를 세웠던것이다.

군 경력이 풍부한 박효삼, 정치선전사업에 능한 윤세주, 김학무, 연안에서 활동한 최창익 등이 교원으로 있었기때문에 학원들은 훌륭한 교육을 받고 기능을 련마할수있었다. 그리고 이 시기 중국공산당의 정치사상과 지도리념이 학원들에게 전수되였고 팔로군식 교육과 훈련이 전수되였다.

상무촌의 홍복사 유적지는 많은 사색을 불러일으켰고 또 많은 유감을 남겨주었다. 축구장만큼 큰 공지는 잡초가 무성하였고 이따금 부서진 유리기와가 보였다. 그것은 홍복사 옛절이 불타버린 후 남겨진 흔적이였다. 조선혁명가들은 여기서 조선의용대 화북지대를 재편성하고 간부훈련반을 개설했으며 팔로군과 함께 적극적인 사업을 전개했던것이다.

홍복사 옛터를 답사하고있을 때 형효수연구원이 마을의 75세 고령인 조은경로인을 모셔왔다. 로인은 마을 뒷산의 무명 조선의용군 렬사묘지를 60여년 묵묵히 지켜온 분이였다.

항일전쟁시기 10대 소년이였던 조은경로인은 늘 의용대 대원들과 함께 지냈다. 일찍 어머니를 여읜 그는 셋째 삼촌집에서 살았다. 당시 그의 셋째 삼촌집에는 조선의용대 간부 두명이 투숙하고있었다.

1941년 12월, 일제가 마을을 습격하였다. 마을에 있던 조선의용대 전사들은 신속히 마을 부근의 유리한 지세를 차지하고 기관총으로 적을 막고싸웠다. 그들은 마을 사람들이 전부 산으로 대피한 다음 철수하였다. 조선의용대의 엄호가 있었기때문에 상무촌은 리금주(李金柱)라는 농민 한명이 숨지는 피해만 받았을뿐이다. 그러나 이번 토벌에서 유격대의 엄호를 받지 못한 동욕촌에서는 150여명 농민이 적에게 살해 되였다.

조은경로인은 조선의용군은 마을사람을 구해준 은인이고 또 늘 빈곤한 사람을 도와주었다면서 그들의 은혜를 잊을수 없다고 하였다. 로인은 마을 뒷산에 조선의용군 렬사의 묘소가 있다고 하면서 렬사 이름은 모르겠지만 조선의용군 전사들이 전우를 묻어놓은것만은 분명하다고 하였다. 항일전쟁 승리 이후에도 로인은 늘 묘소를 찾아가 확인하였다면서 묘소의 분명한 위치를 확인해 주었다. 상무촌 마을사람들은 최근 돈을 모아 의용군전사 묘소를 보수하고 기념비까지 세웠다.

 

상무촌의 조선의용군 무명렬사묘소를 지켜온 조은경 로인

우리는 조은경로인을 따라 마을 뒷산으로 갔다. 현지인들은 그 산을 《토지뇌(土地𥔥)》라고 불렀다. 홍복사 뒤쪽으로 작은 골짜기를 지나니 산언덕이 나타났다. 오솔길을 따라 산언덕에 올라가니 옥수수 밭과 감나무 몇그루가 있었다. 잡초가 무성한 옥수수밭 옆에 묘비 하나가 보였다. 대리석 비석에는 《의용군렬사지묘(義勇軍烈士之墓)》라고 씌여있었다.

조은경로인과 같은 선량한 현지인들이 조선의용군 전사들을 잊지 않았기때문에 우리는 이 무명렬사 묘지를 찾을수 있었다. 지금 묘소 부근에는 마른 잡초가 무성하게 자라고있었다. 싸늘한 가을바람에 흔들리는 잡초 이름없이 누워있는 조선의용군 렬사, 우리의 마음은 무겁기만 하였다.

항일전쟁시기 그 어려웠던 항쟁의 나날에 조선의용군 전사들은 현지 군민과 함께 고락을 같이 했던 것이다. 수십년이 지난 오늘까지도 현지인들은 씩씩하게 적과 싸웠던 조선의용군전사들을 잊지 않고 있다. 피로써 맺어진 두 민족의 전투적 친선은 그 무엇으로도 바꿀수 없는 것이다.

责编: 金成龙